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2편 진辰 (2) #2

진-한의 여섯 무리들 (2/8)

by 잡동산이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먼저, 6개 촌들의 첫째를 알-천 양-산-촌이라고 하였다[C-2:①-②]고 적었습니다. 삼국유사 기이편 또한 6개 촌들의 첫째를 양-산-촌이라고 하였다[B-5:①-②]고 적었는데, 이어지는 구절 사이사이에 삼국유사가 작성되던 고려 때의 이야기 그리고 6개 촌들의 뒷 이야기를 함께 적었습니다.


C-2 삼국사기 신라본기: ① (6개 촌들의) 첫째를 ● 말하기를 ②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이라고 하였다. ①一●曰②閼川楊山村
B-5 삼국유사 기이편: ① (6개 촌들의) 첫째를 ● 말하기를 ②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이라고 하였다. ③ (양-산-촌의) 남쪽에 ④ 지금 ⑤ 담엄-사[曇嚴-寺]가 있다. ⑥ (양-산-촌의) 우두머리[長]을 ● 말하기를 ⑦ 알평謁平이라고 하였는데, ● (알평은) ⑧ 처음 ⑨ 표암-봉[瓢嵓-峯]에 내려왔다. ● (뒤에) ⑨ 이 사람[是](= 알평)을 ⑩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이-씨가) 조상[祖]이라고 하였다. ①一●曰②閼川楊山村③南④今⑤曇嚴寺⑥長●曰⑦謁平●⑧初⑧降于瓢嵓峯●⑨是⑩爲及梁部李氏祖


먼저 삼국유사 기이편은 남쪽에 지금 담엄-사가 있다[B-5:③-⑤]고 적었는데, 기서 지금[今]은 이어지는 주석이 천복 05년을 본조本朝[D-1:①]라고 적은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 시기입니다. 당시 알려진 위치를 기준으로 삼국유사 저자가 알던 양-산-촌의 옛 위치를 설명한 것으로, 그 위치는 이어 주석이 적은 바 고려가 중흥-부라고 이름하여 동쪽 촌들이 따랐다[D-1:②-⑤]고 적은, 현재의 경-주입니다.


D-1 삼국유사 기이편 주석: <① 본조本朝(= 고려) 천복 05년 경자(-년) ② 고쳐 이름하여 ● (말하기를) ③ 중흥-부[中興-部]라고 하며, ④ 파잠, 동-산, 피상 등 동쪽 촌들이 ⑤ (중흥-부를) 따른다.> (梁部李氏祖)<①本朝太祖天福五年庚子②改名●③中興部④波潛東山彼上東村⑤屬>


삼국유사 기이편은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5개 촌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내용을 적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간에서 바라보는 대로, 6개 촌들은 모두 경-주에 있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고려는 경주의 한 곳을 옛 양-산-부라고 여기게 되었던 것일까요? 앞 질문의 답은 이미 한 바 있으니 뒷 질문에 대해서만 일단 답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6개 부들에 대한 설명은 그 답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삼국유사 기이편은 신라의 전성기에 그 수도[京] 가운데에 있던 35개 큰 집들[宅]에 대한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안에 앞서 천복 05년의 구절을 이해할 단서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 신라가 온전하게 일어났을 때 그 수도인 동-경[東-京] 곧 지금의 경주에는 55리에 걸쳐 35개의 큰 집들이 있었다[B-6:④]고 적었습니다.


B-6 삼국유사 기이편: ① 신라가 온전히 하여 일어났을 때 ② 수도[京]는, ③ (신라에 있는) 178,936(개) 호들[戶]의 1,360(개) 마을들[坊] 가운데에 있는 ● ④ 55리里의 35(개) 금金이 들어간 집들[金入宅]이었다. ①新羅全盛之時②京③中十七萬八千九百三十六户一千三百六十坊●④五十五里三十五金入宅


그 사이에 있는 신라의 전체 178,935호들이 있는 1,360개 마을들이라는 구절을 두고 수도의 호들, 마을들인가 아니면 신라 전체의 호들 마을들인가 의견이 갈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구절들 앞의 가운데[中]를 보면 그 수도가 그 가운데 있었다고 하고서 이어 수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문제는 호별 구 곧 사람 수인데, 뒤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이 주제는 일단 지나가지요.


그리고서 삼국유사 기이편은 그 35개 집들에 대해 차례로 적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아래 자료들은 집[宅]을 끝에 더한 이름들을 순서대로 3개[B-7], 4개[B-8], 9개[B-9], 1개[B-10], 2개[B-11], 7개[B-12], 2개[B-13], 6개[B-14], 1개[B-15], 4개[B-16], 모두 39개 적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35보다 4가 더 큰 수입니다.


B-7 삼국유사 기이편: (그런 큰 집들 가운데에는) ① 남-택[南-宅](= 남쪽 집), ② 북-택[北-宅](= 북쪽 집), ③ 우비소-택[亏比所-宅](= 우비소의 집)이 있었다. ①南宅②北宅③亐比所宅
B-8 삼국유사 기이편: (그런 큰 집들 가운데에는) ① 본피-택[本披-宅](= 본피-부의 집들)과 ② 양-택[梁-宅](= 양-부의 집들)인 ③ 지-상-택[池-上-宅](= 못[池] 위쪽의 집)과 ④ 재매-정-택[財買-井-宅](= 재매 우물의 집)이 있었다. ①本彼宅②梁宅③池上宅④財買井宅
B-9 삼국유사 기이편: (그런 큰 집들 가운데에는) ① 북-유-택[北-維-宅](= 북쪽 벼리[維]의 집), ② 남-유-택[南-維-宅](= 남쪽 벼리의 집), ③ 대-택[隊-宅], ④ 빈지-택[賓支-宅](= 빈지의 집), ⑤ 장사-택[長沙-宅](= 장사의 집), ⑥ 상-앵-택[上-櫻-宅](= 위쪽 벚나무의 집), ⑦ 하-앵-택[下-櫻-宅](= 아래쪽 벚나무의 집), ⑧ 수망-택[水望-宅](= 물을 바라보는 집), ⑨ 천-택[泉-宅](= 샘이 솟는 집)이 있었다. ①北維宅②南維宅③隊宅④賔支宅⑤長沙宅⑥上櫻宅⑦下櫻宅⑧水望宅⑨泉宅
B-10 삼국유사 기이편: (그런 큰 집들 가운데에는) ① 양-상-택[楊-上-宅](= 버드나무 위쪽의 집)이 있었다. ①楊上宅
B-11 삼국유사 기이편: (그런 큰 집들 가운데에는) ① 한기-택[漢岐-宅](= 한기-부의 집들)인 ② 비혈-택[鼻穴-宅](= 콧구멍의 집)이 있었다. ①漢歧宅②鼻穴宅
B-12 삼국유사 기이편: (그런 큰 집들 가운데에는) ① 판적-택[板積-宅](= 판을 쌓는 집), ② 별교-택[別敎-宅](= 따로 가르치는 집), ③ 아남-택[衙南-宅](= 관청[衙] 남쪽의 집), ④ 김양종-택[金楊宗-宅](= 김양종의 집), ⑤ 곡수-택[曲水-宅](= 구부러진 물이 있는 집), ⑥ 유야-택[柳也-宅](= 버드나무 집), ⑦ 사-하-택[寺-下-宅](= 절 아래쪽의 집)이 있었다. ①板積宅②别敎宅③衙南宅④金楊宗宅⑤曲水宅⑥柳也宅⑦寺下宅
B-13 삼국유사 기이편: (그런 큰 집들 가운데에는) ① 사량-택[沙梁-宅](= 사량-부의 집들)인 ② 정-상-택[井-上-宅](= 우물 위쪽의 집)이 있었다. ①沙梁宅②井上宅
B-14 삼국유사 기이편: (그런 큰 집들 가운데에는) ① 이-남-택[里-南-宅](= 마을 남쪽의 집), ② 사내곡-택[思內曲-宅](= 사내곡의 집), ③ 지-택[池-宅](= 못의 집), ④ 사-상-택[寺-上-宅](= 절 위쪽의 집), ⑤ 임-상-택[林-上-宅](= 숲 위쪽의 집), ⑥ 교-남-택[橋-南-宅](= 다리 남쪽의 집)이 있었다. ①里南宅②思内曲宅③池宅④寺上宅⑤林上宅⑥橋南宅
B-15 삼국유사 기이편: (그런 큰 집들 가운데에는) ① 항질-택[巷叱-宅](= 거리에서 소리치는 집)이 있었다. ①巷叱宅
B-16 삼국유사 기이편: (그런 큰 집들 가운데에는) ① 누-상-택[樓-上-宅](= 누각 위쪽의 집), ② 이-상-택[里-上-宅](= 마을 위쪽의 집), ③ 명-남-택[椧-南-宅](= 홈통 남쪽의 집), ④ 정-하-택[井-下-宅](= 우물 아래쪽의 집)이었다. ①樓上宅②里上宅③椧南宅④井下宅


비슷한 경우를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편을 읽을 때에도 만나게 되는데, 세간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저 옛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이나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과거 사람들은 현재 사람들과 다른 관점들, 전제들을 지녔을 뿐이지 숫자를 셀 능력조차 없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러한 '잘못'에는 사실 나름의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그것은 읽어내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살펴보면, 이 자료들 가운데 앞서 6개 촌들이 뒤에 가지게 되는 부로서의 이름들이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6개 모두가 보이는 것은 아니고 본피[B-8:①], 양[B-8:②], 한기[B-11:①], 사량[B-13:①] 4개 만이 모두 이름 + 집[宅]의 형태로 보입니다. 이것은 그 이름의 부가 있는 장소의 - 장소에 있는 집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그 이름의 부의 - 부가 가진 집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일까요?


그런데 살펴보면 집 이름들 가운데 2개 지-상-택, 항질-택에 대해서, 삼국유사 기이편 주석은 모두 본피-부[D-2:①, D-3:①]라고 적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본피-부에 있다거나 본피-부 자체가 아니라 본피-부가 가진 집이라고 해석해야 하니, 있다[在]에 해당하는 동사가 보이지 않으니 본피-부에 있다, 고 해석할 수 없고 본피-부다, 라고 해석하면 본피-부가 둘이 되기 때문입니다.


D-2 삼국유사 기이편 주석: <● (지-상-택은) ① 본피-부였다(= 본피-부의 집이었다).> (池上宅)<●①本彼部>
D-3 삼국유사 기이편 주석: <● (항질-택은) ① 본피-부였다(= 본피-부의 집이었다).> (巷叱宅)<●①本彼部>


이 점을 알아차리고 이제 지-상-택의 앞을 보면, 본피-택과 양-택이 차례로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상-택을 본피-부가 가진 집이라고 하였으니 그 뒤의 재매-정-택 또한 양-부가 가진 집으로 보고서, 보다 앞의 본피-택, 양-택이 각각 구체적인 이름이라기보다 이어지는 두 개 이름들이 본피-부가 가진 집, 양-부가 가진 집임을 지시하는 것으로 본다면, 이것들과 뒤의 한기-택, 사량-택 2개 이름들을 제외한 구체적인 집 이름들은 모두 35개가 남게 됩니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집 이름들 가운데 구체적인 집들에 해당하는 것들의 수가 어째서 35개라고 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다른 이야기를 전해주는데, 6개 부들 가운데 4개 부들 만이 수도에 집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2개 부들은 따로 집을 마련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본래부터 수도 가까이 있었지만 다른 4개 부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하여 멀리 있던 4개 촌들 - 국들이 신라를 세우며 왕의 곁을 살필 사람을 보내 머무르도록 하기 위해 수도에 마련한 이러한 장소들은, 신라가 바깥 장소들에서 힘을 잃은 고려 초에, 마찬가지로 바깥 장소들에서 힘을 잃고 신라의 수도에 와서 자리잡은 6개 부들의 우두머리들이 머물던 곳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신라의 항복을 받은 고려는 그 머물던 곳을 그들에게 봉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앞서 이른바 천복 05년의 일입니다. 그리하여 뒤에 그들이 처음부터 신라의 수도에 머물던 것처럼 알려지니, 삼국유사의 저자가 그 이해한 바를 사이사이 끼워넣은 것이 처음의 삼국유사 기이편의 구절들입니다. 그러나 앞서 수도의 큰 집들에 대한 구절들이 적었듯 6개 부들은 가운데 4개 부들이 수도에 집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수도 가까이 있지 않았습니다.


이 점을 기억하고서, 다시 처음 구절로 돌아가서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란히 다른 촌들/부들에 대한 구절들도 살펴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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