쑤저우(苏州)의 진지후(金鸡湖) 호숫가의 어느 날, 햇살이 따스하게 비추고 바람은 살랑살랑 불어왔다. 호수의 물결이 태양 빛을 받아 신비로운 색깔을 만들어내며 춤추고 있었다. 약속 장소인 퓨전 레스토랑 ‘메이메이’에 조금 늦게 도착한 나는 긴 드레스의 끝자락을 살짝 쥐고 우아하게 걸어갔다. 호수의 아름다운 정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창가의 원형 테이블에는 몇몇 내 ‘위드’ 친구들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름다운 향내가 진지후의 바람에 실려 기분 좋게 다가왔다. 서로 기분 좋게 칭찬하거나 손뼉을 치며 수다를 떨었다. 특히 각자 차려입은 드레스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오늘 모임의 콘셉트는 ‘멋지게, 야하게, 그러나 우아하게’였다. 산드라가 말했다.
“이 드레스 타오바오에서 200위안 주고 샀어.” 엘리스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168위안, 한국 돈으로 3만 원 안쪽이야.” 하하 호호~
타오바오는 없는 게 없고, 없는 것도 있는 중국의 온라인 마켓이다. 우리의 멋 내기 모임을 위한 의상도 이렇게 저렴하게 준비할 수 있음에 더욱 신이 났다.
해외 생활에서 사람을 사귀는 것은 쉽고도 어려운 일이다. 주재원들은 대개 3년에서 5년 단위로 이동하기 때문에 정이 들만 하면 이별해야 한다. 터전을 잡고 사는 사람들은 만남과 이별을 여러 차례 겪는다. 그래서 우리의 만남과 이별은 더욱 아쉽다. 오늘의 만남 역시 두 사람을 보내는 자리였다. 우리 모임은 해리포터 원서 읽기로 시작되었고 자연스럽게 ‘위드해리’라는 모임명을 가지게 되었다. 매주 화요일 1시에 모여 점심을 함께 먹고, 두 시간 정도 해리포터 원서를 돌아가며 읽는다. 유라 님의 뛰어난 영어 실력 덕분에 낯선 발음이나 표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점심은 주로 후판 광장에 있는 한국 음식점에서 준비해 온다. 한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멋진 곳에서 기분을 내기도 하지만, 대개 시간 절약상 한곳에서 다 해결한다. 김밥, 잡채, 떡볶이 등 맛있는 한국 음식을 준비해 오면, 1시에 모여 식사하고 2시간 정도 함께 공부한다. 사람도 줄어들다 보면 네 시쯤 훌쩍 넘기기도 한다.
‘위드’는 모두 6명이다. 늘씬한 키에 긴 머리칼을 가진 유라님, 캘리그래피로 전시도 하고 강의도 많이 하시는 체리님, 모르는 게 없는 박식한 유리님, 활달하고 사교적인 산드라님, 두 아이의 엄마로 언제나 바쁘지만 항상 즐거운 엘리스님, 그리고 나 메이링. 그중 산드라님과 체리님이 한국으로 간다. 정성이 담긴 선물과 꽃다발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다시 만남을 약속하며 보낸다.
여기는 중국 장쑤성 쑤저우의 진지후. 진지후의 해가 기울면서 구름을 띄우고 바람과 함께 물결치며 우리를 보듬어준다. 그 중심에 우리 해외살이 위드님들은 한국말과 중국말을 섞어가며 그리고 해리포터의 영어도 간혹 비비대면서 물결 소리에 장단을 맞춘다.
쑤저우는 고대 중국에서 중요한 상업 중심지이자 문화적 중심지로 자리 잡아 왔다. 이 도시는 특히 아름다운 수로와 정원으로 유명하다. 쑤저우의 수로는 중국의 대운하 시스템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며, 이 수로망은 쑤저우를 ‘동양의 베네치아’로 불리게 한다. 대표적인 정원으로는 졸정원(拙政园)이 있다. 아름다운 꽃들로 장식되어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쑤저우에는 여러 개의 호수가 있다. 가장 유명한 태호(太湖)는 중국에서 세 번째로 큰 담수호로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하다. 또한 대게로 유명한 양등호(阳澄湖大闸蟹)도 있다. 이곳들은 모두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이다. 그러나 나는 리공티(李公堤)라는 아름다운 문화 지역을 품고 있는 진지후를 더 사랑한다. 인공섬인 리공티에는 각 나라의 음식점들이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고, 전시장이나 미술관이 여러 개 있어 언제나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가끔 기분이 가라앉을 때 차를 몰고 진지후 호숫가로 나가 리공티의 곳곳을 돌아다니기도 한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대도시에서만 생활해 온 나는 이곳의 조용하고 안정된 평화로움이 오히려 다른 종류의 불안함으로 다가왔다. 항상 긴장 속에서 뭔가를 해야만 했던 내게, 이 고요함은 외로움으로 느껴졌다. 그런 오랜 직업병을 다스리기 위해 나는 또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우연히 김미경 님의 강의를 접하게 되었다. 그 강의는 내게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다시 시작하면서 나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NFT를 접하면서 오픈씨에 그림을 올리고, AI 아트를 하며 내 작품이 디지털화되는 과정을 통해 시대의 흐름과 함께 한다는 만족감도 느꼈다. 진보된 형태의 원소스멀티유즈가 다시 내게로 오면서 진정한 나의 창작을 시작하게 되었다.
때로는 한국처럼 인터넷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아 속 끓기도 했지만, 나름 노년의 나를 멀리서 바라보면서 하나씩 둘씩 다른 계단을 밟아간다. 이 아름다운 쑤저우에서 제2의 삶을 시작한 나는 석양이 만들어낸 노을의 아름다운 색깔로 나를 완성하기 위해, 창작해 놓은 나의 소중한 작품들을 다시 모아본다. 언젠가는 조용하고 자그마한 어느 미술관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작품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소박한 전시회를 여는 꿈을 꾼다. 그때에는 특별했던 위드님들도 함께 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도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로 장식하고 우아하게 멋지게 차려입고 진지후의 가장 멋진 곳에서 한껏 기분을 낼 것이다. 해외 생활에서 형성된 우정과 추억,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서의 자기 발견과 창작. 오늘도 나는 진지후 호숫가에 비치는 아름다운 태양의 빛과 반짝거리는 물결과 함께 그림을 그린다.
이 글은 공저 『어쩌다, 해외살이』에 실린 저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