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혀 있던 문을 열다
전화가 왔다. “어머니, 은지 미술 시간에 입을 앞치마에 그림 하나 그려주세요.”
뜬금없는 며느리의 부탁이었다. 그림을 그린다고 하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걸까.
잠시 웃음이 났다. 그래도 막 유치원에 들어간 손녀를 떠올리니 거절할 수 없었다.
전화를 끊고 가만히 상상해 보았다. 앞치마를 입고 미술실을 뛰어다닐 아이의 해맑은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 천 위에 내 그림이 얹혀 있을 모습을 함께 떠올렸다.
그림은 손녀에게는 작은 선물이겠지만, 내게는 오래 접어 두었던 나를 다시 펼쳐보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의 할머니’라는 이름 뒤에 가려져 있던 시간과 마음을, 그 위에 조용히 올려두고 싶어졌다. 다음 날 건네받은 것은 청지로 만든 뻣뻣한 군청빛 앞치마 한 장이었다.
넓게 펼쳐진 천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그 빈 공간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무엇을 그려야 할까. 귀여운 토끼일까, 꽃일까, 아니면 동화 속 주인공일까.
책장을 뒤적였다. 동화책을 꺼냈다가 다시 넣고, 화집을 펼쳤다가 덮었다.
쉽게 정해질 것 같던 일이 생각보다 오래 나를 붙잡았다.
그때 책들 사이에 끼어 있던 빛바랜 파란 홀더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꺼내는 순간, 안에 있던 종이 조각들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허리를 굽혀 한 장씩 주워 들자, 낯익은 그림들이 손끝에 와닿았다.
애니메이터 시절, 틈틈이 그려 두었던 나의 캐릭터들이었다.
여러 밤을 지새우며 그리고 또 고쳐 그렸던 얼굴들. 수없이 다듬어졌던 흔적들을 그대로 담은 채,
마른 종이가 되어 조용히 묻혀 가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종이 위의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또렷한 기억으로 다시 떠올랐다.
이제 그 인물들은 책장 속에 묻혀 있던 그림이 아니라,
그 시절 손끝으로 돌아와, 지금 이 자리에서 조용히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창틈으로 스며든 오후의 햇살이 군청빛 앞치마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앞치마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 비어 있는 공간이 조용히 손짓하며 나를 불렀다.
그리고 내 안의 어떤 자리가 소리 없이 천천히 깨어나고 있었다.
오래 닫혀 있던 문 하나가,
아주 조용히,
소리 없이 열리고 있었다.
*앞치마 드로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