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해오던 일을 내려놓고, 지나온 것들을 지워가며 이제는 좋아하는 그림만 그리며 살면 편안해질 줄 알았다.
그러나 마음은 생각만큼 쉽게 비워지지 않았고, 알 수 없는 불안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캔버스 앞에 앉아 있어도 자꾸만 뒤로 밀려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를 앞질러 달려가는 세상의 빠른 속도에 나만 고여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초조함의 정체는 어쩌면, 내가 멈춰 선 사이에도 쉼 없이 변해가는 세상의 흐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 흐름을 따라 무언가를 해보려 이것저것 손을 대기 시작했다.
멈춰 있으면 그대로 스며들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나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바빴을 텐데, 그 위에 또 다른 것들을 얹으며 나는 다시 바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크게 의미를 두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지만,
새로움에 끌리고, 어느 순간에는 깊이 빠져들기도 하면서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숨 가쁘게 앞으로 나아가다 이만하면 되겠지 싶어 잠시 멈춰 서니,
이미 멀리 가 있는 사람들과 오래도록 자기 자리를 지켜온 사람들이
내가 쉽게 닿을 수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며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내가 애써 찾아 붙잡고 있던 것들은 문득 초라해 보이고 아무런 의미도 둘 수 없게 되었다.
스르르 힘이 풀리면, 나는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돌아설 구실을 먼저 찾는다.
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면, 나는 슬그머니 돌아서곤 한다.
시작할 때보다 더 커져버린 막막함 속에서
나는 다시 캔버스의 빈 공간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설득한다. 의지가 약해서라고, 체력이 부족해서라고.
그럴듯한 이유를 붙이고 나면 마음은 잠시 가벼워진 듯하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나는 또다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력함 속으로 빠져든다.
애써 모았던 마음은 스르르 흩어지고,
나는 그것을 주워 담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가장 편한 쪽으로 몸을 맡긴다.
다리를 쭉 뻗고 누워
리모컨을 쥔 채,
아무 생각 없이,
가장 만만한 텔레비전 속으로 숨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