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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동산이 Nov 27. 2024

2장 4편 부여夫餘 (1) #16

예濊로 가는 새로운 옛 길 (2/5)

앞서 삼국유사 기이편이 인용한 전한서의 구절이 적은 바, 평-주-도독-부라는 것이 평양平壤과 현토-군을 잇는 길, 준에 이어 조선을 다스리게 되었던 위만이 진-번에서 진 사람들을 받아들여 곁의 작은 읍들을 따르도록 하였던 옛 길을 새로 다시 열고자 하여 두었던 곳이라는 점을 앞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길은 어째서 닫히게 되었을까요? 앞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처음 조선과의 사이에서 그 길이 닫히게 되었던 것은 우거가 조선을 다스릴 때에 진-번이 한과 오고가려  우거가 막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진-번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진 사람들이 떠나 남쪽으로 가서 진-국을 이루었고, 이 일은 앞서 위만이 진-번 사람들로 하여금 가서 조선을 따르도록 하였던 곁의 작은 읍들 - 북쪽의 예에도 영향을 주어 그들은 우거가 다스리던 조선을 더이상 따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렇다고 조선패배시키고 새로 들어온 한 남쪽의  바로 따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앞서 북쪽의 예 통하는 길로 들어온 팽오를 통해 북쪽의 예와 더불어 한漢을 따만, 한은 그들을 받아들여 창해-군을 두고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창해-군을 앴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또한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한과 더불어 오고가기를 꺼려하니, 북쪽의 예에 현토-군이 두어진 뒤에도 직접 오고가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상황에서, 부여가 멀리 돌아 북쪽의 예에 이르는 길을 다시 열어 지키며 남쪽의 예에까지 오고가며 그 물건을 구하여 한과 주고받으니, 한은 물건을 주 부여가 그 길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런데, 뒤에 부여에 다른 우두머리가 나타나 무리가 나누어져 그 길을 계속 지키기 어려워지자 한은 다시 평양을 통해 현토-군에 이르는 옛 길을 새로 열기로 하였습니다. 그것 앞서 살펴본 전한서의 앞 구절들[AE:②-③] 내용입니다.




그런데, 전한서의 뒷 구절들[AE:④-⑥]은 한漢과 남쪽의 예의 사이에 앞서 정리한 것에 더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다른 일이 또한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구절들, 보다 앞 구절들이 적은   평-주-도독-부를 두어 옛 길을 열도록 하였다고 적은 데 이, 또한 낙랑-군과 임둔-군의 땅 - 어느 한쪽의 땅이 아니라 두 군들 모두의 땅에 동-부-도위-부를 두었다적고 있습니다.


여기서 도위都尉는 위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都] 벼슬 자리를 말하고, 위는 군사들[兵]을 거느리고 부려 자리한 곳을 지키는 벼슬 자리를 말합니다. 그러니 한은 북쪽의 예에 이르는 옛 길을 열면서, 그 길보다 남쪽에 자리한 낙랑-군과 임둔-군의 동쪽에 군사들을 두 그 길을 통하여 오고가게 될 남쪽의 예와의 사이에 있던 땅에서 군사적 충돌이 있으리라 여 대비 것입니다.


이 구절들을 조금 더 깊이 살펴봅시다.




먼저, 해당하는 구절들은 낙랑-군과 임둔-군 모두의 땅[兩郡之地]에 동-부-도위를 두었다고 적었습니다. 세간에서는 - 그 가운데 학계에서는 임둔-군은 현재의 태백-산맥 동쪽에 있으며 낙랑-군은 그 서쪽에 있었다고 여기고, 의견을 달리하는 재야에서는 요서 지역에 낙랑-군이 있고 그 동북쪽 바닷가까지의 땅에 임둔-군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둘 모두 앞서의 구절과 함께 생각해보면 바로 상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임둔-군이 - 학계에서 그리하다고 여기는 대로 - 낙랑-군과 더불어 동서로 자리하고 있었다면 그들의 땅 모두에 걸쳐 동-부에 도위를 두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또한 - 재야에서 그리하다고 여기는 대로 - 요서에 낙랑-군이 있고 그 동북쪽 바닷가까지의 땅에 임둔-군이 있다면 두 군들의 동쪽 땅들을 비스듬히 아울러 동-부로 하도위를 둘 수는 있겠지만 그 군사적인 상대는 바다 안에 있게 됩니다. 곧 상대할 대상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앞의 구절은 임둔-군과 낙랑-군은 동서가 아니라 남북으로 이어져 자리하였, 그 동쪽은 바닷가에 이르는 대신 현재의 태백-산맥을 사이에 두고 그 서쪽 땅에 이르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였기에 두 군들의 동쪽 땅을 아울러 동-부를 둘 수 있었고, 거기에 도위를 두어 현재의 태백-산맥  땅에 있던 무리의 군사적인 침범을 대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남북으로 늘어선 임둔-군과 낙랑-군 가운데 어느 쪽이 북쪽에 있고 어느 쪽이 남쪽에 있었을까요? 그 답을 먼저 구해봅시다.


후한서 동이열전 예편은 진-번-군을 없앤 바로 그 해에 임둔-군 또한 없앴다[H-2:①-②]고 적었으며, 이어 낙랑-군과 현토-군에 아우르도록 하였다[H-2:]고 적었습니다. 임둔-군을 이어 없애고서는 임둔-군이 다스리던 땅 낙랑-군에 더하였, 현토-군에는 앞서 없앤 진-번-군이 다스리던 땅을 - 그 가운데 일부를 - 뒤이어 더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H-2 후한서 동이열전 예편: ① 소-제[昭-帝]의 시원 05년에 이르러 ② 임둔(-군)[臨屯], 진번(-군)[眞番]을 없앴다. ③ (임둔-군, 진번-군을) 낙랑(-군)[樂浪], 현토(-군)[玄菟]에 아우르도록 하였다. ①至昭帝始元五年②罷臨屯眞番③以幷樂浪玄菟


또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편은 낙랑-군에 임둔-군의 땅을 더한 시기보다 뒤, 건안이라는 연호 쓰이던 MC+196[+25)에, 공손강이 낙랑-군 둔유-현을 기준으로 남쪽에 자리하였던 땅들을 나누어 대방-군으로 하였다[AH:-④]고 적었습니다. 곧 임둔-군과 더하여진 낙랑-군 다시 낙랑-군과 대방-군으로 나누어졌는데, 그 기준이 되었던 곳이 둔유-현[屯有-縣]니다.


AH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편: ① 건안 중에 ② 공손강公孫康이 ③ 둔유-현[屯有-縣]과 그 남쪽 거친 땅을 나누어 ④ 대방-군[帶方-郡]으로 하였다. ①建安中②公孫康③分屯有縣以南荒地④爲帶方郡


둔유라는 이름에는 앞서 임둔臨屯이라는 이름에 쓰인 둔屯이라는 글자가 다시 쓰였는데, 임둔은 둔을 마주하였다는 이며 둔유는 그러한 둔이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둔이 있는 땅과 그 남쪽, 둔을 마주하 임둔-군의 땅을 대방-군으로 삼고 그 북쪽 땅을 낙랑-군으로 되돌린 것이니, 옛 낙랑-군은 임둔-군의 북쪽, 임둔-군은 그러한 옛 낙랑-군의 둔유-현 남쪽에 자리하고 있었니다.




그리하여 돌아가서 보면 한은 북쪽의 예에 이르는 옛 길을 열면서, 그 길의 끝에 있는 북쪽의 예를 통 오고가게 될 남쪽의 예 서쪽의 무리가 보다 서쪽에 자리하는 낙랑-군과 임둔-군을 침범할걱정하여 군사들을 두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서 임둔-군을 또한 없애고 다스리던 땅을 낙랑-군 더하으니, 그리하여 임둔-군과 낙랑-군의 땅에 걸쳐 두었던 동-부는 곧 낙랑-군의 동-부가 되었습니다.


또다른 댓가를 들여가며 한이 이러한 군사적인 대비를 굳이 갖추었던 것, 그러한 대비가 필요한 상황 - 낙랑-군, 임둔-군과 남쪽의 예 사이의 땅에서 군사적인 충돌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처음 도위를 둔 곳이 2개 군들 모두에 걸친 땅에 두었던 동-부라는 점으로부터는 그러한 충돌의 규모가 1개 군 만으로 뒷받침하기 어려운 것이었음을 또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일이 있었기에 한은, 진-번-군에서 현재의 압록-강 북쪽 땅을 통해 동쪽으로 가서는 돌아 남쪽으로 가는 길보다 낙랑-군, 임둔-군에서 동쪽으로 현재의 태백-산맥을 지나 예로 가는 길이 오고가기 쉬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쓰는 대신 부여에게 굳이 물건들을 주어가며 북쪽의 길을 지키도록 하여 그 길을 썼고 또한 새 길을 열면서도 낙랑-군, 임둔-군에서 예에 이르는 길 대신 평양을 통하는 길을 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은 앞서 도위를 둔 것이 보여주듯 그리 하고서도 여전히 남쪽 예 직접 오고가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 그리하여 부여에게는 다시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나타난 부여의 움직임에 대해 다음 글에서 이어 살펴보겠습니다. 남쪽의 예와 낙랑-군, 임둔-군의 사이에 있던 무리에 대해서도 알아보기로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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