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2편 진辰 (2) #12

사소娑蘇와 그 아들 (4/6)

by 잡동산이

삼국유사 감통편은 사소를 선도-산의 성모라고 적었는데, 옛 신라에 있어 성모를 제사지내던 이곳을 김부식에게 떠올리게 한 것은 왕보의 '진-한' 그리고 '선도-산'과 왕양의 '동신'인 '성모'라는 단어였습니다. 그 가운데 동신인 성모에 대해서는 또다른 자취가 있으니, 고려도경이 낙랑-군 조선-현이던 고려 서-경에 있다고 적은 곳 - 동신에게 제사지내는 곳[祀]이 그것입니다.


그렇기에 이것을 통해 선도-산 성모 사소의 자취는 진-한에서 낙랑-군을 오고가는 길 이어집니다. 그러한 길이 있었을까요? 앞서 살핀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편 인용한 위략은, 사소의 시기보다 뒤에 진-한의 우-거수 - 우진-촌의 우두머리 - 가 되었던 사 사람 착[2장 4편 AW:①-③]이 그 뒤 낙랑-군을 따른 일을 적었는데 이어지는 구절들 이 길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2장 4편 AW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편 주석 인용 위략: <① 왕망王莽의 지황地皇 때에 이르러 ② 염사廉斯의 착鑡이 ③ 진-한[辰-韓]의 우右의 거수渠帥(= 우두머리)가 되었다.> <①至王莽地皇時②廉斯鑡③爲辰韓右渠帥>


위략은 먼저, 착이 진-한을 떠나서는 함자-현에 이르렀다[T-1:③-④]고 적었습니다. 앞서 낙랑-군의 현들이 자리한 곳을 살피며 이야기한 바와 같이 함자-현은 낙랑-군 25개 현들 가운데 대-수가 나와 지나던 현으로, 낙랑-군의 동쪽 땅 가운데 남쪽에 자리하였던 곳입니다, 문에 착이, 낙랑-군의 남쪽에 리한 마-한의 동쪽에 있던 진-한을 나와 낙랑-군으로 가면서, 다른 현들이 아니라 함자-현에 이르 되었던 것입니다.


T-1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편 주석 인용 위략: <① 착鑡은 ● 이어 ② 호래戶來를 거느렸고 ● (호래와 착은) ③ (진-한을) 나와 ④ (낙랑-군) 함자-현[含資-縣]에 이르렀다. ⑤ (함자-)현縣(= 함자-현 현-령)이 ⑥ (낙랑-)군郡(= 낙랑-군 태수)에게 (호래에 대해) 이야기하니 ⑦ (낙랑-)군은(= 낙랑-군 태수는) ● 곧 ⑧ 착이 ⑨ 말 고치는 사람[譯]이 되도록 하였고 ● (착은) ⑩ (장)잠(-현)[芩] 가운데로부터 ⑪ 큰 배를 타고서 ⑫ 진-한[辰-韓]으로 들어갔다.> <①鑡●因②將戶來●③出④詣含資縣⑤縣⑥言郡⑦郡●卽⑧以鑡⑨爲譯●⑩從芩中⑪乘大船⑫入辰韓>


위략은 이어, 착이 함자-현에 이르러 착과 호래가 알린 그들의 일을, 함자-군의 현령이 낙랑-군 태수에게 알렸다[T-1:⑤-⑥]고 적었습니다. 이어 낙랑-군 태수가 착을 말 고치는 사람 - 서로 다른 말을 쓰는 둘 사이에서 말을 고쳐서는 전하는 사람 - 으로 삼도록 하였고[T-1:⑦-⑨] 그리고서 착은 잠岑 가운데로부터 큰 배를 타고서는 진-한에 들어갔다[T-1:⑩-⑫]고 적었습니다.


여기의 잠岑은 낙랑-군의 잠태-현, 장잠-현이라는 현들의 이름들 가운데 함께 보이니, 대臺를 세운 현과 다른 현 사이에 길게 이어진 봉우리들[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장잠-현은 앞서 살핀 바와 같이, 뒤에 낙랑-군의 남쪽, 둔유-현과 그 남쪽을 갈라 만든 대방-군에 해당하니 보다 남쪽으로 가기 위해 큰 배를 탄 곳은 여기입니다.


여기서 큰 배를 타고서 진-한에 이르기까지의 두 갈래 길들이 있습니다. 첫번째 길은 바닷가를 따라 내려가 마-한의 서쪽 물가를 따라 남쪽으로 가서는 다시 동쪽으로 가서 변-진 그리고 진-한에 이르는 길이었고, 두번째 길은 바닷가를 따라 내려가서는 마-한의 서쪽 물가를 따라 남쪽으로 가는 대신 현재의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현재의 남한-강을 통해 동남쪽의 진-한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첫번째 길은 뒤에 대방-군에서 왜에 이르고자 보낸 사신이 지난 길인데,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편은 그 길로 왜에 이르기까지의 일을 적으면서는 물에서 움직여 마-한의 국들을 지나며 한동안은 남쪽으로 갔으며, 한동안은 동쪽으로 갔다[U-1:③-⑥]고 적었지만, 위략은 착이 진-한에 이르 일을 적으면서 마-한을 지났다고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 때 지났던 길은 2가지 길들 가운데 두번째 길, 남한-강을 통해 진-한의 서북쪽에 이른 길이었습니다.


U-1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편: ① (대방-)군郡으로부터 왜倭에 이르기까지 ● (먼저 대방-군으로부터) ② 바닷가[海岸]를 돌아다녔다[循]. ● (다음에는) ③ 물에서 움직이며[水行] ④ 한韓의 국들[國]을 지나갔다[歷]. ● 한동안[乍] (한의 국들을 지나가며) ⑤ 남쪽으로 가고[南] ● 한동안 (한의 국들을 지나가며) ⑥ 동쪽으로 갔다[東]. ⑦ 그[其](= 동쪽으로 가며 움직이던 물) 북쪽의 가[岸](= 물가)에 있는, 구사狗邪라는 한韓의 국國에 이르렀다. ● (대방-군으로부터 구야에 이르기까지) ⑧ 7,000리里 남짓을 갔다. ①從郡至倭●②循海岸③水行④歷韓國●乍⑤南●乍⑥東⑦到其北岸狗邪韓國●⑧七千餘里




위의 구절들은 2-3세기의 왜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세히 하나하나 되짚어 그 도읍을 찾을 때에 살필 것이니 여기서 자세히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마지막 구절들이 대방-군에서 구사-국까지 7,000리 남짓을 움직였다[U-1:⑧]고 적은 것을 근거로 삼아 3세기에 위魏의 대방-군은 요서에 있었다고 주장는 모습 세간에 이기에, 그 점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적어놓습니다.


그 구절들이 적고 있는 거리 7,000리 남짓란,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편이 한 적고 있는 , 한 전체의 둘레[方]였던 4,000리[A-4:①] 가운데 힌동안 남쪽으로 가고 한동안 동쪽으로 감으로써 지난 분인 서쪽과 남쪽 둘레 곧 전체 둘레의 반인 2,000리 해당하는 거리입니다. 다만 2,000리는 뭍에서 움직이며 잰 것이고, 7,000리 남짓은 에서 움직이며 잰 것이기에 그 걸린 시간에 반비례하여 적 그 거리가 외려 늘어난 것입니다.


A-4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편: (한韓 땅은) ① 둘레가 4,000리라고 할 수 있었다. ①方可四千里


물길 7,000리 남짓은, 앞서 살핀 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남짓[餘]이 숫자 1 또는 2 대신하여 쓰였다는 점을 해 보면, 7,100-7,200리에 해당하니 물길 1리는 뭍길 0.28리에 해당합니다. 앞서의 관점에 따른 이 수치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편의 다른 구절들을 통해 확인됩니다.


곧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편 다른 구절들은 앞서 구사-국에서 1개 바다를 건너면서 - 물길로 - 1,000리 남짓을 가서 대마-국 - 현재의 대마-도 - 에 이르렀다[U-2:①-③]고 적었습니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물길을 이르는 1,000리 남짓은 1,100-1,200리에 해당하고, 앞서 수치에 따르면 곧 310-340리 남짓 뭍길 곧 한-반도 남쪽의 1변 길이 1/3에 가깝지만 짧은 거리인데, 이 비율은 지도에서 바로 확인어 이 관점을 뒷받침합니다.


U-2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편: ① (구사에서) 처음 1(개) 바다를 건넜다. ② (바다를 건너며) 1,000리 남짓을 갔다. ③ 대마-국[對馬-國]에 이르렀다. ①始度一海②千餘里③至對馬國


반대로, 그 구절의 7,000리 남짓이라는 물길의 거리를 뭍길의 7,000리 남짓이라는 거리와 같다는 관점에 따라 3세기의 대방-군이 한에서 멀리, 구사 - 현재의 김해 - 에서 7,000리 남짓 떨어진 요서에 있었다 여기는 주장은 위의 예를 통해 실제와 맞지 않음이 바로 드러납니다. 그러니 그 구절의 거리가 그 주장의 근거가 된다고 여기는 것은 7,000리 남짓이라는 물길의 거리를 뭍길의 거리와 같다고 보는 잘못된 관점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실제로는 그러한 관점에 따라 자료를 해석할 수 없니 그 구절은 그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뭍길과 물길에 대해 같은 수치에 해당하는 거리(distance)가 다르다는 이 관점을 통해서만 왜-왕의 도읍을 찾을 수 있다는 점까지 볼 때, 그런 근거없는 주장은 옛 자료의 이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 점을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세간에는 그러한 주장과는 다르지만 이러한 점을 알아차리지 못하고서 마찬가지로 왜-왕의 도읍을 찾아내지 못하는 다른 주장 또한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대개 그러한 점을 근거로 삼아서는 반대로 앞서의 거리를 거짓으로 여기는데, 뒤에 이 자료들을 통해 왜-왕의 도읍을 찾아내고 나면 그러한 주장 또한 신경쓸 필요가 없음 또한 미리 이야기해놓습니다.




돌아가서, 앞서 이야기한 두 갈래 길들 가운데 하나인 낙랑-군 장잠-현 가운데에서 배를 타고 현재의 남한-강 상류로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 진-한에 이르는 길 그 물줄기가 끝나는 현재의 소백-산맥 북쪽에서 끝납니다. 그러니 이 시기 진-한에 해당하는 곳은 세간에서 이르듯이 현재의 소백-산맥으로 막힌 그 남쪽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점은 다른 자료를 통해서도 보입니다. 곧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13년 08월 기사는 낙랑-국이 북쪽 변방을 침범하여 타-산-성을 무너뜨렸다[C-25:①-③]고 적었는데, 타朶라는 드문 산 이름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찾아보면 다만 충청-도 영춘-현의 삼타-산[O-2:①]이 있을 뿐이니 곧 여기가 타-산으로 본래 신라의 북쪽 변방에 해당하였습니다. 영춘-현에 해당하는 현재 영춘-면은 과연 현재 남한-강 상류에 있으니, 여기를 통해 착이 진-한에 오고갔던 것입니다.


C-25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13년 가을 08월 ① 낙랑(-국)[樂浪]이 ② 북쪽 변방[邊]을 침범하여 ③ 타-산-성[朶-山-城]을 무너뜨렸다. (儒理尼師今)十三年秋八月①樂浪②犯北邊③陷朶山城
O-2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영춘-현의 산과 물줄기 가운데) ① 삼타-산[三朶-山]이 있다. ①三朶山


그러나 이 길목은 뒤에 다른 일로 결국 신라의 손을 떠났고 아달라이사금 때에 이르러서야 다시 진-한 사람들이 오고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뒤의 이야기는 그 때에 이어가기로 하고, 이렇게 살핀 바를 간단히 말하자면 진-한에서 낙랑-군에 이르는 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길과는 방향을 달리하여 진-한에서 낙랑-군에 이를 수 있던 길도 있었음을 보인 바, 염사 사람인 착이 앞서 움직인 길이 그것입니다.


그러한 길 가운데 하나로 사소는 진-한에서 낙랑-군으로 다시 한漢으로 떠나 뒤에 진-한으로 돌아올[歸] 수 있었던 것이니, 그리하여 길 가운데 자리하였던 한의 낙랑-군 땅에 신라가 그 자취를 지고 동신에게 제사지내는 곳이 세웠졌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취는 고려가 서고 진-한이라는 두 글자가 더이상 멀리 자리한 서-경 사람들이 더이상 기억할 만한 것이 아니게 되며 사라지니, 고려 사람들은 동신을 유화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본래 짤막하게 지나가려던 길들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일단 여기서 끊고서 사소가 낙랑-군을 통해 그 너머 한漢에 오고가던 이야기는 다시 다음 글에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 끝에서 마침내 사소에 대여 모은 단서들, 소가 얻어 지녔다는 '신선의 재주'와 머무른 '황제 가문'이 모이게 되니 그 곁에 사소 있었습니다. 과연 누구였을까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