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학도가 바라보는 브랜드 무지(MUJI)의 가치
내 삶에 여러 프로젝트들 중 한동안 진행하지 못했던 프로젝트가 있는데, 바로 내 수납체계 세우기 프로젝트다. 프로젝트의 목표는 수납 체계를 세워서 사물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요 몇 년간 자주 이사를 다녔던 터라, 원래 소유하던 물건을 계속 쓰자는 생각으로 프로젝트를 미뤄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한국 사회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듯 하고, 또 엉망이 된 집 공간을 오랫동안 방치하니 체계를 바로잡고 싶은 욕구가 최근 들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오늘 구본창 작가님의 개인전을 관람하러 서울 시립미술관에 갔는데, 때 마침 작가님의 토크쇼가 열리고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현대사진 개척에 기여한 분인데, 오브제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작가였다. 한 청중은 전시를 보고 있으면 마치 오브제와의 연애기 같다는 평을 하기도 했다.
"작가님은 수 많은 오브제를 어떻게 관리하시나요?"
질문 세션에서 한 청중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
"저의 집에는 무지 박스가 정말 많습니다. 수 백 개 있을 거예요."
그는 웃으면서 오브제 정리하는 방식에 대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핵심은 무지(MUJI) 수납상자라 했다.
그는 살면서 수집한 오브제들은 그에 맞는 공간에 넣어둔다고 했다. 예를 들어, 북한에 관한 오브제를 수집한다면, 북한이라는 라벨을 박스에 붙이고, 북한과 관련된 것 같은 오브제와 조우할 때마다 이를 북한 박스에 넣어둔다는 것이다. 이 행위를 수 개월 수 년동안 자연스럽게 그 주제에 맞는 오브제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그만의 아카이빙 루틴인 것이다.
예술가들에게 있어 아카이빙은 중요한 주제다. 세상의 정보를 수집하는 기초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아카이빙 방식보다 그가 사용하는 박스 브랜드에 더 마음이 갔다. 잊고 있던 수납체계 세우기 프로젝트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수납체계를 세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나는 물건을 담는 상자를 선택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상자 내용물에 접근하는 방식과 상자의 규격이 곧 정리하는 방식을 결정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미적인 것은 당연하고. 그래서 상자 브랜드를 신중히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나는 적절한 유형의 상자를 찾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다이소, 동네 마트, 온라인 쇼핑몰 등 다양한 브랜드들의 다양한 규격의 상자를 써봤지만,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마감 품질은 떨어졌으며, 매해 상품 라인이 일관되지 못했고(올해 샀던 제품을 내년에 못 살 가능성이 있다), 무엇보다 브랜드들의 규격들이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결국 프로젝트를 잠시 접어두고 마음에 드는 것이 나타날 때까지 있는 것을 쓰자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그러다 오늘 구본창 작가님이 오브제를 정리할 때 무지 상자를 쓴다는 말을 듣고, 왜 무지 박스를 살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무지 매장의 4층 구석에 숨어있어 눈에 익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다. 토크쇼가 끝나고 집으로 오는 길, 무지로 달려가서 남은 예산한도 내에서 상자 몇 개를 업어왔다. 어쩌면 오랫동안 미뤄왔던 프로젝트의 끝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았다.
지난 몇 년 간 나는 수납 브랜드에 있어서 일관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았다. 종종 사람들이 무지에 대해 단순하고 깔끔하다고 평하는 경우를 봤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표면적이고 단편적인 매력일 뿐이다. 무지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일관성에 있다. 이는 수년 동안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기획자의 입장에서 아주 무서운 말인데, 수 년동안 다른 상품들과 싸워도 지지 않는 상품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이 결국 포기하지 못하는 상품의 규격, 재질, 컬러 등은 무엇인지에 대한 체계적인 데이터와 높은 수준의 디자인 내공이 필요하다.
나는 무지 상품을 사용하면서 규격에 관한 놀라운 경험들을 여러 번 했다. 나는 메모광이어서 메모지의 종이의 품질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 수년 동안 최적의 사이즈와 재질의 메모지를 찾아왔다. 요즘은 잘 안 쓰지만 한번은 A5 종이에 열정이 생겨 서울 문구와 인터넷 서점을 다 뒤졌지만 적절한 종이를 찾을 수 없었던 적이 있다. 주문 제작 말고는 딱히 답이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마음에 드는 A4용지를 사서 반으로 재단하여 사용하곤 했다.
그렇게 몇 개월간 고생하다 우연히 무지 매장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도했다. 그곳에는 내가 그토록 찾던 A5 규격의 메모지들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dot, line, plain 등 다양한 종류의 종이와 이 메모지들을 속지로 쓸 수 있는 바인더까지 완벽히 구비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도 전 지점에 말이다. 그때 나는 무지가 나에게 '네가 올 줄 알고 미리 다 준비 해두었지. 원하는 대로 골라봐. 앞으로 평생 규격 걱정 없이 살게 해줄게'라고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수 많은 곳을 다녔는데도, 심지어 교보문고에도 찾을 수 없었던 그 규격을 무지는 이미 모두 준비하고 있었다. 하라 겐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무지(MUJI)를 표방한 '단순', '순백' 이런 컨셉의 브랜드들이 몇 해 전부터 우후죽순 생겨나는 것을 본다. 대체로 이런 브랜드들은 시각적으로 미니멀리즘을 표방할 뿐 비즈니스 모델은 철저히 소비주의를 지향한다. 폰트, 컬러, 재질, 레이아웃 등 디자인 요소는 일관됨이 부족하다. 나는 이러한 움직임에 깊은 우려를 하고 있다. 왜냐하면 생활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활에는 일관성이 중요하다. 생활 속 사물들의 규격과 재질이 자주 바뀌고 또 그 사물들이 서로 생김새가 달라 서로 공명하지 않고 충돌하게 되면 공간의 보이지 않는 질서가 무너진다. 나는 이런 것들이 쌓여 사람의 정신을 오염시킨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공간은 마치 자신의 머릿속처럼 신중하게 다루야 한다. 생활 공간에 미적 탁월함에 기반한 일관성을 부여한다면 놀랄 만큼 삶의 안정감이 생길 것이다. 마치 선물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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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