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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동산이 Nov 28. 2024

2장 4편 부여夫餘 (1) #17

예濊로 가는 새로운 옛 길 (3/5)

한漢이 진-번-군을 없애고서, 이어 평양 - 현재의 평양-시가 있는 곳이 니라 첫 단-군이었던 왕검이 도읍하였던 곳 - 과, 북쪽의 예가 있는 곳에 두었던 현토-군을 잇는 길을 새로 열어 남쪽의 예 오고가고자 하니, 멀리 북쪽으로 돌아 북쪽의 예에 이르는 길로 남쪽의 예에 이르던 부여 또한 대응하는 것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러한 상황에, 부루가 다스리던 부여 사람들 - 옛 조선 사람들을 어내던 로운 우두머리 움직임이 있었고 그것이 부여의 움직임으로 이어졌습니다.




, 앞서 흘-승골-성에 대해 살피며 결과만 간단히 언급하였던  - 아이가 없는 부루를 대신하고자 하던 새로운 우두머리가 일어나 그 호를 천-제라고 하던 일에 대해 그 상황을 담은 자료들을 먼저 조금 더 읽어보지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먼저, 앞서 살핀 바와 같이 부여-왕 부루가 나이많아 아이가 없었다고 적은 뒤에, 이어 산과 물줄기에 제사지내며 아이를 구하던 부루가[Q-10:-②] 곤-연[鯤-淵] 큰 돌[大石]에서 아이를 얻으니 금색 개구리[金蛙](= 금와)의 모양을 하였다[Q-10:-⑬]고 적었습니다. 이어 부가 그 아이를 천天이 주었다고 하고 거두어 돌보았고[Q-10:-⑳] 그리하여 아이가 자라 부여의 왕태자가 되었다[Q-10:-㉔]고 적었습니다.


Q-10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부루가) ① 산山, 강[川]에 제사지내고 ② 자리이을 아이[嗣]을 구하였다. ③ 그(= 부루가) 타던 바 말이 ④ 곤-연[鯤-淵]에 이르러 ⑤ 큰 돌을 보았는데, ● (말과 돌이) ⑥ 서로 ⑦ 마주하여 눈물을 흘렸다. ⑧ 왕王이(= 부루가) ⑨ 이 일[之]을 이상하게 여기고[怪] ⑩ 다른 사람[人]에게 시키니 ● (그 사람이) ⑪ 그 돌을 돌렸는데, ● (그 돌에) ⑫ 나이어린 아이[小兒]가 있었고 ● (아이는) ⑬ 금색 개구리[蛙] 모양이었다. ⑭ 왕이 ⑮ 기뻐하고 ● 말하기를 "⑯ 이 아이[此]는 ● 이어 ⑰ 천天이 ⑱ 나에게 주는 ⑲ 자리이을 아이[令胤]다."라고 하였다. ● (왕이) 이어 ⑳ 거두어 그 아이[之]를 돌보았다[養]. ● 이윽고 ㉑ 그 아이[其](= 금와)가 ㉒ 자랐고, ㉓ 서서 ㉔ (왕)태자太子가 되었다. ①祭山川②求嗣③其所御馬④至鯤淵⑤見大石●⑥相⑦對流淚⑧王⑨怪之⑩使人●⑪轉其石​●⑫有小兒●⑬金色蛙形⑭王⑮喜●曰⑯此●乃⑰天⑱賚我⑲令胤乎●乃⑳收而養之●及㉑其㉒長㉓立爲太子


이렇게 얻은 아이 금와는, 나이든 왕 부루에게 자리이을 아이가 없는 것을 불안히 여기던 부여 사람들 - 옛 조선 사람들을 꾀어 우두머리로 섰던 사람에게 당황스러운 일었습니다. 자리이을 아이가 있다면 부루의 다스림은 그 아이를 통해 이어질 것이, 따로 부루를 대신할  우두머리 필요하지 않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우두머리는 그가 스려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부루는 아이를 천天이 내렸다고 하였는데, 천天은 새 우두머리가 있는 환, 부루가 있는 흘-승골-성을 비롯하여 옛날 인과 웅이 천-제와 천-왕이라는 호를 쓰며 다스리던 곳들을 함께 이 것입니다. 때문에 새로운 우두머리 천-제라는 호를 스스로 천의 우두머리라고 면서, 그러니  있는 흘-승골-성 부루가 아니라 자신의 손이 맡아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이 말이 져나가, 한漢이 부여가 나누어져 북쪽의 길을 지키기 어렵다고 여겨 진-번-군을 없애고 새로운 길을 열고자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던 것이 MC-81입니다. 이 말은 부여의 상相이던 - 부루 대신하여 사람들을 다스리던 - 아란불을 통해, 부루에게 또한 알려졌으니 앞서 동명왕편 주석이 인용한 본기의 구절들이 그 내용을 적었습니다. 부여의 다음 움직임에 대한 중요한 자료이기에, 아래에 다시 옮겨놓습니다.


X-1 동명왕편 주석 인용 본기: <① 그[其](= 부여-)상相 아란불阿蘭弗이 ● 말하기를 "② 어느 날[日者] ③ 천天이(= 천-제가) ④ 나에게 내려와 ● 말하기를 '(내가) ⑤ 장차 ⑥ 나의 아들, 손자에게 시키면 ● (나의 아들, 손자가) ⑦ 국國을 이곳[此]에 세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⑧ 너[汝]는(= 왕은) ⑨ 마땅히[其] ⑩ 이곳[之]을 떠나야 한다. ⑪ 동쪽 바다의 물가에 ⑫ 땅이 있고 ⑬ (땅의) 호를 ● (말하기를) ⑭ 가섭-원[迦葉-原]이라고 하는데, ⑮ (가섭-원의) 흙은 ⑯ 5(가지) 곡물들에 마땅하니 ● (가섭-원에) ⑰ 도읍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⑱ 아란불이 ⑲ 왕에게 권하니 ● (왕이) ⑳ 옮겨 (가섭원에) 도읍하고 ㉑ 호를 ● (말하기를) ㉒ 동-부여라고 하였다. ㉓ 옛 도읍에는 ㉔ 해모수가 ㉕ 천-제의 아들이라고 하고 ㉖ 와서 도읍하였다. <本紀云①其相阿蘭弗●曰②日者③天④降我●曰⑤將⑥使吾子孫●⑦立國於此⑧汝⑨其⑩避之⑪東海之濱⑫有地⑬號●⑭迦葉原⑮土⑯宜五穀●⑰可都也⑱阿蘭弗⑲勸王⑳移都㉑號●㉒東夫余㉓於舊都㉔解慕漱㉕爲天帝子㉖來都>




천-제라는 호를 쓰던 새로운 우두머리가 만들고 아란불을 통해 부루에게 전해진 이 말을, 부루는 무시하지 않고 받아들여 부여 새로운 곳으로 옮겨가야 하는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그러한 명분 뒤에 실제 부여가 옮겨가도록 한 상황 있었고 그리 어떠한 이득 얻을 수 있었던 것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부여가 가섭-원으로 옮겨가게 한 은 무엇보다 진-번-군이 없어졌고 그리하여 그곳을 통해 한에서 얻어내던 물건들, 북쪽으로 돌아가는 길을 지키도록 한이 주던 물건들을 을 수 없 된 상황이었습니다. 남아서 그 길을 지켜 손해가 나 상황이라면 피하는 것 자체가 이득이 될 것입니다. 게다가 새로운 곳에 가서 그 이득을 달리 얻을 수 있다면 그리로 가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에서 부여가 옮겨간 곳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먼저, 앞서의 구절은 부여가 옮겨간 곳을 가섭-원이라고 하고 또한 동쪽 바다의 물가라고 적었습니다. 여기는 어디였을까요?


같은 시기, 한漢이 진-번-군을 없애고서 옛 평양을 통해 열고자 하였던 길의 반대편 끝인 현토-군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편은 옥저 - 위魏가 옥저라고 하던 무리가 있 땅 - 에 있던 성 현토-군으로 삼았다[G-2:⑤]고 적었는데, 또한 옥저에 대해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어 큰 바다에 닿은 곳에 머물렀[G-3:-③] 또한 그 땅의 북쪽은 부여, 읍루의 땅과 남쪽은 예, 맥의 땅과 맞닿았다[G-3:-⑩] 적었습니다.


G-2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편: 한漢 무-제[武-帝]의 원봉 02년 ① 조선朝鮮을 쳤다. ② (위)만滿의 손자 우거右渠를 죽이고 ③ 그(= 우거가 다스리던) 땅을 나누어 ④ 4(개) 군들[郡]로 하였는데 ⑤ (지금의) 옥저沃沮의(= 옥저에 있던) 성城을 현토-군[玄菟-郡]으로 삼도록 하였다. ⑦ 뒤에 (현토-군이) (맥貊 아닌) ⑧ 동쪽 변방 사람들[夷], 맥貊이 침범하는 바 되었다. 漢武帝元封二年①伐朝鮮②殺滿孫右渠③分其地④爲四郡⑤以沃沮城⑥爲玄菟郡⑦後⑧爲夷貊所侵
G-3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편: ① 동-옥저[東-沃沮]는 ② 고구려高句麗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었다. ③ 큰 바닷가에 닿아 머물렀다. ④ 그(= 동-옥저가 머무르는) 땅의 생김새[形]는 ⑤ 동북쪽이 좁고 ⑥ 서남쪽이 길어 ● (둘레가) ⑦ 1,000리라고 할 수 있었다(= 1,000리가 되었다). ⑧ (그 땅의) 북쪽은 읍루挹婁, 부여夫餘와(= 읍루, 부여의 땅과) 더불어, ⑨ 남쪽은 예濊, 맥貊(= 예, 맥의 땅)과 더불어 ⑩ 맞닿았다. ①東沃沮②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③濱大海而居④其地形⑤東北狹⑥西南長●⑦可千里⑧北與挹婁夫餘⑨南與濊貊⑩接


부여가 오고가며 물건을 얻어 한에서 득을 어내던 남쪽의 예는 앞서 옥저가 있다고 적은 땅의 남쪽에 맞닿아 있었고 또한 부여와 옥저 모두 동쪽 바다의 물가에 맞닿아 있었으니, 부여는 다시금 한이 새로 열었던 길 다른 쪽 끝에 있던 북쪽의 예가 있는 곳 가까 자리잡니다. 길은 달라졌지만 결국 남쪽의 예에 오고가는 길목에 자리잡아 이득을 얻 하였던 것입니다.


부여의 이득은 앞서 이미 살펴본 구절들이 적은 바, 현토-군이 가까이 있던 동쪽 변방 사람들 그리고 맥 사람들이 침범하자[G-2:-⑧] 옥저를 떠나 구려에 가서 머물고[H-1:①] 곧 다시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겨가면서[G-1:①] 전히 얻어지게 되었습니다.  부여는 앞서 진-번-군을 통해 그리하였듯 남쪽의 예에서 얻어낸 물건들을 가지고 한에게 이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여에게 이러한 이득을 가져다 준 일 - 동쪽 변방 사람들과 맥 사람들이 현토-군을 침범하였던 상황을 더욱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 중심에 놓인 이름, 위魏가 옥저沃沮라고 부르던 곳과 그 무리 대해 더 깊이 알아야 합니다. 다음 글 그것에 대해 야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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