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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동산이 Nov 29. 2024

2장 4편 부여夫餘 (1) #18

예濊로 가는 새로운 옛 길 (4/5)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편은 위 때에 고구려-위 전쟁을 치르며 이르렀던 옥저라고 스스로 일컫던 무리가 있는 땅에 대해 새로 알게 된 것들을 모두 적었고, 뒤에 이 내용을 정리하고 몇 가지를 보탠 것들을 후한서 동이열전 동옥저편이 적었습니다.


그런데, 그 구절들 가운데에는 위만이 조선에서 왕 노릇을 하며 다스릴 때에 옥저가 모두[皆] 위만을 따랐다[2장 1편 B:①-②]고 적은 구절이 있습니다. 앞서 이 구절을 인용한 바 있는데, 얼핏 보면 옥저라는 무리 그리고 땅 이름이 위만이 다스릴 때부터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과연 그러하였을까요?


2장 1편 B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편: ① 이(= 위만이 조선에서 왕노릇할) 때 ② 옥저沃沮가 ● 모두 (위만을) 따랐다[屬]. ①時②沃沮●皆③屬焉




이미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은 낙랑-군과 임둔-군의 동쪽 땅을 지키도록 따로 동-부를 나누어 도위를 두었고, 낙랑-군에 임둔-군을 아우르면서 이곳은 낙랑-군의 동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서 에, 옥저 - 옥저 땅의 무리들낙랑-군을 따르게 되으니, 이 일을 삼국지 위서 동옥저편은 또한 옥저가 돌아와서[還] 낙랑-군을 따랐다[G-4:①-②]고 적었습니다.


G-4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편: ① 옥저沃沮가 ② 돌아와서 낙랑(-군)[樂浪]을 따랐다[屬]. ①沃沮②還屬樂浪


이 때, 돌아왔다[還]고 적은 것은 보다 앞에 삼국지 위서 동옥저편이 옥저의 곧 옥저 땅에 있는 성城에 현토-군을 두었다[G-2:⑤]고 적은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한漢의 현토-군을 없애자 현토-군을 따르던 무리들이 바로 한을 따른 것이 아니라 뒤에 돌아와 낙랑-군을 따랐던 것입니다.


앞서 낙랑-군을 따랐다고 적은 구절들에 이어지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편의 구절들그렇게 다시 낙랑-군을 따르게 된 과정을 보여줍니다. 한은 옥저의 땅이 단단-대-산령 동쪽에 있다고 여겼다[G-5:①-③]고 적고, 이어 나누어 동-부 하고 도위를 두었는데 치治가 - 도위를 둔 곳이 - 불내-성이었다[G-5:-⑤]고 적었습니다. 앞서 삼국유사가 인용한 전한서가 적은 동-부와 도위에 대해, 그 치治불내-성에 있었다는 점을 또한 적은 것입니다.


G-5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편: ① 한漢은 ② (옥저의) 땅[土地]은 ● 넓게[廣] 멀리[遠] ③ 단단-대-(산)령[單單-大-領] 동쪽에 있다고 여겼다. ● (앞서) ④ 나누어 동-부[東-部]로 하고 도위都尉(= 위들[尉]의 우두머리[都])를 두었는데, ⑤ 치治가 불내-성[不耐-城]이었지만 (뒤에) ● 따로 ⑥ (단단-대-산)령 동쪽의 7개 현들에(=현들에 대해서도) 우두머리 노릇을 하니(= 하게 되니) ⑦ (이) 때 ⑧ 옥저沃沮가 ● 또한 ⑨ 모두 ⑩ (도위가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현들[縣]이 되었다.  ①漢②以土地●廣遠③在單單大領之東●④分置東部都尉⑤治不耐城●別⑥主領東七縣⑦時⑧沃沮●亦⑨皆爲縣


그런데, 이어 도위는 뒤에 따로[別] 단단-대-산령 동쪽의 7개 현들에 대해서도 우두머리 노릇을 하였다[G-5:⑥]고 적었습니다. 여기 별別이라는 글자를 보태어 적은 은, 치인 불내-성이 있던 곳 본래 단단-대-산령 동쪽의 땅이 아니라 본래 단단-대-산령 서쪽 멀리 있었기 때문입니다.


러한 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17년 09월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사는 먼저, 화려-현과 불내-현이 거느린 말탄 군사들이 신라의 북쪽 변방을 침범하였다[J-2:-③]적었고, 이어 맥-국이 군사들로 하여금 - 말탄-군사들이 움직인 또는 움직일 길목 - 곡-하[曲-河]를 막도록 하니[J-2:④-⑥], 맥-국군사들이 "서쪽으로 가서[西]" 그들 - 2개 현들이 보낸 말탄 군사들을 패배시켰다[J-2:-⑧]고 적었습니다.


J-2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17년 가을 09월 ① 화려(-현)[華麗], 불내(-현)[不耐] 2(개) 현들[縣]의 사람들이 ② 잇달아 꾀하여 말탄 군사들[騎兵]을 거느렸고 ● (말탄 군사들이) ③ 북쪽 변방[境]을 침범하였다. ④ 맥-국[貊-國]의 우두머리[渠帥]가 ⑤ 군사들[兵]이 ⑥ 곡-하[曲-河]를 막도록 하니 ● (군사들이) ⑦ 서쪽으로 가서 그들[之](= 화려-현, 불내-현의 말탄 군사들)을 ⑧ 패배시켰다. (儒理尼師今)十七年秋九月①華麗不耐二縣人②連謀率騎兵●③犯北境④貊國渠帥⑤以兵⑥要曲河⑦西⑧敗之


그런데, 삼국사기 지리지 신라편은 고금군국지를 인용하여 고구려의 동남쪽 땅이었고 예의 서쪽 땅이었던 맥의 땅대개 지금 신라의 북쪽 땅인 삭-주였다[AI:-⑤]고 적었습니다. 곧 삼국사기 신라본기가 맥-국이라고 적은 곳은 예의 서쪽 땅에 있었으니 지금의 태백-산맥 서쪽 땅에 해당합니다.


AI 삼국사기 지리지 신라편 인용 고금군국지: ① (고)구려의 동남쪽이었고(= 동남쪽 땅이었고) ② 예濊의 서쪽인(= 서쪽 땅이었던) ③ 옛 맥貊의 땅은 ● 대개 ④ 지금 ⑤ 신라新羅의 북쪽(= 북쪽 땅인) 삭-주[朔-州]였다(= 삭-주에 있었다). 賈躭古今郡國志云①勾麗之東南②濊之西③古貊地●盖④今⑤新羅北朔州


화려-현의 말탄 군사들이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불내-현의 말탄 군사들과 더불어 불내-현에 모인 뒤, 태백-산맥 서쪽에 있던 맥의 땅보다  서쪽에 있던 길로 - 동쪽으로 - 움직여 신라 북쪽 변방을 침범하였던 것입니다. 그니 반대로 움직여서 이르게 되는 불내-현이 있던 곳, 불내 이름한 땅은 태백-산맥의 서쪽 멀리 있니다.


더하여, 이러한 기사를 통해 앞서 전한서가 이른바 낙랑-군, 임둔-군의 동-부에 도위都尉 - 군사들을 거느리고 지키는 위들[尉]의 우두머리 - 을 두어 대비하도록 하였던 상대가 예의 서쪽에 있었던 맥임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점은 다시 뒤에 다른 자료로 이어니다.


일단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본래 낙랑-군의 동-부는 단단-대-산령 서쪽의 땅에 해당했다는 것입니다. 도위가 단단-대-산령 동쪽 7개 현들에서 우두머리 노릇을 하게 된 것은 그 뒤 옥저를 비롯한 그 동쪽 무리들이 돌아와 르기로 하였던 때[G-5:-⑩]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하여 다시 한을 따르게 되었을 때 그 무리의 이름은 옥저沃沮가 아니었습니다. 이 점은 2가지 자료에서 타납니다.


하나는 한서 지리지 적고 있는 바, 낙랑-군을 따르는 현들의 이름입니다. 그 가운데에는 옥저沃沮가 적혀있지 않고, 제일 마지막에 이르러 부조夫租라는 이름이 적혀있을 뿐입니다.


다른 하나는 낙랑-군이 있던 현재의 북한 지역에서 발견된 호구부 - 호戶와 구口라는 단위를 가지고 낙랑-군에 있던 사람들의 수를 적은[簿] 목간 적고 있는 현들의 이름입니다. 이것은 낙랑-군에 있던 사람들의 수를 각각의 현 이름 아래 나누어 적고 있는데, 여기에도 현 이름들 가운데에 옥저 없고 부조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은 낙랑-군의 조선이라는 이름을 현의 이름으로 쓰며 그리하였듯이, 현의 이름 가급적 그곳에 있던 무리가 스스로 이르던 글자를 써서 적 그렇지 않으면 한에서 그 글자의 소리를 적는 다른 글자를 써서 적었습니다. 곧 본래 옥저라는 이름이 있던 - 북쪽의 예가 머무르는 곳의 무리 이름은 옥저가 아니었,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편보다 앞서 옥저라고  시작한 어떤 시기까지 한에서 부조夫租를 읽는 소리 읽던 어떤 글자들로 적 이었습니다.




이 이름은 보다 어떤 이름이었을까요? 뒤에 바뀐 옥저라는 이름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그 이름을 찾을 수 있고, 그것을 통해 한이 새롭게 열었던 옛 길에 대한 부여의 움직임에 대한 이해가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다음 글에서 그을 찾아 이 길에 대한, 이 시기 부여의 움직임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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