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가가 외면했던 영화 한 편이 설 연휴를 전후로
넷플릭스를 타고 '조용히' 요란하다.
영화 <장손>이다.
명절에 가족들이 함께 보기엔
'대놓고' 불편한 영화였을 것이다.
사실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다.
장남 중심의 상속, 아들과 딸 차별,
며느리에게 집중되던 집안 내 노동과 돌봄,
제사를 둘러싼 위계.
이 속 시끄러운 이야기들은 한국 사회에서
수십 년째 반복되어 온 것들이다.
내용만 놓고 보면 놀라울 것도 없다.
다만, 하필 설 연휴로 가족이 집약적으로 호출돼
긴장 높아진 계절에 터졌다.
게다가 이젠 달라져야 한다,는 말을 집단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시절 아닌가.
시대의 불편한 공기를 제대로 관통했다.
이들 문제를 이야기할 때
영화 속 장면을 도덕적 비판으로만 소비하면
중요한 맥락을 놓칠 듯하다.
생각해 보면,
과거 한국 사회에는 촘촘한 연금 제도도,
장기요양 시스템도 충분하지 않았다.
병들고 늙으면 가족에게 기대는 것 말고는
대안이 거의 없었다.
노후와 사후의 문제를 자식에게 기대는 구조는
선택의 여지가 없던 것이다.
그러니 재산을 잇는 아들,
집안의 이름을 이어갈 장손은
곧 생존 전략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 세대를 냉정한 계산가로
단정할 수는 없다. 노후를 책임질 보험 삼아
자식을 키운 건 아닐 테니 말이다.
대부분은 사랑과 책임, 관습과 불안을 구분하지
못한 채 살았다.
다 그렇게 살아왔다, 는 말은
변명이면서 동시에 진실인 것이다.
결국 누군가 악의적으로 설계한 제도라기보다,
불안을 덜기 위해 반복한 선택이 쌓여
구조가 되었고, 그 구조가 세대를 건너
전통이 되고 도덕이 되었다.
인간 사회는 대개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이런 시스템은 대개 소수의 설계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을 지탱하는 힘은 다수의 무비판적 수용이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말이다.
한심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렇다.
관습이 귀찮은 사유를 대신해 주니
정당한지 묻는 불편한 일은 보류하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 질문 대신 불합리함을 알면서도
반복을 택한다.
반복된 관행이 어느 순간
도덕이 되고, 효가 되고, 전통이 된다.
좋든 싫든 옳든 그르든.
그런데 근래엔 또 다른 착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전통'이란 탈을 쓴 채 버텨 온 시스템이
흔들리기 시작하니, 우리가 성평등으로 가고 있다,
고 착각한다.
아들과 딸의 차별이 가라앉았고
"아들보다 딸"이라는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닌
시대다. 겉으로 보면 분명한 변화다.
과거의 남아선호와는 정반대의 흐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곧 성평등의 성숙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단정하는 건 섣부르다.
과거에 아들이 필요했던 이유를 다시 떠올려보면
답은 단순하다.
결국 아들은 자신의 생존과 사후의 안정을 맡길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것이 제도화되면서 장남 중심
사회가 굳어졌던 것처럼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아들이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은 거의
사라졌고, 며느리가 돌봄을 감당해야 한다는
규범에도 의문이 제기된다. 실제 돌봄의 현장에는
친딸이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장면이 흔하다.
사람들은 경험으로 배운다.
"아들이 노후를 보장해주지 않는구나."
그 인식이 쌓이면 시선은 자연스럽게 이동한다.
내 생존을 도와줄 가능성이 높은 쪽으로.
딸이 낫다, 고 말하는 현상 또한
결국 생존에 대한 불안이 만든 변화인 셈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늙음과 고립, 병듦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줄여줄 장치를
찾는다. 그 장치가 과거에는 아들이었고, 지금은
딸로 이동하는 중일뿐이다.
영화 <장손>에는 딸의 몫을 줄여 장손을 세우는
분명한 가해의 구조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쉽게 악마로 단정되지는 않는다.
조금 더하고 덜함의 차이일 뿐,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근본적으로 묻지 않았던 우리 자신의
얼굴이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자신이 피해자인 줄 또렷이 인식하지
못하고, 가해자 또한 자신이 가해자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역할을 수행한다.
문제는 개인의 악의라기보다,
질문 없이 반복되어 온 구조에 있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가 성평등의 진전이라고 믿고 싶은
근래 변화의 일부도 결국 오해이고 착각일 수 있다.
인간은 고결해서 제도를 바꾸는 존재이기보다,
불안하기 때문에 구조를 조정하는 존재에 가깝다.
지금의 변화를 그저 생존을 위해 방향을 튼 것이라
보는 이유이다.
제도는 위대한 철학에서만 태어나지 않는다.
대개는 두려움에서 태어난다.
늙음에 대한 공포, 고립에 대한 불안,
책임을 나눠 가질 수 없다는 초조함.
그 감정을 덜기 위해 역할을 만들고,
의무를 배분하고, 그것을 도덕으로 포장한다.
이 작품은 과거의 폐단을 보여주지만
덕분에 현재의 착각도 깨우쳐주고
미래에 대한 질문도 던져줬다.
우리는 정말 평등해지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더 유리한 쪽으로 계산을
수정하고 있는가.
우리는 여전히 생존의 부담을
자식이라는 개인에게 얹어둔 채,
그 대상만 바꾸고 있을 뿐이다.
착각하기 쉽지만, 껍데기만 바뀐 변화일 뿐
그 속에 담긴 정신까지 성숙해졌다고 보긴 어렵다.
결국 인간은 나약하다.
그래서 제도를 만든다.
그리고 그 제도는 대개 인간의 나약함을 반영한다.
문제는 그 나약함을 인정한 뒤,
어디까지를 개인의 몫으로 둘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영화가 끝나니 애써 외면해 온 그 질문을
더는 미룰 수 없게 된다.
덧붙이자면, 이 영화는 꽉 막힌 과거 세대의
삶만 보여주는 건 아니다.
농촌의 사계절을 유난히도 아름답게 담아낸다.
아름다운 자연과 결코 아름답지 않은 가족의
관계가 묘한 긴장 속에 조화롭다.
서로의 가장 따뜻하고 안전해야 할 자리이면서,
동시에 서로의 삶을 가장 깊게 갉아먹는 가족의
아이러니처럼.
부드럽지만 쉽게 부서지는 작품 속 '두부'조차
위태로운 이 가족을 향한 의도된 은유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