맨날 행복하고 걱정 없이 즐거우면 좋겠네
어릴 적 기억이 많지 않은데, 아직까지 생생한 장면 하나가 있다. 평소 아침엔 엄마가 방안까지 들어와 이불을 걷어내야만 겨우 일어났는데 일요일 아침만은 달랐다. 학교도 안 가는데 나와 동생은 누가 깨우지 않아도 스스로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왔다.
부스스한 머리에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손만이 정확하게 제 역할을 해냈다. 리모컨을 찾아 TV를 켰고, 잠시 후 화면에는 파랗게 물든 배경의 화려한 성이 비춰졌다. <디즈니 만화동산>이었다. 오늘은 어떤 공주가 나올까 티몬과 품바에겐 어떤 일이 생길까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시간들. 만화 속 공주가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티몬과 품바랑 '하쿠나 마타타'를 외치는 것만으로도 충만했던 시간들이었다.
- 인터뷰이: 가장 특이한 답변을 줄 것 같은 누군가
- 질문: 가상의 인물(만화 캐릭터, 영화 속 주인공 등)과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누구와 함께 하고 싶나요?
답이 정해져 있는 시험은 모르겠지만, 서술형에서만큼은 이길 사람이 없겠다 싶은 H를 인터뷰해보았다. 학창 시절 공부는 안 하고 딴짓을 많이 했던 것 같은데 글은 웬만한 친구들보다 잘 썼던, 논술로 대학교까지 합격한 친구였다.
가상의 인물과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누구와 함께 하고 싶어?
“와, 질문 진짜 참신하다! 나는 뽀로로!”
친구의 대답이 더 참신해서 놀란 것도 잠시, 우리가 사실 뽀로로 세대는 아니지 않나 반문했다.
“나 뽀로로 광팬이라 에피소드 나온 거 다 봤어. 말도 예쁘게 하고, 가끔 철없는 행동도 많이 하는데 마음이 되게 순수해.”
과연 뽀로로의 광팬이었다니! H는 축구를 좋아해서 점심시간은 물론, 방과 후에도 운동장 곳곳을 누볐다. 그래서인지 교복만큼이나 축구 유니폼을 입은 모습이 익숙했다. 누구보다 활기차고 장난기가 많은 친구였는데 귀여운 뽀로로의 광팬이라니, 친구의 다른 모습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뽀로로 광팬으로서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궁금했다.
“'크롱'이라고 뽀로로랑 같이 사는 공룡이 있어. 어느 날, 크롱이 잘못해서 뽀로로가 다쳐. 그래서 뽀로로가 움직이는 게 불편하니까 크롱이 대신 다 해주는데 얘가 편한 거에 맛들린 거야. 불편하지 않은데도 계속 크롱을 막 시켜먹어...”
친구와 메시지로 주고받고 있었는데, 같이 있었다면 "헉! 진짜? 그래서?”라고 리액션을 해야 할 거 같은 몰입도였다.
“근데 크롱이 너무 힘들어하니까 나중엔 뽀로로가 미안한 마음에 같이 일을 해주는? 뽀로로는 미안해할 때 표정이 완전 귀여워. 이거 5분 15초부터 잠깐 보면 돼.”
이렇게 세세하게 장면을 이야기하더니 유튜브 링크가 이어 왔다. 그걸 또 난 진짜 시청하고선, 네가 말한 표정이 이거 맞냐고 캡처를 해 보냈다.
“완전 귀엽지 않아? 맞아 정확해! 잘못을 뉘우친 표정.”
뽀로로와 친구 사이에서 갈 길을 못 찾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이제야 본 질문을 물었다.
뽀로로와 하루를 보내면 뭘 하고 싶어?
“뽀로로가 맨날 하는 거. 스노보드랑 썰매 타는 거! 그냥 하루 종일 뽀롱뽀롱 마을에서 놀아보고 싶다! 궁금해. 캐릭터 중에 뽀로로보다 행복한 캐릭터는 없을 거야.”
뽀로로가 행복해 보였냐는 말에 친구는 답했다.
“뽀로로는 맨날 행복해, 걱정 없이 즐겁지.”
오늘의 질문을 내게 던졌을 때, 주말 아침마다 만났던 디즈니 캐릭터가 먼저 떠올랐다.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보니 텔레비전 속 가상인물을 직접 만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만화 속 주인공처럼 나도 그렇게 행복할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옛날 옛적에-로 시작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하고 끝나는 이야기가 왜 그렇게 기다려지고 재미났는지. 어린 내가 본 세상은 늘 즐겁고 행복한 일만 있었는데, 머리가 커지면서 매일 행복한 것도, 걱정 없이 즐거운 것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세상의 쓴맛을 조금 알아가면서부터는 만화는 어린 아이나 보는 전유물이라 여기게 되었다. 그래도 인생이 팍팍하다 느낄 때, 까르르 웃는 아이들 틈 속에서 디즈니나 픽사 영화를 보면 마음이 조금 풀린다. H가 뽀롱뽀롱 마을에서 뽀로로와 하루 종일 스노보드랑 썰매를 타고 싶다는 것도 그런 마음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