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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동산이 Nov 26. 2024

2장 4편 부여夫餘 (1) #15

예濊로 가는 새로운 옛 길 (1/5)

한漢이 앞서 팽오가 열었던, 조선을 통하지 않고 예, 맥에 이르는 길을 지키는 부여에게 물건들을 주 간접적으로 그들을 통해, 예, 맥의 물건들이 가져오는 이득을 얻었던 것은 앞서 두었다가 없앤 창해-군 때문이었습니다. 부여가 맡은 길이 사실은 그 때 열었던 길이었다는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한漢에 대해 가진 믿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앞서 조선에 등돌리고 한과 손잡았던 예는 그것을 지키기로 하고 한이 두었던 창해-군을 한이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애는 것을 보았기에,  가운데에서 특히 쪽의 예는 한에 대해 큰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예는 차라리 새로 나타나 길을 맡은 부여 사람들 손잡고, 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한에 물건들을 주고받아 이득을 얻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러함을 알기에 한 또한 처음 길을 지키는 데에 들어가는 부담이 여전함에도 그 댓가를 주고 부여를 통해 예, 맥의 물건들을 주고받았습니다. 다음 글에서 자세히 살피겠지만 한은 조선-한 전쟁을 이긴 뒤에 조선을 통하는 길을 열고자 시도하였지만, 그것은 앞서의 믿음 때문에 쉽지 않은 문제였고 때문에 부여를 통하는 길이 보다 부담이 덜하다고 여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길을 지키기 위해 부여에게 주는 것들의 부담이 점차 심해지는 반면에, 부여 사람들이 서로 다른 우두머리를 따르며 갈라지니 그 길을 통하여 물건들이 잘 오고가리라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한은 그 길 대신 또다른 길 - 진-번-군이 아니라 낙랑-군을 통해 예에 이르는 길을 "다" 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일 구체적으로 적고 있는 자료들이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니다. 그러한 자료들을 이제 하나씩 살펴볼 것인데, 그 가운데 제일 앞선 시기에 해당하는 일을 적은 것은 한서의 구절들입니다.




한서 소제기 시원 05년 06월 기사는 담애-군과 진-번-군[眞-番-郡]을 없앴다[罷][C-6:①] 그 시작을 간단히 적었습니다. 시기는 MC-81/06이니, 부루가 나이들어서도 - 나이가 60을 넘어 - 자리를 이을 사람이 없기에 걱정하던 부여 사람들을 꾀어 새로운 우두머리가  사람, 그 주활동시기 시작 MC-88 즈음에서 몇 해 지나지 않 시기입니다. 한漢은 여를 통해 길을 오고가일을 맡 진-번-군을 없애 다른 길을 열고자 하였습니.


C-6 한서 소제기: (시원 05년 여름 06월) ① 담이(-군)[儋耳], 진-번-군[眞-番-郡]을 없앴다. (始元五年夏六月)①罷儋耳眞番郡


한이 진-번-군을 없애고, 부여를 통하지 않는 길, 앞서 조선에서 예에 이르던 옛 길을 새 열고자 하였던 일들에 대해서 삼국유사 기이편이 전한서를 인용하여 적었습니다. 이 구절들은 앞서 살펴본 한서에 보이지 않는 것이니, 전한서와 한서는 같은 시기의 일을 적은 다른 자료입니다.


삼국사기 기이편이 인용한 전한서는 먼저 소-제의 시원 05년 - 진-번-군을 없 그 시기 - 한漢이 군들 바깥의 2개 부들을 두었다[AE:①]고 적었습니다. 이어 조선朝鮮의 옛 땅이었던 평나平那와 현토-군[玄菟-郡]에 대해 두었던 것을 평-주-도독[平-州-都督]의 부府라고 하였[AE:-③]고 적었고, 임둔-군[臨屯-郡], 낙랑-군[樂浪-郡] 동-부-도위[東-部-都尉]의 부두었다[AE:-⑤]고 적었습니다.


AE 삼국유사 기이편 인용 전한서: 소-제[昭-帝]의 시원 05년 기해(-년)[己亥] ① 2(개) (군들) 바깥[外]의 부들[府]을 두었다. ● 이르기를 ② 조선朝鮮의 옛 땅이었던 평나平那 그리고 현토-군[玄菟-郡] 등을(= 등에 대해 두었던 부를) ③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라고 하였으며, ④ 임둔(-군)[臨屯], 낙랑(-군)[樂浪] 등 2(개) 군들[郡]의 땅에는 ⑤ 동-부-도위-부[東-部-都尉-府]를 두었다.(前漢書)昭帝始元五年己亥①置二外府●謂朝鮮舊地平那及玄菟郡等③爲平州都督府④臨屯樂浪等兩郡之地⑤置東部都尉府


평나平那라는 땅 이름에 대해 삼국유사 기이편의 주석은, 앞서 조선朝鮮傳을 말하고서 (군들의 이름들이) 진-번, 현토, 임둔, 낙랑 등 넷이라고 하였[AF:-③]고 적었습니다. 그리고서 지금 - 본문 구절에 - 평나가 있고 진-번이 없으니 아마도 이 같은 땅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AF:-⑦]고 적었습니다. 곧 삼국유사의 저자는 진-번이라는 이름의 땅 평나라이름의  서로 같 곳이라고 여겼습니다.


AF 삼국유사 기이편 주석: <① 내[私]가 ● (앞서) ② 조선전朝鮮傳을 말하고서 ● 곧 (그 땅에 둔 군들의 이름들을) ③ 진-번[眞-番], 현토玄菟, 임둔臨屯, 낙랑樂浪 등 넷이라고 하였는데 ④ 지금 ● (본문의 이름들에는) ⑤ 평나平那가 있고 ⑥ 진-번[眞-番]은 없으니 ● 아마도 (평나, 진-번은) ⑦ 1(개) 땅의 2(개) 이름들(= 같은 땅의 다른 이름들)이리라.> <①私●②曰朝鮮傳●則③眞番玄菟臨屯樂浪等四④今●⑤有平那⑥無眞番●盖⑦一地二名也>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80년 07월 기사는 보다 앞서 비류沸流라는 물줄기[水/川] 이름을 가지고 이르기도 하는, 물줄기 가의 땅[州]에 있던 비류-국[沸流-國]을 달리 비류-나[沸流-那][Q-9:④]라고 적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보면, 평나平那  평-나[平-那]는 달리 평-주[平-州]라고 적던 땅의 국國을 이르는 것데, 또한 그곳은 물줄기 이름 가지고 평-천[平-川]이라고 르던 니다.


Q-9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80년 가을 07월) ① 이 때에 ② 관-나[貫-那] 우태于台 미유彌儒, ③ 환-나[桓-那] 우태于台 어지류菸支留, ④ 비류-나[沸流-那] 조의皂衣 양신陽神 등이 ● 몰래 ⑤ 수성遂成에게 일렀다. (太祖大王八十年秋七月)①於是②貫那于台彌儒③桓那于台菸支留④沸流那皂衣陽神等●陰⑤謂遂成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주석은 어떤 기록을 인용하여 고국-천-왕을 고국-양-왕이라고 하였다[AG:①] 적었습니다. 앞물줄기 가의 땅을 이르는 주州라는 글자를 물줄기를 이르는 천川이라는 글자로 달리 적었듯이 그러한 땅을 이르는 양이라는 글자를 또한 천川으로 달리 적 것입다.


AG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주석 인용 어떤 기록: <① (고)국-양(-왕)[國-襄]이라고 하였다.> (故國川王)<或云①國襄>


이것을 통해 보면, 평-천[平-川] 곧 달리 평-주[平-州]라고 적던 곳은 평-양[平-壤], 앞서 첫 단-군 왕검의 옛 도읍이며 그의 이름을 가지고 왕검/험-성이라고 하던 곳입니다. 곧 평나는 진-번이 아니라 위만 때부터 조선-왕들이 도읍하였던 왕검/험-성이 있던 땅 무리가 이루었던 국國 곧 나那를 달리 적은 것이며 평-주는 그곳을 한漢 국이 없는 땅 이름으로 달리 적은 것입니다.


앞서 전한서의 구절 옛 평양 - 현재의 평양과는 다른 - 땅과 현토-군이 맡은 땅 모두에서 우두머리 노릇을 하며 살피는[都督] 사람을 여기에 두었던 일을 말합니다. 그 부府라고 하는 것은 또한 그 사람이 살피던 곳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도독都督이라는 단어는 보다 뒤에서야 벼슬 이름으로 쓰였습니다. 때문에, 앞서 구절의 도독이라는 단어를 세간에서는 이 때에 쓰이던 다른 벼슬 이름이었던 것을 뒤에 고쳐 달리 적은 것이라고 여기도 합니다.


그러나, 후한 때에 지어진 잠부론이 이미 우두머리 노릇을 하며 살피는 사람[WF:⑯]이라는 뜻으로 도독이라는 단어 적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앞서 구절의 도독은 굳이 벼슬이름이라고 여겨 그것이 무엇인가 고민하는 대신, 당시 쓰이던 표현이라고 여기고 직접 그 뜻을 살펴 이해하면 됩니다.


AF 잠부론: ① 강羌이 등돌리기 시작하였을 때, ② 헤아림, 꾀함을 ③ 아직 잘하지 않았고 ④ 무리를 ⑤ 아직 이루지 않았으며, ⑥ 사람들을 ⑦ 아직 더하지 않았고 ⑧ 무기를 ⑨ 아직 갖추지 않았다. ⑩ 어떤 사람들은 ⑪ 대나무 가지를 지니고 ⑫ 어떤 사람들은 ⑬ 빈 손으로 따랐다. ⑭ 풀을 먹고 ⑮ 흩어져 어지러웠지만 ⑯ 아직 우두머리 노릇을 하며 살피는 사람이 없으니 ● 아주 쉽게 ⑰ 깨트려졌다. ①羌始反時②計謀③未善④黨與⑤未成⑥人衆⑦未合⑧兵器⑨未備⑩或⑪持竹木枝⑫或⑬空手相附⑭草食⑮散亂⑯未有都督●甚易⑰破也


 앞서 전한서의 구절[AE:②-③]은, 옛 평양 땅 - 현재의 평-양이 아니라 그 북쪽 땅이며 태백-산에 해당하는 현재의 웅어수-산 남쪽 땅 - 에서부터 현토-군이 두어졌던 현재의 함흥 땅까지를 잇는 길목을 살 사람을 평양 땅에 두었던 일을 적은 것입니다. 또이어지는 구절[AE:④-⑥]은 낙랑-군과 임둔-군의 동쪽 땅, 동-부 군사들을 거느리고 지키는 위들[]의 우두머리[都]두었던 일을 적은 것입니다.





그런데, 전한서의 구절들 가운데 뒤의 것은 낙랑-군과 임둔-군에 대해 중요한 정보또한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낙랑-군과 임둔-군이 두어진 곳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토-군이 두어진 땅보다 남쪽에 자리잡고 있던 예 사람들과 2개 군들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 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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