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은 3년전에 시작되었다
20대의 끝자락에 혼자 유럽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유럽 여행을 꿈꿔왔지만 집안 형편상 한번도 해외여행을 갈 수 없었던 나는 29세에 치른 자격시험의 합격자 발표가 나자마자 끌어모을수 있는 모든 자금을 동원하여 유럽에 다녀왔다. 제주도도 한번 못가본 내 생애 첫 해외여행이었다.
베니스 부라노 섬에 들러 눈부신 날씨 덕에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은 날이었다. 이 행복한 상황에 난데없이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났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나 혼자 봐도 되나 하는 죄책감 비슷한 감정이었던 것 같다. 엄마에게 카톡을 보냈다. “엄마, 여기 너무 아름답고 좋다. 나 혼자만 좋은 것 보러 와서 미안해.”
답장이 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는 니가 좋은게 제일 좋고, 니가 행복한게 제일 행복해.”
내 눈에 비친 엄마의 삶은 참으로 고단한 것이었다. 8남매 중 다섯째, 그것도 딸로 태어나 학교도 원하는 만큼 다니지 못했다고 했다. 몸이 약해 집에만 있다가 느즈막히 아빠와 선을 보고 결혼을 했다는데 가진 건 쥐뿔도 없으면서 허세만 충만한 아빠를 만나 그야말로 고생을 바가지로 했다. 아빠는 어디가서 돈도 잘내고, 주머니에 있는 돈도 잘 흘리고 다니고 합의금이 필요한 사고도 잘 치는 그런 사람이었다. 돈이 모일 턱이 없었다. 아빠는 다정한 사람도 아니어서 엄마의 생일 한번 챙겨준 적이 없었다. 나는 꼬마적부터 코묻은 돈이라도 모아 작게나마 엄마의 생신을 챙기곤 했었는데 엄마의 생일은 챙기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게 너무 슬퍼서였다. 내가 대학생이고 아빠가 식도암을 얻었던 때가 가장 힘든 시기였는데 엄마가 운영하던 식당도 장사가 잘 되지 않아 문을 닫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루 18시간을 꼬박 고생하면서 일을 하는데도 돈이 없어 절절매던 엄마. 작은 체구의 엄마는 늘 지쳐보였고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볼 때면 마음이 덜컹 내려 앉았었다. 그런데 나 마저 바로 취업을 하지 않고 공부를 더 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엄마는 꼬박 5년을 더 내 뒷바라지를 하셨다.
그랬으니 시험 합격했다고 혼자 턱 유럽으로 떠나버린 내 마음속에 어찌 죄책감 조각 하나 없을 수 있었을까. 이건 내가 아니라 엄마가 즐겨야 하는 풍경들이 아닌가. 까만 썬글라스 아래로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섬을 둘러봤다. 엄마에게 저 카톡을 보낼 때는 부라노 안 어딘가 식당이었는데 엄마에게 답장을 받고 통곡을 하며 먹물 리조또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희안한 차림의 자그마한 동양 여자애가 이 좋은 날씨에 이 좋은 관광지에서 혼자 통곡을 하고 있었으니 그 날 부라노에서 또 하나의 볼거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 때 결심했다. 유럽, 엄마를 모시고도 한번은 꼭 와본다.
무사히 귀국해서 일을 시작했다. 사회 초년생으로 몸도 마음도 바쁜 3년을 보냈다. 물론 그 3년 동안에도 엄마와 여행을 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매년 나의 휴가는 엄마와 함께 했고 우린 어딘가로 여행을 떠났었다. 그렇지만 비교적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드는 유럽은 차마 엄두를 못내다가 3년차가 되던 해의 여름, 용기를 냈다. 엄마의 나이가 벌써 67세였다. 부모님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그 말이 항상 마음에 남았다. 조금이라도 걷기 편하실 때 가는게 맞다고 판단했다. 안된다고 하면 다른 직장 알아본다는 베짱으로 일주일 휴가를 질렀다. 고작 일주일 휴가를 낸거라 휴일 포함한 9일을 빠듯한 일정으로 다녀와야 하지만 갈 수 있는것 만으로 기뻤다.
엄마에게 유럽 중 가보고픈 곳이 있었느냐 물었더니 딱히 생각해보신 곳은 없단다. 그럼 어디로 정하면 좋을까, 자연 풍경이 멋진 스위스? 예술품이 가득한 프랑스? 엄마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던 이탈리아? 고민하고 있는데 엄마가 자주 보던 영화가 생각났다. TV에서 방영할때마다 틀어두셔서 나도 이제 인이 박히도록 본 그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이다. 엄마가 젊었을적 개봉한 영화다. 그리 오래된 영화를 그렇게 매번 보느냐고 물으면 “알프스의 풍경이 너무 아름답지 않니? 노래도 아름답고.” 라고 하셨지만 그 영화에 오래된 사랑의 추억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이거다.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러가자, 잘츠부르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