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2편 진辰 (2) #3

진-한의 여섯 무리들 (3/8)

by 잡동산이

돌아가서, 6개 촌들에 대한 자료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합시다. 저 양-산-촌입니다. 조심스럽게 확인할 수 있도록, 앞서 살피던 자료를 아래에 다시 제시합니다. 두번째 자료의 처음 구절들[B-5:①-②]은 앞서 말했듯이 첫번째 자료의 해당 구절들[C-2:①-②]과 같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자료의 다음 구절들의 지금[今]은 고려 시기를 기준으로 적은 것이라고 하였습다.


C-2 삼국사기 신라본기: ① (6개 촌들의) 첫째를 ● 말하기를 ②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이라고 하였다. ①一●曰②閼川楊山村
B-5 삼국유사 기이편: ① (6개 촌들의) 첫째를 ● 말하기를 ②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이라고 하였다. ③ (양-산-촌의) 남쪽에 ④ 지금 ⑤ 담엄-사[曇嚴-寺]가 있다. ⑥ (양-산-촌의) 우두머리[長]을 ● 말하기를 ⑦ 알평謁平이라고 하였는데, ● (알평은) ⑧ 처음 ⑨ 표암-봉[瓢嵓-峯]에 내려왔다. ● (뒤에) ⑩ 이 사람[是](= 알평)을 ⑪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이-씨가) 조상[祖]이라고 하였다. ①一●曰②閼川楊山村③南④今⑤曇嚴寺⑥長●曰⑦謁平●⑧初⑨降于瓢嵓峯●⑩是⑪爲及梁部李氏祖


이어는 구절들은 양-산-촌의 우두머리 알평이 처음 표암-봉에 내려왔다[B-5:⑧-⑨]고 적었습니다. 여기는 뒤에 신라 수도[京]가 세워지는 곳 가까운 곳으로, 6개 촌들의 우두머리들이 신라를 세우기에 앞서 MC-68/03에 해당하는 지절 01년 임자-년 03월 01일, 6개 부들의 조상들 - 촌들의 우두머리들 - 이 아들, 아우와 - 다음 세대, 같은 세대 사람들과 - 알-천 물가의 언덕에 모[B-4:①-③] 때에 그 가운데 1명인 알평이 이르렀 곳입니다.





이어지는 구절들은 알평 뒤에 급량-부 이-씨의 조상이 되었다[B-5:⑩-⑪]고 적었는데, 여기의 급량-부는 달리 양-부라고도 합니다. 그 성인 이-씨에 대해 세간에서는 신라의 금석문에 성이 늦게 나타나는 것을 근거로 들어 이 시기에 대한 기록에 나타나는 성, 그리고 유리이사금 때에 내려주었다는 성까지 모두를 한참 뒤에 쓰던 성을 앞서부터 쓴 것처럼 꾸며 - 다시 말해 거짓으로 적은 것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신라를 세운 사람들 가운데 한韓으로 조선-상을 따라 넘어왔다가 진-한이 되었던 사람들은, 보다 앞서 준-왕 때에 연, 제, 조를 떠나온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곳의 물건들을 가져와 전하지는 못하였지만 그곳의 말, 글은 전하여, 3세기의 진-한에 대해 알게 된 바를 적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편은 연, 제가 물건들을 이름하는 것만 - 진-한의 말들이 - 비슷한 것이 아니었다[1장 3편 AW:⑩]고 적을 정도의 상황이었습니다.


1장 3편 AW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편: ① 그[其](=진-한 사람들의) 말[言], 이야기[語]는 ② 마-한[馬-韓](=마-한 사람들의 말, 이야기와)과 더불어 ③ 같지 않았다. ● (진-한 사람들의 말에서) 이름하기를 ④ 국國을 방邦이라고 하고, ⑤ 궁弓을 호弧라고 하고, ⑥ 적賊을 구寇라고 하고, ⑦ 돌리는 주酒를(=술을) 돌리는 상觴이라고 하였다. ● (진-한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서로 부르기를 ⑧ 모두[皆 = 總]를 도徒라고 하였는데 ● (그리함에는) ⑨ 진秦 사람들과(=진 사람들의 이야기와) 비슷함이 있었으니, ● (비슷함이 있는 것은) ⑩ 연, 제가 물건들을 이름하는 것(=말) 만이 아니었다. ①其言語②不與馬韓③同●名④國爲邦⑤弓爲弧⑥賊爲寇⑦行酒爲行觴●相呼⑧皆爲徒●⑨有似秦人●⑩非但燕齊之名物也


그런 것들 가운데에는 따로 전하지 않는다면 딱히 전해질 까닭이 없는 방邦[1장 3편 AW:④]과 같은 정치체제에 대한 것들차 있습니다. 그러니, 이미 연, 제에서 머무를 때에 이미 오래 써오던 성姓을 진-한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쓰지 않기로 였고, 그리고 다시 한참 뒤에는 또다시 쓰기 시작했다는 주장은 리 타당해 보이지 않습니다.


세간의 주장은 어떤 시기의 금석문에서는 사람들의 성이 확인되는데 보다 앞선 시기의 금석문에서는 사람들의 성이 확인되지 않으니 성의 사용은 그 사이에 시작되었다고 여겨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둘만으로는 주장을 타당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앞선 시기의 금석문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그 시기에 성을 쓰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려면, 성이 당시에 쓰였다면 금석문에 반드시 적혀있어야 한다는 점이 먼저 논증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논리 구조와 더불어, 금석문에 성을 쓰는 일은 성이 쓰이기 시작했다는 이유 아닌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도 시작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앞서의 점을 논증하지 않고서 그 뒤에 금석문에 앞서 보이지 않던 성이 쓰인다는 것 만으 보다 앞서 성을 쓰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적절한 주장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해당하는 금석문의 시기에 들어가서 매우 깊게 살펴볼 것이기에 여기서는 일단 더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돌아가서, 일단 이-씨가 조상이라고 여겼다는 양-산-촌의 우두머리 알평을 기억해두고, 다음 자료를 살펴보지요. 이어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유리이사금 09년 봄에 양-산-부를 양-부라고 하였다[C-3:①-②]고 적었는데, 이름을 고친 것이 양-산-촌이 아니라 양-산-부라는 점에 주목하기 바랍니다. 이것은 앞서 살핀 바, 유리이사금 02년에 일어났지만 그러나 유리이사금 09년의 일과 같은 것으로 여겨져 누락된 일, 바로 촌을 고쳐라고 하였던 일의 남은 자취입니다.


C-3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09년 봄) ① 양-산-부[楊-山-部]를 ② 양-부[梁-部]라고 하였으며, ③ (우두머리의) 성姓을 ④ 이李라고 하였다(= 이-씨를 양-부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儒理尼師今九年春)①楊山部②爲梁部③姓④李


이 때에 고친 이름인 양-부가 바로 급량-부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뒤에 우두머리의 성을 이李라고 하였다[C-3:③-④]고 적은 것은, 앞서 알평을 조상으로 여기던 이-씨 성의 사람들이 여전히 그 우두머리를 맡아 다스리도록 한 일을 적은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촌/부에 대해서도 같은 성의 사람들이 우두머리를 계속 이어갔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점은 바로 다음의 촌/부에 대한 기록에서 나타납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양-산-촌에 대한 앞서의 구절들[C-2]에 이어 6개 촌들 가운데 둘째를 돌-산 고-허-촌이라고 하였다[C-4:①-②]고 적었습니다. 삼국유사 기이편도 양-산-촌에 대한 구절들[B-5]에 이어 같은 용[B-17:①-②]을 적고서, 고-허-촌의 우두머리 소벌도리가 처음 형-산에 내려왔다[B-17:③-⑥]고 하였습니다.


C-4 삼국사기 신라본기: ① (6개 촌들의) 둘째를 ● 말하기를 ②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이라고 하였다. ①二●曰②突山高墟村
B-17 삼국유사 기이편: ① (6개 촌들의) 둘째를 ● 말하기를 ②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이라고 하였다. ③ (고-허-촌의) 우두머리를 ● 말하기를 ④ 소벌도리蘇伐都利라고 하였는데, ● (소벌도리는) ⑤ 처음 ⑥ 형-산[兄-山]에 내려왔다. ● (뒤에) ⑦ 이 사람을(= 소벌도리를) ⑧ 사량-부[沙梁-部] 정-씨[鄭-氏]의(= 정-씨가) 조상이라고 하였다. ⑨ 지금 (형-산 아래를) ● 말하기를 ⑩ 남-산-부[南-山-部]라고 하며, ⑪ 구량-벌[仇良-伐], 마등-오麻等烏, 도북道北, 회덕迴徳 등 남쪽 촌들이 ⑫ (남-산-부를) 따른다. ①二●曰②突山高墟村③長●曰④蘇伐都利●⑤初⑥降于兄山●⑦是⑧爲沙梁部鄭氏祖⑨今●曰⑩南山部⑪仇良伐麻等烏道北迴徳等南村⑫屬焉


여기의 형-산은 앞서의 표암-봉과 마찬가지로 뒤의 신라 수도 가까운 곳입니다. 앞서 알평이 MC-68/03, 다른 우두머리들과 모이기 위해 양-산-촌을 떠나 먼저 표암-봉에 이르렀듯이 소벌도리 또한 고-허-촌을 떠나 먼저 형-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구절들 묘한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곧 소벌도리가 뒤에 사량-부 정-씨의 조상이 되었다[B-17:⑦-⑧] - 사량-부의 정-씨 성의 사람들이 소벌도리를 조상으로 여겼다고 적은 것입니다. 이어지는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앞서 유리이사금 02년 양-산-촌을 고친 양-산-부처럼 고-허-촌을 고친 고-허-부를, 다시 사량-부라고 하였고[C-5:①-②]고 우두머리의 성을 최-씨라고 하였다[C-5:③-④]고 적었는데, 서의 구절과 달리 정-씨라는 성의 사람들이 아니라 최-씨라는 성의 사람들이 우두머리가 되어 사량-부를 맡아 다스리게 된 일을 적은 것입니다.


C-5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09년 봄) ① 고-허-부[高-墟-部]를 ② 사량-부[沙梁-部]라고 하였으며, ③ (우두머리의) 성을 ④ 최崔라고 하였다(= 최-씨를 사량-부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儒理尼師今九年春)①高墟部②爲沙梁部③姓④崔


자, 렇다면 언제부터 정-씨 성을 쓰는 사람들이 사량-부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언제부터 최-씨 성을 쓰는 사람들로 바뀌었던 것일까요? 또한 소벌도리는 정-씨 성을 쓰는 사람들의 조상일까요, 아니면 최-씨 성을 쓰는 사람들의 조상일까요?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은 어떤 이유로 나타나게 된 것일까요?




다음 글에서는 뒤에 이어지는 구절들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 이어 다음 촌들에 대하여 살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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