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화해

달력 프로젝트

by Meiling

나는 일단 일을 저지르고 보는 편이다. “달력 만들어서 연말 선물할게.” 남편에게 달콤한 큰소리를 치고,

곧장 남편 회사에서 200부라는 적지 않은 주문부터 덜컥 받아버렸다.

아직 하얀 여백뿐인 열두 달을 200명의 책상 위에 올리겠다고 약속해 버린 것이다.

책상 위 달력을 넘기다 잠깐 스친 ‘나도 달력을 만들어야겠다’는 확신이 나를 움직였을 뿐,

내 손에 완성된 그림은 단 한 장도 없었는데 말이다.

호기롭게 내뱉은 말은 현실이 되어 돌아왔고, 자신감은 서서히 걱정으로 변했다.

텅 빈 캔버스 앞에서 붓을 든 손이 갈 곳을 몰라 허공을 맴돌았다.

표지까지 모두 13장을 그려야 하는 작업은 묵직한 무게로 나를 짓눌렀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얼마나 큰 사고를 쳤는지.

달력 제작은 단순히 그림만 그리면 끝나는 낭만적인 작업이 아니었다.

인쇄부터 종이의 질감, 판형의 크기, 글씨체, 제작 일정까지 신경 써야 할 것 투성이었다. 더구나 중국 현지에서 제작까지 해야 하니, 언어의 장벽을 넘어 세세한 사양을 확인하는 일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전쟁 같았다.

표지부터 마지막 12월까지 계절의 흐름이 끊기지 않아야 했고, 전체적인 색의 톤도 어긋나지 않아야 했다.

처음 한 장을 완성하기까지 며칠을 밤낮없이 붙들고 있었다. 200명이 매일 내 그림을 마주할 거라는 생각이 손목을 무겁게 눌렀다. 수많은 밤을 넘기고서야 겨우 초안이 나왔지만 시간은 부족했고 조바심은 커져갔다.

절박함이 극에 달하던 어느 순간, 한줄기 반짝 생각이 스쳤다.

AI.

‘AI를 써보면 어떨까.’

모든 과정을 고집스럽게 손그림으로만 채워야 할까. 구도와 색의 도움을 받는다면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

그리고는 아직도 내게는 익숙하지 않은 AI에게 마음속 생각을 문장에 실어 보냈다.

그러자 AI는 기다렸다는 듯 이미지를 쏟아냈다.

경이로움이 채 올라오기 전에, 이름 모를 서글픔이 명치끝에 먼저 걸렸다.

그림들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밤새 고민하며 붙잡았던 선들보다 훨씬 매끄럽고 유려해 보였다.

그동안 보낸 여러 날들이 고작 몇 초의 연산과 나란히 놓이는 순간, 내 자존심에 가느다란 금이 갔다.

어쩌면 내가 두려웠던 것은 기술이 아니라, 내 시간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미지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저 버튼 몇 번 눌러 나온 결과라 넘기기엔, 그 안에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미묘한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AI는 내 자리를 빼앗으러 온 침입자가 아니라, 나를 위한 또 하나의 도구일지도 모른다고.

밤새 그린 손그림과 단 몇 초 만에 나온 이미지를 작업대 위에 나란히 올려두었다.

그리고 섞기 시작했다. 디지털의 매끈한 구도 위에 나의 붓질을 얹었다. 기계가 만든 구조 위에 나의 색과 숨을 입혔다. 지우고, 고치고, 다시 덧칠하는 과정 속에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조금씩 화해했다.

우여곡절 끝에 열세 장의 그림이 있는 달력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물감으로 터치하며 그리는 그림을 사랑한다.

손그림이 쌓아 올린 시간의 무게는 쉽게 대체될 수 없다고 믿는다. 허지만 이제는 기꺼이 받아들이려 한다.

지키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서로의 적이 아니라는 것을.

흐름에 몸을 싣되, 방향 만은 내가 정하면 된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밤새 그린 그림도, 몇 초 만에 나온 그림도,

결국 마지막 붓터치를 결정하는 주체는 나였다.

그 겨울밤,

나는 도구와 화해했다.

그리고 다시 붓을 들었다.


* 한 해가 될 열두 장의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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