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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동산이 Nov 10. 2024

2장 4편 부여夫餘 (1) #5

부여夫餘라는 이름[名] (1/2)

이제 부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음 살펴볼 것은 그들이 머무르던 발의 땅, 그것에서 비롯된 그 이름니다.




조선 사람들이 들어와 하나의 무리를 이루게 되는 사이, 발發 사람들도 점차 달라졌습니다. 여전히 단-군의 다스림을 따르기는 하지만, 이어오던 본래 무리의 이름을 따라 머무는 땅을 불弗, 물줄기를 불/비[沸]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고서 새로 조선 사람들이 머물던 땅 - 불의 서쪽에 있던 땅을 불의 서쪽[西] 곧 부서弗西라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부弗라는 글자는 그것을 적고 있는 물건에 따라 바깥쪽 세로 획들이 떨어져나가서 비非라고 적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발에 있는 물줄기 비沸와 소리가 같기에 소리가 같은 다른 글자로 적은 것이라고 여겨, 조선 사람들이 머물던 땅을 비서非西라고 또한 적었습니다.


이 이름은 두 가지 자료에서 보입니다. 하나는 국사기 지리지의 구절이며, 다른 하나는 제왕운기 주석이 인용한 단군본기의 구절입니다. 첫번째 것은 다른 글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이 이름이 비롯된 바를 보여주는 두번째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단군본기는 단-군이 하-백, 곧 물줄기 가까운 곳에서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사람의 딸과 혼인하였고[1장 3편 T:] 그리하여 아들을 낳아 부루라고 하였다[1장 3편 T:-]고 적었습니다. 이 가운데 하-백이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곳을 적어 非西岬이라고 하였는데, 갑岬은 곧 물가를 이르는 것이니 그곳의 이름은 비서非西였습니다.


1장 3편 T 제왕운기 주석 인용 단군본기: <(단-군이) ① 비非의 서쪽[西] 물가[岬] 하-백[河-伯]의 딸과 더불어 혼인하였다. ② 아들[男]을 낳으니, ● (아들은) ③ 이름하여 ● (말하기를) ④ 부루夫婁라고 하였다.> <檀君本紀曰①與非西岬河伯之女婚②而生男●③名●④夫婁>


그런데 이것이 과연 비라는 곳의 서쪽이라는 뜻일까요? 그냥 처음부터 그 뜻이 분명하지 않은 비서라는 이름은 아니었을까요?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습니다.


삼국유사 기이편 주석이 인용한 단군기는, 앞서 단군본기가 적은 바 단-군이 아이를 낳아 부루라고 한 일[1장 3편 T:②-③ = 1장 3편 U:-]을 또한 적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 단-군과 함께 하였던 부루의 어머니를 서쪽 물줄기 하-백의 딸[1장 3편 U:]이라고 적고 있으니, 서西는 처음부터 비非과 함께 하나의 이름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따로 그곳을 이르는 것이었습니다.


1장 3편 U 삼국유사 기이편 주석 인용 단군기: <① (단-)군君이 서쪽[西] 하河 하-백[河-伯]의 딸과 더불어 ② 가까이하였다[要親]. ● (단-군이) ③ 낳은 아이[子]가 있으니, ● (아이는) ④ 이름하여 ● 말하기를 ⑤ 부루夫婁라고 하였다.> <壇君記云①君與西河河伯之女②要親③有●産子●④名●曰⑤夫婁>




조선 사람들은 본래 부弗를 발發이라고 적었지만 그 에서 이미 오래 지나 라진, 스스로 소리를 적는 방식에 따라 부弗를 부夫라고 적었습니다. 발, 이제는 스스로의 옛 이름을 내세우기 시작한 부弗 사람들을 따라 그리한 것이니, 이 사람들 부弗 사람들이 서쪽을 이르던 부서弗西 부서夫西라고 적고는 그 땅의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이 머무르 발의 서쪽 땅은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진 사람들이 머물던 곳, 진-번 땅 가까이 맞닿아 있었니,  사람들 또한 그곳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진 사람들은 그 땅의 이름을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달리 적니다. 이 이름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사람들이 전한 바를 적은 자료로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편과 삼국사기 신라본기가 있는데, 둘 가운데 그들이 이르던 이름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입니다. 신라의 첫 왕 혁거세-거서간의 호에 대해,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거서간 진 사람들의 말로 왕이었다[-]고 적데, 또한 그 앞에 국의 호를 서라-벌이라고 하였다[H:-]고 적었습니다.


H 삼국사기 신라본기: ① 국國의 호號를 ● (말하기를) ② 서라-벌[徐那-伐]이라고 하였다. ... ③ 거서간居西干은 ④ 진辰(= 진 사람들)의 말로 ⑤ 왕王이었다(= 진 사람들이 왕을 말하기를 거서간이라고 하였다).  ①國號●②徐那伐...③居西干④辰言⑤王


살펴보면, 서라-벌이라는 단어 가운데 벌은 성城/국國을 이르는 것이고 라那는 여러 성들/국들을 거느리는 방邦을 달리 적은 것이니, 서라-벌은 서라는 방의 우두머리가 있는 국/성을 적은 것입다. 그 땅의 우두머리의 호인 한旱을 달리 적은 간干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꾸미는 말을 보태어 적은 호가 서西에 머무르는[居] 우두머리干니, 진 사람들 서徐와 서西를 서로 바어 적을 수 있다고 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 사람들이 달리 적은 이 이름 부서夫徐는 이윽고 그들과 맞닿은 서쪽 연燕 땅에 있는 여러 군들을 통해 달리 적혀 한漢에 알려졌습니다. 그렇게 다시 알려진 이름은 무엇이었을까요?


한참 뒤 일이지만, 부여가 연燕 땅에서 일어난 모용-씨에게 패배한 뒤에 연에 신하노릇하던 부여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 대해 전한 바를 적은 자치통감 진기 태원 10년 가을 기사 그 이름을 여암餘巖[J:①]이라고 적는데, 진서 모용수재기는 그 이름을 서암徐巖[K:①]이라고 적었니다. 곧 이 사람에 대해 전한 연 사람들은 서徐와 여餘를 서로 바꾸어 적을 수 있다고 여겼을 알 수 있습니다.


J 자치통감 진기: (태원 10년 가을 07월) ① 연燕 건절-장군[建節-將軍] 여암餘巖이 ②등돌렸다. (太元十年秋七月)①燕建節將軍餘巖②叛
K 진서 모용수재기: ① 건절-장군[建節-將軍] 서암徐巖이 ② 무-읍[武-邑]에서 등돌렸다. ①建節將軍徐巖②叛于武邑


그리하여, 부弗의 서쪽[西]을 가리키던 부서弗西를 그 땅의 조선 사람들이 뒤에 이름으로 삼아 적던 부서夫西를 진辰 사람들이 얻어 부서夫徐라고 적었는데, 이것이 연 사람들을 통해 전하여지며 부여夫餘라고 달리 적게 되었습니다. 뒤에  이름은 연 땅의 사람들을 통해 한漢에, 그곳에 있는 무리 이름으로 알려졌으니, 이것을 적은 것이 앞서 살핀 바 사기 화식열전의 구절입니다.




그런데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들이 남아 있습니다. 예컨대, 어째서 여餘와 서徐를 서로 바꾸어 쓸 수 있었던 것일까요? 여와 서 가운데 어느 쪽이 본래 부여의 소리에 가까운 것일까요?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며, 부여의 일이지만 그렇게 여겨지지 않고 있는 또다른 일들을 다시 살펴 이해해보기로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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