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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동산이 Nov 08. 2024

2장 4편 부여夫餘 (1) #3

부여가 일어나기까지 (3/4)

오환에 대해 한서 소제기 원봉 03년 겨울 기사는 요동-군의 오환이 등돌렸다[C-1:-②]고 적었습니다. 이어, 범명우를 도요-장군으로 삼으니[C-1:-④] 범명우가 북쪽 변방의 7개 군들에서 각각 2,000명 곧 모두 14,000명의 말탄 군사들을 거느렸고[C-1:⑤] 그리하여 그 군사들이 오환을 [C-1:]고 적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시점은 MC-77/10[+3)입니다.


C-1 한서 소제기: (원봉 03년) 겨울 ① 요동(-군)[遼東]의 오환烏桓이 ② 등돌렸다. ③ 중랑장中郞將 범명우范明友가 ④ 도요-장군[度遼-將軍]이 되도록 하였다. ● (도요-장군이) ⑤ 북쪽의 변방 7(개의) 군들마다[郡郡] 2,000(명) 말탄 군사들을 거느렸고, ● (군사들이) ⑥ 그들[之](= 오환)을 쳤다. (元鳳三年)冬①遼東烏桓①反③以中郞將范明友④爲度遼將軍●⑤將北邊七郡郡二千騎●⑥擊之


그런데 이 일은 한서 소제기가 정리한 것처럼 처음부터 오환이 한에 등돌렸다고 보아 일어났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시작과 끝 대해서는 한서 흉노전의 구절이 자세히 적고 있습니다.




한서 흉노전은 한서 소제기와 같이 범명우가 도요-장군이 된 일[D:- = C-1:③-④]을 적었는데, 보다 앞서 한이 항복한 흉노 사람들을 얻어[D:-②] 그 사람들에게 오환이 흉노의 앞선 선우의 무덤을 팠[D:③-] 그리하여 흉노가 군사들을 보내 오환을 치려고 한다[D:-⑩]는 말을 들었다고 적었습니다.  범명우는 본래 오환이 등돌려서 치려던 것이 아니라 오환을 치려고 하는 흉노 군사들을 치려던 것입니다.


D 한서 흉노전: ① 한漢이 ● 다시 ② 흉노匈奴면서(= 흉노 사람들 가운데) 항복하는 이들을 얻었는데, ● (항복한 사람들이) 말하기를 "③ 오환烏桓이 ④ 일찍이[嘗] ⑤ 앞선 선우單于의 무덤[冢]을 파니[發] ⑥ 흉노가 ⑦ 그 일[之](= 선우의 무덤을 판 일)을 미워하였고, ⑧ 바야흐로 ⑨ 20,000명의 말탄 군사들을 뽑았으니 ● (군사들이) ⑩ 오환烏桓을 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⑪ 이 때에 ⑫ (범)명우明友에게 벼슬을 주니 ● (범명우가) ⑬ 도요-장군[度遼-將軍]이 되었고 ● (도요-장군이) ⑭ 20,000(명)의 말탄 군사들을 거느리니 ● (군사들이) ⑮ 요동(-군)[遼東]을 나갔다. ⑯ 흉노匈奴가 ● 듣기를 ⑰ 한漢 군사들이 ⑱ 이르렀다, 고 하니 ● (흉노는) ⑲ (군사들을) 이끌어 (돌아)갔다. ⑳ 오환烏桓이 ㉑ (이) 때 새로 ㉒ 흉노匈奴 군사들을 맞추었으니[中](= 상대하니). ㉓ (범)명우는 ● 마침내 ㉔ (돌아가는) 흉노匈奴를 뒤로 하고서 ● 이어 ㉕ 오환烏桓이 지쳤음[敝]을 타고 ㉖ 그들[之](= 오환)을 쳤다. ①漢●復②得匈奴降者●言③烏桓④嘗⑤發先單于冢⑥匈奴⑦怨之⑧方⑨發二萬騎●⑩擊烏桓⑪於是⑫拜明友●⑬爲度遼將軍●⑭將二萬騎●⑮出遼東⑯匈奴●聞⑰漢兵⑱至●⑲引去⑳烏桓㉑時新㉒中匈奴兵㉓明友●旣㉔後匈奴●因㉕乘烏桓敝㉖擊之


이어 한서 흉노전은 범명우가 20,000명의 군사들을 거느렸고[D:⑭] 그 군사들이 요동-군을 나[D:⑮]고 적었습니다. 앞서 한서 소제기는 7개 군들에서 2,000명씩을 거느렸다[C-1:⑤]고 하였으니, 처음 범명우가 거느린 군사들은 6,000명이었는데 그리고서 떠나 이르렀던 요동-군에서 7개 군들에서 모아 보낸 14,000명 함께 하여 20,000명을 거느렸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범명우가 나갔던 곳은 다른 6개 군이 아니라 제일 동쪽에 자리한 요동-군이었으니 이 때 흉노가 오환을 노린 곳 요동-군의 새 바이고 따라서 오환의 우두머리들 이 때 요동-군의 새 바깥에 있었을 알 수 있니다. 그런데, 흉노 왼쪽의 땅 끝에서 마주하는 예, 맥, 조선과 또한 요동-군의 서쪽에 자리하 오환의 우두머리들이 머물러 있던 곳 또한 여기였습니다.


한서 흉노전은 범명우가 그곳에 이르렀을 때에 흉노가 한 군사들이 이르렀음을 듣고 군사들을 이끌고 돌아갔다[D:⑯-⑲]고 적었으니, 앞서 7개 군들의 한 군사들이 요란스럽게 움직였기에 흉노가 그것을 알았차 것입니다. 그리고서 범명우는 오환이 흉노 군사들을 상대하며[D:⑳-㉒] 지친 것을 노려[D:㉕] 흉노 군사들을 뒤로 하고서[D:㉓-㉔] 오환을 쳤습니다[D:㉖].


이러한 일의 경과를 한서 소제기는 그 사정을 생략한 채 간단히 상대를 오환이라고 적었습니다. 한서 흉노전이 적은 바, 오환 사람들이 흉노-선우의 무덤을 팠고 그리하여 흉노 군사들이 요동-군의 새 바깥에 침범하여 오환 우두머리들을 노리게 되었던 일에 대해서, 한서 소제기는 오환이 한에 등돌렸다[C-1:①-②]고 적고 이어 범명우가 오환을 쳤다[C-1:] 적은 것입니다.




오환을 치고자 움직인 흉노 군사들을 상대하려던 한 군사들이 나간 곳이 요동-군이었으니, 오환의 우두머리들이 있던 곳은 흉노의 왼쪽 땅의 동쪽, 예, 맥, 조선과 맞닿은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사기 흉노열전이 적은 바, 흉노-선우의 땅인 운중-군, 대-군에서 곧바로 가는 곳[E:-②]동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던 니다. 렇기에 의문이 남습니다. 오환 사람들은 어떻게 흉노-선우 있는 곳 이 수 있었을까요?


E 사기 흉노열전: ① 선우單于의 땅[庭]은 ② 곧바로 대(-군)[代], 운중(-군)[雲中](에서 가는 곳)이었다. ①而單于之庭②直代雲中


후한서 오환열전은  일나기에 앞 한무-제가 다스릴 때 곽거병이 흉노의 왼쪽 땅을 쳐서 깨트리고[F:③] 5개 군들의 바깥에 있  땅에 오환 사람들을 옮겨 [F:④] 그들이 흉노 살[F:-⑥]고 적었습니다.  일로 말미암아 오환 사람들 일부는 여러 군들에, 그 가운데 흉노-선우의 땅에 가까운 상곡-군 땅  있었, 그리하여 흉노에게 패배하였던 일을 갚고자 그 선우의 무덤을 팔 수 있었니다.


F 후한서 오환열전: 이윽고 ① 무-제[武-帝]가 ②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霍去病을 보내니 ● (곽거병이) ③ 쳐서 흉노匈奴의 왼쪽 땅을 깨트렸다. ● 이어 ④ 오환烏桓을 상곡(-군)[上谷], 어양(-군)[漁陽], 우북평(-군)[右北平], 요서(-군)[遼西], 요동(-군)[遼東] 5(개) 군들[郡]의 새塞 바깥으로 옮기니 ● (오환이) ⑤ 한漢의 살피는 사람[偵]이 되어 ⑥ 흉노의 움직임, 멈춤을 살폈다. 及①武帝②遣驃騎將軍霍去病●③擊破匈奴左地●因④徙烏桓於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五郡塞外●⑤爲漢偵⑥察匈奴動靜


이것은 앞서 흉노 군사들을 상대할 군사들을 모은 한의 7개 군들에 대해 알려주니, 곧 흉노-선우의 땅 가까이 있던 운중-군, 대-군, 흉노의 동쪽 땅 가까이 있던 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이 그것입니다.


상곡-군 바깥의 오환 사람들이 흉노-선우의 땅에 있던 무덤을 파고서 달아나 요동-군 바깥에 이르니 흉노 군사들이 따라 7개 군들의 북쪽 땅을 지나 동쪽 땅으로 갔고 이에 범명우가 흉노 군사들이 지나간 군들에서 2,000명씩을 보내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요-를 건너 요동-군에 이르러서 본래 거느리고 왔던 6,000명과 더하여 20,000명을 거느리고는, 요동-군을 나가 흉노 군사들을 상대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장소가 어디였는지, 다음 글에서 나머지 자료를 통해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오환의 옛 이야기를 이렇게 깊이 살펴보는 것음 그들이 머물렀던 장소 가까이 부여가 처음 등장한 장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장소는 부여라는 무리 이름과 깊 관련되어 있기에, 살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음 글에서 이 이야기를 끝내고, 부여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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