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4편 부여夫餘 (1) #16

예濊로 가는 새로운 옛 길 (2/5)

by 잡동산이

앞서 삼국유사 기이편이 인용한 전한서의 구절이 적은 바, 평-주-도독-부라는 것이 평양平壤과 현토-군을 잇는 길, 준에 이어 조선을 다스리게 되었던 위만이 진-번에서 진 사람들을 받아들여 곁의 작은 읍들을 따르도록 하였던 옛 길을 새로 다시 열고자 하여 두었던 곳이라는 점을 앞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길은 어째서 닫히게 되었을까요? 앞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처음 조선과의 사이에서 그 길이 닫히게 되었던 것은 우거가 조선을 다스릴 때에 진-번이 한과 오고가려 함을 우거가 막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진-번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진 사람들이 떠나 남쪽으로 가서 진-국을 이루었고, 이 일은 앞서 위만이 진-번 사람들로 하여금 가서 조선을 따르도록 하였던 곁의 작은 읍들 - 북쪽의 예에도 영향을 주어 그들은 우거가 다스리던 조선을 더이상 따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조선을 패배시키고 새로 들어온 한을 남쪽의 예가 바로 따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앞서 북쪽의 예를 통하는 길로 들어온 팽오를 통해 북쪽의 예와 더불어 한漢을 따랐만, 한은 그들을 받아들여 창해-군을 두고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창해-군을 없앴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한 또한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한과 더불어 오고가기를 꺼려하니, 북쪽의 예에 현토-군이 두어진 뒤에도 직접 오고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하던 상황에서, 부여가 멀리 돌아 북쪽의 예에 이르는 길을 다시 열어 지키며 남쪽의 예에까지 오고가며 그 물건을 구하여 한과 주고받으니, 한은 물건을 주며 부여가 그 길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런데, 뒤에 부여에 다른 우두머리가 나타나 무리가 나누어져 그 길을 계속 지키기 어려워지자 한은 다시 평양을 통해 현토-군에 이르는 옛 길을 새로 열기로 하였습니다. 그것이 앞서 살펴본 전한서의 앞 구절들[AE:②-③]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전한서의 뒷 구절들[AE:④-⑥]은 한漢과 남쪽의 예의 사이에 앞서 정리한 것에 더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다른 일이 또한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구절들은, 보다 앞 구절들이 적은 한이 평-주-도독-부를 두어 옛 길을 열도록 하였다고 적은 데 이어, 또한 낙랑-군과 임둔-군의 땅 - 어느 한쪽의 땅이 아니라 두 군들 모두의 땅에 동-부-도위-부를 두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여기서 도위都尉는 위들[尉]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都] 벼슬 자리를 말하고, 위는 군사들[兵]을 거느리고 부려 자리한 곳을 지키는 벼슬 자리를 말합니다. 그러니 한은 북쪽의 예에 이르는 옛 길을 열면서, 그 길보다 남쪽에 자리한 낙랑-군과 임둔-군의 동쪽에 군사들을 두 그 길을 통하여 오고가게 될 남쪽의 예와의 사이에 있던 땅에서 군사적인 충돌이 있으리라 여겨 대비 것입니다.


이 구절들을 조금 더 깊이 살펴봅시다.




먼저, 해당하는 구절들은 낙랑-군과 임둔-군 모두의 땅[兩郡之地]에 동-부-도위를 두었다고 적었습니다. 세간에서는 - 그 가운데 학계에서는 임둔-군은 현재의 태백-산맥 동쪽에 있으며 낙랑-군은 그 서쪽에 있었다고 여기고, 의견을 달리하는 재야에서는 요서 지역에 낙랑-군이 있고 그 동북쪽 바닷가까지의 땅에 임둔-군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둘 모두 앞서의 구절과 함께 생각해보면 바로 상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임둔-군이 - 학계에서 그리하다고 여기는 대로 - 낙랑-군과 더불어 동서로 자리하고 있었다면 그들의 땅 모두에 걸쳐 동-부에 도위를 두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또한 - 재야에서 그리하다고 여기는 대로 - 요서에 낙랑-군이 있고 그 동북쪽 바닷가까지의 땅에 임둔-군이 있다면 두 군들의 동쪽 땅들을 비스듬히 아울러 동-부로 하고 도위를 둘 수는 있겠지만 그 군사적인 상대는 바다 안에 있게 됩니다. 곧 상대할 대상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앞의 구절은 임둔-군과 낙랑-군은 동서가 아니라 남북으로 이어져 자리하였고, 그 동쪽은 바닷가에 이르는 대신 현재의 태백-산맥을 사이에 두고 그 서쪽 땅에 이르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였기에 두 군들의 동쪽 땅을 아울러 동-부를 둘 수 있었고, 거기에 도위를 두어 현재의 태백-산맥 쪽 땅에 있던 무리의 군사적인 침범을 대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남북으로 늘어선 임둔-군과 낙랑-군 가운데 어느 쪽이 북쪽에 있고 어느 쪽이 남쪽에 있었을까요? 그 답을 먼저 구해봅시다.


후한서 동이열전 예편은 진-번-군을 없앤 바로 그 해에 임둔-군 또한 없앴다[H-2:①-②]고 적었으며, 이어 낙랑-군과 현토-군에 아우르도록 하였다[H-2:③]고 적었습니다. 곧 임둔-군을 이어 없애고서는 임둔-군이 다스리던 땅은 낙랑-군에 더하였고, 현토-군에는 앞서 없앤 진-번-군이 다스리던 땅을 - 그 가운데 일부를 - 뒤이어 더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H-2 후한서 동이열전 예편: ① 소-제[昭-帝]의 시원 05년에 이르러 ② 임둔(-군)[臨屯], 진번(-군)[眞番]을 없앴다. ③ (임둔-군, 진번-군을) 낙랑(-군)[樂浪], 현토(-군)[玄菟]에 아우르도록 하였다. ①至昭帝始元五年②罷臨屯眞番③以幷樂浪玄菟


또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편은 낙랑-군에 임둔-군의 땅을 더한 시기보다 뒤, 건안이라는 연호가 쓰이던 MC+196[+25)에, 공손강이 낙랑-군의 둔유-현을 기준으로 남쪽에 자리하였던 땅을 나누어 대방-군으로 하였다[AH-1:①-④]고 적었습니다. 곧 임둔-군과 더하여진 낙랑-군은 다시 낙랑-군과 대방-군으로 나누어졌는데, 그 기준이 되었던 곳이 둔유-현[屯有-縣]입니다.


AH-1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편: ① 건안 중에 ② 공손강公孫康이 ③ 둔유-현[屯有-縣]과 그 남쪽 거친 땅을 나누어 ④ 대방-군[帶方-郡]으로 하였다. ①建安中②公孫康③分屯有縣以南荒地④爲帶方郡


둔유라는 이름에는 앞서 임둔臨屯이라는 이름에 쓰인 둔屯이라는 글자가 다시 쓰였는데, 임둔은 둔을 마주하였다는 뜻이며 둔유는 그러한 둔이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둔이 있는 땅과 그 남쪽, 둔을 마주하던 임둔-군의 땅을 대방-군으로 삼고 그 북쪽 땅을 낙랑-군으로 되돌린 것이니, 옛 낙랑-군은 임둔-군의 북쪽, 임둔-군은 그러한 옛 낙랑-군의 둔유-현 남쪽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돌아가서 보면 한은 북쪽의 예에 이르는 옛 길을 열면서, 그 길의 끝에 있는 북쪽의 예를 통해 오고가게 될 남쪽의 예 서쪽의 무리가 보다 서쪽에 자리하는 낙랑-군과 임둔-군을 침범할걱정하여 군사들을 두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곧 임둔-군을 또한 없애고 다스리던 땅을 낙랑-군 더하였으니, 그리하여 임둔-군과 낙랑-군의 땅에 걸쳐 두었던 동-부는 곧 낙랑-군의 동-부가 되었습니다.


또다른 댓가를 들여가며 한이 이러한 군사적인 대비를 굳이 갖추었던 것서, 그러한 대비가 필요한 상황 - 앞서 낙랑-군, 임둔-군과 남쪽의 예 사이의 땅에서 군사적인 충돌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처음 도위를 둔 곳이 2개 군들 모두에 걸친 땅에 두었던 동-부라는 점으로부터는 그러한 충돌의 규모가 1개 군 만으로는 뒷받침하기 어려운 것이었음을 또한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일이 있었기에 한은, 진-번-군에서 현재의 압록-강 북쪽 땅을 통해 동쪽으로 가서는 돌아 남쪽으로 가는 길보다 낙랑-군, 임둔-군에서 동쪽으로 현재의 태백-산맥을 지나 예로 가는 길이 오고가기 쉬움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쓰는 대신 부여에게 굳이 물건들을 주어가며 북쪽의 길을 지키도록 하여 그 길을 썼고 또한 새로 길을 열면서도 낙랑-군, 임둔-군에서 예에 이르는 길 대신 평양을 통하는 옛 길을 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은 앞서 도위를 둔 것이 보여주듯 그리 하고서도 여전히 남쪽 예로 직접 오고가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부여에게는 다시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나타난 부여의 움직임에 대해 다음 글에서 이어 살펴보겠습니다. 남쪽의 예와 낙랑-군, 임둔-군의 사이에 있던 무리에 대해서도 알아보기로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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