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2편 진辰 (2) #7

진-한의 여섯 무리들 (7/8)

by 잡동산이

앞서 지백호의 두번째 글자 伯이 우두머리 또는 피붙이 사이의 첫째라는 다른 뜻을 아울러 가지는 글자였듯이, 소벌도리의 두번째 글자 伐도 성城 또는 국國을 뜻하는 데에 쓰이는 글자입니다. 그리고 첫번째 글자 蘇는, 1장 3편에서 진경-대사 탑비가 金律熙라고 적은 사람을 낭공-대사 탑비가 소충자蘇忠子의 아우 율희律熙라고 적은 예를 통해 보인 바와 같이, 金을 달리 적은 것입니다.


렇기에 소-벌[蘇-伐]은 신라 수도[京]의 성城을 이르는 금-성[金-城]을 달리 적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소벌도리는 신라가 아직 서지 않았을 때에 쓰인 것이니 그 가운데의 소벌은 보다 앞서 金이라는 글자로 달리 적은 辰에, 伐이 성城과 더불어 뜻하는 국國을 더한 진-국[辰-國]을 달리 적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니다. 곧 소벌도리 진-국을 이루어내었던 진辰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이어 소벌도리의 네번째 글자인 利에 대해서는 또한 2장 4편에서, 진辰 사람들이 본래 머물던 진-번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婁의 소리인 '루'로 이어진 옛 소리를 달리 利로 적었다고 하였습니다. 곧 都利는 진 사람들이 '도루'로 이어진 옛 소리로 읽은 이름을 달리 적었던 것입니다. 익숙한 대로 '도리'로 적기는 하겠습니다만, 이것은 그 후손들의 이름에서 다른 글자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러한 점통해서 바라보면, 다른 4개 부들의 우두머리들을 가르키는 단어가 이름에 해당하는 것과 달리 앞서 지백호라는 단어가 성 + 伯 + 이름 또는 장소 이름 + 伯 + 이름에 해당하는 것이었듯, 소벌도 또한 장소 이름 + 伐 + 이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소-벌은 진-국에 해당하고 소 이름서 비롯한 소-씨[蘇-氏]는 김-씨[金-氏]에 해당하는데, 알지에게서 시작되는 김-씨와는 입니다.


소-벌에 해당하는 다른 표현 金-城을, 신라의 수도 이름을 뜻할 때에는 금 금-성이라는 소리로 읽고 있으니, 일단 그와 그 후손들의 금-씨라고 적겠습니다. 다른 김-씨와 구분하 위해서입니다.




돌아가서 보면, 소벌도의 후손은 지백호의 후손과 찬가지로 어떤 일을 하였 그리하여 유리이사금 02년 고-허-촌을 고-허-부로 고칠 때에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그 후손을 대신하여 우두머리 노릇을 하도록 하였던 입니다. 지백호 후손의 경우를 볼 때 그러 정도의 일, 지백호의 후손이 진-한의 우두머리를 따르지 않고 한漢을 따르려 했던 일 같이, 왕을 따르지 않을 뜻을 내비친 일입니다.


그러한 일이 있었을까요? 자료를 잠시 찾아보면 그러한 일을 게, 혁거세가 죽고 아들 남해가 이어 자리에 오른 MC+04의 일들을 적은 구절들의 내용 가운데에서 찾 수 있습니다.


먼저,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거서간 61년 03월 기사는 혁거세가 죽었고 그리하여 그를 사-릉에 장사지냈다[①-②]고 적습니다. 그리고 이어 그렇게 장사지낸 사-릉이 담암-사의 북쪽에 있었다[③]고 적었습니다. 이 구절들 만으로는 이 일이 어떻게 앞서 이야기한 일로 이어질 지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일을 보다 자세히 적은 삼국유사 기이편 구절들이 있습니다.


C-13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거서간) 61년 봄 03월 ① (혁거세-)거서간居西干이 죽었다[升遐]. ② (혁거세-거서간을)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다. ● (사-릉은) ③ 담암-사[曇巖-寺]의 북쪽에 있었다. (赫居世居西干)六十一年春三月①居西干升遐②葬蛇陵●③在曇巖寺北


같은 일을 삼국유사 기이편은 다 자세히, 먼저 왕이 천天에 며[B-20:①-②] 그리고서 7일이 지난 뒤에 남겨진 몸이 흩어져 땅에 떨어지니[B-20:③-⑤] 왕후가 왕이 떠났다 - 죽었다 - 고 하였다[B-20:⑥-⑧]고 적었습니다. 이것은 삼국유사 감통편이 그 어머니 사소가 얻었다고 적은, 신선의 재주[L-1:⑥]를 왕이 나이들어 익히다가 그의 숨이 멎고서 다시 7일이 지나 주검이 썩기 시작하자 아내 알영이 그 죽음을 받아들이고 주변에 알린 일을 적은 것입니다.


B-20 삼국유사 기이편: ① 왕이 ② 천天에 올랐다[升]. ③ 7일이 지난 뒤에 ④ 남은 (왕의) 몸이 ⑤ 흩어져 땅[地]에 떨어졌고(= 죽었고) ⑥ (왕)후后가 ● 또한 ⑦ 일러 ● (말하기를) "⑧ (왕이) 떠났다[亡](= 죽었다)."라고 하였다. ⑨ 국國 사람들[人]이 ● 바라기를, ⑩ 더하여 그것[之](= 왕의 흩어진 몸)을 장사지냈으면, 하였다. ● (그런 사람들 가운데) ⑪ 큰 뱀 같은 사람[大虵]이 있었는데 ● (이 사람이) ⑫ (더하여 장사지내기를) 꺼림[禁](= 꺼리는 사람들)을 쫓아내니[逐] ● (쫓겨난 사람들이) 각각 ⑬ (흩어진) 5(개) 몸을 장사지내고 ⑭ 5(개) 무덤들[陵]을 만들었다. ● 또한 ⑮ (더하여 장사지내고 만든 무덤을) 이름하여 ● (말하기를) ⑯ 사-릉[虵-陵]이라고 하였다. ⑰ 담엄-사[曇嚴-寺]의 북쪽에 있는 능陵(= 무덤)이 ⑱ 이것(= 사-릉)이었다. ①王②升于天③七日後④遺體⑤散落于地⑥后●亦⑦云●⑧亡⑨國人●欲⑩合而葬之⑪有大虵●⑫逐禁●各⑬葬五體⑭爲五陵●亦⑮名●⑯虵陵⑰曇嚴寺北陵⑱是也
L-1 삼국유사 감통편: ① 신모神母(= 신과 같은 어머니)는 ● 본래 ② 중-국(= 중-원에 있는 국을 다스리는) 황제 가문의(= 황제 가문에 있었던) 여자였으며, ③ 이름하여 ● (말하기를) ④ 사소娑蘇라고 하였다. ● (사소는) ⑤ 일찍이 ⑥ (황제 가문에서) 신선神仙의 재주[術]를 얻었고, ⑦ 돌아와서는 ⑧ (떠나) 바다 동쪽에 멈추어 ⑨ 오래 있으면서 ⑩ 되돌아가지[還] 않았다. ①神母●本②中國帝室之女③名●④娑蘇⑤早⑥得神仙之術⑦歸⑧止海東⑨久⑩而不還


그런데 삼국유사 기이편은 이어, 혁거세가 죽은 뒤에, 사람들이 더하여[合] 그를 장사지내고자 하였다[B-20:⑨-⑩]고 적었습니다. 이어 큰 뱀 같은 사람이 꺼리는 사람들[禁]을 쫓아내었다[逐][B-20:⑪-⑫]고 적었으니, 그리하기를 꺼리는 사람들 곧 모두 힘을 더하여 혁거세를 장사지내는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묘사 가운데 크다[大]는 단어는, 이 때 혁거세를 장사지내는 일에 함께 하고 있었을 혁거세의 아들 남해에 대해서 삼국사기 신라본기가 고 있는 구절[C-14:③]에서 바로 나타고 있습니다. 곧 이 때에 사람들을 쫓아낸 큰 뱀 같은 사람이란 남해를 말하며, 그가 아버지의 주검을 앞에 두고서 힘을 더하여 장사지내는 일을 두고 뜻을 달리하 꺼려하던 무리들을 쫓아냈던 것입니다.


C-14 삼국사기 신라본기: ①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은 ② 혁거세赫居世의 친아들[嫡子]이었다. ● (남해-차차웅은) ③ 몸이 크고[長大] ④ 사람됨은 깊었다[沉厚]. ● 많이 ⑤ 슬기롭게 꾀하였다[略]. ①南解次次雄②赫居世嫡子也③身長大④性沉厚⑤多智略


국유사 기이편은 - 쫓겨난 사람들 - 혁거세 주검 가운데 5개 부분들을 각각 장사지내 5개 무덤들을 만들었다[B-20:⑬-⑭]고 적었습니다. 이어 이름하여 말하기를 사-릉이라고 하였다[B-20:⑮-⑯]고 적었는데, 쫓아낸 사람을 이르는 글자가 이름에 쓰인 것을 보면 사-릉은 앞의 쫓겨난 사람들이 만든 5개 무덤들이 아니라 쫓겨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이 쫓아낸 사람 - 남해 - 와 함께 힘을 더하여 만든 무덤의 이름입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무덤들 모두 6개습니다. 그 수인 6은 촌들/부들의 수인데, 무덤들 가운데 남해와 함께 사람들이 만든 사-릉을 삼국유사 기이편은 담엄-사 남쪽에 있다[B-20:⑰-⑱]고 적었습니다. 양-산-촌에 대해 이야기하며, 금 양-산-촌의 - 뒤에 신라 수도 던 양-부의 집의 - 남쪽에 담엄-사가 있다[B-5:③-⑤]고 적은 구절들을 통해 바라보면, 양-산-촌 무리들은 모두 남해와 함께 하였지만 5개 촌들의 무리들 서로 뜻을 달리하여 각각 둘로 갈라졌던 것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바깥 무리가 금-성을 려 침범하도록 하였던 리가 있었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 01년 07월 기사는 낙랑- 사람들이 보낸 군사들이 르러 금-성을 에워쌌다[C-15-(1):①-②]고 적었는데, 여기의 낙랑-국이 그 바깥 무리입니다.


기사는 그들 도적들이라고 하고는, 도적들이 물러나 돌아갔다[C-15-(4):①-②]고 적는 것으로 이야기를 니다. 그 작과 끝을 적은 구절들 사이에 자리한 구절들[C-15-(2), C-15-(3)] 남해와 그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앞서 일어난 일들로 말미암아 이 일이 일어났음을 알려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C-15-(1)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 01년 가을 07월 ① 낙랑(-국)[樂浪] 군사들[兵]이 ② 이르러 금-성[金-城]을 에워쌌다. (南解次次雄)元年秋七月①樂浪兵②至圍金城
C-15-(2)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 01년 가을 07월) ● 여러 차례 거듭 ① 왕이 ② 가까운 사람들[左右]에게 일러 ● 말하기를 "③ 2(명) 뛰어난 사람들[聖]이 ④ 국國을 돌보지 않기에 ⑤ 내[孤]가 ⑥ 국國 사람들[人]이 ⑦ 밀어[推] (나를) 받들도록[戴] 하였지만, ⑧ (일을) 그르쳐[謬] ⑨ (왕의) 자리[位]에 머무름이 ⑩ 위험하여졌고[危] ● (내가) ⑪ 두려워하니[懼] ● (그 두려움은) ⑫ 강물을 건너는 것(= 강물을 건널 때의 두려움)과 같았다. ● (그리하여) ⑬ 지금 ⑭ 이웃(= 낙랑-)국國이 ⑮ 와서 침범하는 ⑯ 이 때 ⑰ 나[孤]의 덕이 있지[德] 않는 것이니(= 나에게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 ⑱ 그것[之]을 어떤 것과 같다고 할까?"라고 하였다. (南解次次雄元年秋七月)●數重①王②謂左右●曰③二聖④棄國⑤孤⑥以國人⑦推戴⑧謬⑨居於位⑩危●⑪懼●⑫若涉川水●⑬今⑭鄰國⑮來侵⑯是⑰孤之不德也⑱爲之若何
C-15-(3)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 01년 가을 07월) ① 가까운 사람들[左右]이 ② 마주하여 ● 말하기를 "③ 도적들[賊]은 ④ 우리[我]에게 상喪(= 슬퍼할 일)이 있음을 좋아하며 ● 헛되이 ⑤ 군사들이 ⑥ 오도록[來] 하였지만 ⑦ 천天은 ● 반드시 (군사들을) ⑧ 돕지 않을 것이니 ⑨ 두려워하기에 부족하다(=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南解次次雄元年秋七月)①左右②對●曰③賊④幸我有喪●妄⑤以兵⑥來⑦天●必⑧不祐⑨不足畏也
C-15-(4)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 01년 가을 07월) ① 도적들[賊]은 ② 잠시 머물다가 물러나 돌아갔다. (南解次次雄元年秋七月)①賊②俄而退歸


먼저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사는 낙랑-국 군사들이 침범한 것에 대해 남해가 나[孤]의 덕이 없는 것[孤之不德]다[C-15-(2):⑬-⑰]라고 말하였다고 적었습니다. 여러 차례 살핀 바와 같이 이 표현은 돕는 사람이 없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니, 이 때 금-성 곧 6개 촌들이 받드는 왕이 있는 수도가 에워싸였는데도 6개 촌들이 군사들을 보내 돕지 않고 있 상황을 그리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 앞에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사는 남해가, 보다 앞서 2명 뛰어난 사람들 - 혁거세와 알영 - 이 국을 버고[C-15-(2):③-④] - 내버려두었고 - 자신이[C-15-(2):⑤] 국 사람들이 - 자신을 - 받들도록 하였다[C-15-(2):⑥-⑦] 적었습니다. 앞서 혁거세와 알영이 모두 나이들어 국을 다스리는 일에 애쓰지 않자, 남해가 나서 사람들이 자신을 들도록 하여 국을 다스릴 것을 준비하였음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사는 이어 남해가 스스로 말하기를, 일 그르쳐서[C-15-(2):⑧] 자리에 머는 것이 위험졌다[C-15-(2):⑨-⑩]고 하였다고 적었습니다. 일을 그르쳤다는 것은 바로 앞 구절이 적은 바 자신을 받들도록 하였던 일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도록 한 것이니, 혁거세를 장사지낼 때 남해가 나서서 사람들을 쫓아낸 닭에 무리들 모두가 남해를 받들지는 않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 뒤로 앞서 살핀 바, 바깥 무리가 공격하는데 돕는 사람들이 없다고 남해가 말하였음을 적은 구절들이 이어집니다. 그러니 남해는 그 때의 일로 말미암아 자신을 받들지 않는 사람들이 생겼으며, 그들이 나서 방해하기에 지금 돕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고 여기고 있던 것입니다.


이어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사는 남해의 가까운 사람들이, 그러나 랑-국 군사들은 걱정할 바가 아다[⑨]라고 - 르는 촌들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이겨낼 수 있고 - 말하였다고 적었으니, 이것은 혁거세 때에 쌓아린 왕의 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그 말은 사실로 나타나, 낙랑-국의 군사들은 금-성을 깨트리지 못하고 아갔습니다.


그런데, 6개 무리들이 뜻을 달리하여 갈라지게 된 것은 바로 몇 달 앞서 혁거세의 주검을 가지고 각각 무덤을 만들면서 남해가 힘을 모으는 데에 실패한 곧 일을 그르친 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남해의 말 가운데 보이듯 그런 일이 있기지는 사람들이 남해를 받들었니, 그 뒤 짧은 기간에 일어난 안의 실패 갈라진 무리의 우두머리들 가운데 누군가 바깥으로 흘지 않았다면, 신라와 가깝지 않던 낙랑-국이 것을 알고 틈을 노릴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남해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으니 그 사실을 흘렸던 우두머리는 왕을 따르지 않을 뜻을 내비친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해의 뒤를 이은 유리는 유리이사금 02년에 이르러 다른 촌들의 우두머리들과 달리 그이 촌의 우두머리 노릇을 어가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리었던 지백호와 소벌도의 후손들 가운데 이 사람이 있었습니다.


2명 후손들 가운데 지백호의 후손이 우두머리 노릇을 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은 앞서 살핀 바 MC+20[+2)의 일 때문이니, 이 때의 일은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지백호의 후손과 뜻을 달리하던 지백호의 다른 후손이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소벌도리의 후손과 손을 잡고서 또는 그러한 소벌도리의 후손 혼자 지른 것입니다. 고-허-촌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소벌도리의 후손은 느 경우라도 책임이 있고, 유리이사금 02년 그 자리를 이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소벌도리의 후손이 우두머리 노릇을 더이상 하게 되지 못하게 된 에, 후손은 앞서 소벌도리가 왕을 받들었기에 얻던 비 의 바로 아래 자리가 아니라 보다 낮은 자리에 머물게 되었으며 또한 사량-부도 본피-부도 아닌 부에서 다른 부를 따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적 자료들이 있이 길어 끊고, 다음 글에서 러한 자료들을 살펴 확인하고서 다음 주제로 넘어갑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3장 2편 진辰 (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