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3장 3편 왜倭 (0-2) #13

네-쿠니[根-國]에 멈춘 발걸음 (1/1)

by 잡동산이

고사기는 일본서기가 적지 않은 스사노-오의 아들 오오-아나-무치의 일들을 적었는데, 그러한 것들 가운데 오-아나-무치를 오오야-히코가 있는 키-쿠니에 보냈다[H-2:①]고 적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오오야-히코는 오오-아나-무치와 같은 세대인 이스-타케루의 누이 가운데 오오야-히메에 대응하는 사람으로, 스사노-오가 이스-타케루를 그 누이들과 함께 보낸 키-쿠니에서, 앞서 시노가 그랬듯이, 오오야-히메는 주변 무리의 우두머리와 혼인하여 그 무리와 손잡았던 것입니다.


H-2 고사기: 이어 ① 떨어뜨려 키-쿠니의 오오야-히코[大屋-毘古-神]가 머무르는 곳에 보냈다. ... ② 일러 ● (말하기를) "(너는) ③ 살펴 네-카타-스-쿠니[根-堅-州-國]의(= 카타堅라는 땅[州]의 네-쿠니) 스사노-오[向須佐能-男-命]가 자리한 곳을 향할 수 있겠다.("라고 하였다.) 乃①違遣於木國之大屋毘古神之御所...②而云●③可參向須佐能男命所坐之根堅州國


고사기는 이어 오오야-히코가 키-쿠니에 이르렀던 오오-아나-무치를 다시 스사노-오가 머무르는 곳, 네-카타-스-쿠니[根-堅-州-國]로 갈 수 있겠다고 하였다[H-2:②-③]고 적었습니다. 네-카타스-쿠니는 이미 앞서 오오大(= 큰) 하-스-쿠니[八-洲-國]를 큰 여덟[八] 물가들의 큰 쿠니들라고 하였던 것과 같이, 카타라는 땅[州]의 네-쿠니라는 뜻입니다.


스사노-오가 머무르던 땅, 네-쿠니가 있는 카타는 일본서기가 한참 뒤에 일어난 호-호데미의 일들 가운데에 적었습니다. 곧 일본서기 기미년 02년 기사는 호-호데미가 자리한 이와레磐余의 옛날 이름이 카타-이[片-居]고 하였고 또한 달리 카타-타치[片-立]라고 하였다[B-11:①-⑤]고 적었는데, 그 땅의 옛 이름 가운데의 카타片가 바로 앞서 네-쿠니가 있는 카타堅를 같은 소리를 적는 다른 글자로 달리 적은 것입니다.


B-11 일본서기: (기미년 봄 02월 20일) ● 무릇 ① 이와레磐余의 땅은 ② 옛날 ③ 이름하여 ● (말하기를) ④ 카타-이[片-居]라고 하고 ● 또한 말하기를 ⑤ 카타-타치[片-立]라고 하였다. (己未年春二月壬辰朔辛亥)●夫①磐余之地②舊③名●④片居●亦曰⑤片立逮


이居는 곧 이井(= 우물)로 물이 나오도록 하고 사람들이 머무는 곳을 말하며, 타치立은 그리하여 모인 사람들의 우두머리가 섰던 곳을 말합니다. 곧 카타라는 이름의 장소들 가운데 사람들이 모인 곳, 그리하여 우두머리가 세워진 곳이니, 스사노-오가 우두머리가 되고 이어 여러 네-쿠니의 우두머리들 - 네-히코들자리잡았던 곳이 여기였습니다.


그렇기에 호-호데미가 나카-스(-)네-히코 곧 아시-하라 나카-쿠니 - 나카라는 스의(= 물가에 있는) 네-쿠니의 히코(= 우두머리)가 죽은 뒤에 이곳을 가지고서 이름을 바꾸어 이와레磐余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뒤에 호-호데미는 이곳을 또한 도읍으로 삼았고 그리하여 호 가운데 이와레-히코 - 이와레의 우두머리라는 단어가 있게 되었으니, 그가 일본日本의 첫 천황인 신무神武입니다.




이자나-기에서 시작하여 스사노-오로 이어지는 일본서기의 앞부분 이야기는 열도 전체에 자리하던 무리들에 대한 이야기지만, 일본서기의 주어라고 할 수 있는 본, 그 천황인 신무가 처음 섰던 곳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일본에 대해 구당서 동이열전 일본편은 일본이 왜-국에서 갈라졌던 무리라고 하고 해가 뜨는 동쪽 변방에 있어 이름을 일본이라고 하였다[J:①-⑥]고 적었습니다.


J 구당서 동이열전 일본편: ① 일본-국이라는 이들은 ② 왜-국에서 갈라졌던 무리다. ● (그들은) ③ 국이 ④ 해의 변방(= 해가 뜨는 동쪽 변방)에 있도록 하였으며 ● 그리하여 ⑤ 일본이 ⑥ (그) 이름이 되도록 하였다. ⑦ 어떤 사람이 ● 말하기를 "⑧ 왜-국은 ● 스스로 ⑨ 그 이름이 멋지지 않음을 싫어하여 ⑩ 고쳐 (이름을) 일본이라고 하였다. ⑪ 어떤 기록이 ⑫ 일러 ● (말하기를) '⑬ 일본은 ⑭ 옛날의(= 오래된) ⑮ 작은 국이었는데 ⑯ 왜-국의 땅을 아울렀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⑰ 그 사람들 (가운데 앞서) 들어와 보았던 이들은 ● 많이, 스스로 ⑱ (그 땅이) 크다[大]고 자랑하면서 ⑲ (왜-국의 땅을 아울렀던) 사실이 (중-국을) 마주하도록 하지 않았고(= 중-국을 마주하여 그런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 그리하여 (처음) ⑳ 중-국은 ㉑ (그러한지를) 의심하였다. ①日本國者②倭國之別種也●③以其國④在日邊●故⑤以日本⑥爲名⑦或●曰⑧倭國●自⑨惡其名不雅⑩改爲日本⑪或⑫云●⑬日本⑭舊⑮小國⑯倂倭國之地⑰其人入朝者●多自⑱矜大⑲不以實對●故⑳中國㉑疑焉


이 가운데 왜-국은, 앞서 호-니니키를 앞세우고 바다 건너에서 온 아마의 카미같은 사람들을 사루-타-히코가 데려가 자리잡도록 하였던 곳에 그들이 세운 쿠니니다. 반면, 일본-국은 뒤에 왜-국의 도읍 야마토邪馬臺를 나와 동쪽으로 가서 오오-쿠니의 허락을 구하여 네-쿠니에 자리잡은 사람들의 쿠니 곧 오오-와-쿠니[大-和(= 倭)-國]라고 적고 뒤에는 오오-야마토-쿠니, 줄여 야마토-쿠니라고 리내어 읽던 곳입니다.


구당서 동이열전 일본편은 이어, 어떤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어떤 기록은 일본-국이 본래 오래된 작은 국이었다고 적었다[J:⑬-⑮]고 하였으며, 이어 같은 기록이 - 뒤에 - 일본-국이 왜-국의 땅을 아울렀다[J:⑯]고 적었다고 하였습니다. 것은 다 뒤에 - 3세기 후반을 지난 시기 - 신무의 뒤를 이은 천황들이 다스리던 시기에 이르러 그 무리가 서쪽 멀리 야마토를 도읍으로 하던 왜-국에 이르러 그들이 다스리던 땅을 우른 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3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왜-국이라고 하던 서쪽의 무리와, 보다 앞서 그곳으로부터 나와 동쪽에 자리잡은 작은 - 뒤에 스스로 이름을 고쳐 일본-국이라고 하던 - 무리는 다른 무리였습니다. 그 가운데 뒤의 무리의 일들을 처음부터 리한 것이 일본서기며, 때문에 그 이름을 1개 국國의 사史를 이르는 서書라는 글자를 가지고 적은 책 일본서日本書의 기紀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일본서기는, 3세기 후반까지 일어났던 왜-국의 일들은 반대로, 단편적으로만 적고 있을 뿐입니다. 앞서 호-호데미가 왜-국을 떠난 뒤 3세기 후반까지에 일어난 왜-국의 일들 대부분은 - 모두는 아니고 - 일본서기가 아니라 다른 기록들, 곧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편과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통해서 살펴야만 하는데, 그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여기까지 살핀 일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일단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래 그림1의 열도의 지도를 보며 함께 정리해보지요. 스사노-오가 마지막으로 자리잡은 네-쿠니가 있던 곳은 아래 지도 가운데 29번 나라-현이라고 적은 곳으로, 네-쿠니가 곧 오오-야마토-쿠니[大-和-國]가 던 곳입니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이곳의 서쪽 그리고 남쪽에는 30번 와카야마-현이라고 적은 곳이 있는데, 키-쿠니[紀伊-國]이 있던 곳으로 그 서쪽과 남쪽은 다시 바다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림 1. 열도의 지도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의 행정구역. 링크: https://ko.m.wikipedia.org/wiki/일본의_행정_구역 )


이곳의 서북쪽으로는 27번 오사카-부라고 적은 곳이 있는데, 동쪽 지역에는 오오-야마토-쿠니 서북쪽에 자리하였던 카와치-쿠니[河內-國]가 있었고 쪽 지역에는세츠-쿠니[攝津-國] 동쪽 일부분이 있던 곳입니다. 시 그 서쪽에 28번 효고-현이라고 적은 곳이 있는데 그 가운데 남쪽 지역은 동쪽에 세츠-쿠니의 서쪽 지역이 있지만 대부분 하리마-쿠니[播磨-國]가 있던 곳로 그 남쪽에 또한 바다가 있습니다. 효고-현 북쪽 지역은 타지마-쿠니[但馬-國]가 있던 곳입니다.


이제 기서 다시 서쪽으로 나아가면, 산줄기로 갈라진 남쪽의 33번 오카야마-현이라고 적은 곳과 북쪽의 31번 돗토리-현이라고 적은 곳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게 이른 오카야마-현 가운데 동쪽 지역은 는 미마사카-쿠니[美作-國], 남쪽에는 비젠-쿠니[備前-國] 있던 곳이며, 오카야마-현의 북쪽 산줄기 너머의 돗토리-현은 쪽에서부터 례로 이나바-쿠니[因幡-國], 호키-쿠니[伯耆-國] 있던 곳입니다.


다시 돗토리-현에서 더욱 서쪽으로 나아가면 32번 시마네-현이라고 적은 곳에 이르게 됩니다. 독도에 대한 일로 말이 많은 곳이지요. 그러한 시마네-현 가운데 동쪽 지역이 이즈모-쿠니[出雲-國] 있던 곳이며 서쪽 지역이 이와미-쿠니[石耳-國]가 있던 곳입니다. 그 바로 남쪽 산줄기 아래, 남쪽에 34번 히로시마-현이라고 적은 곳이 있는데, 그 서쪽 지역이 스사노-오의 일들 가운데 이즈모-쿠니와 함께 말한 아키-쿠니[安藝-國]가 있던 곳입니다.


내친 김에 몇 군데 더 살펴보지요. 히로시마-현 가운데 동쪽 지역은 비후-쿠니[備後-國]가 있던 곳입니다. 그 동쪽은 앞서 이야기한 오키야마-현의 서쪽 지역인데, 여기는 비추-쿠니[備中-國]가 있던 곳입니다. 이 가운데 비후-쿠니, 비추-쿠니, 비젠-쿠니는 함께 키비-쿠니[吉備-國]라고 하니, 앞서 이자나-기와 이자나-기가 알았던 8개 물가에 있던 쿠니들 가운데 키비-코-스[吉備-子-洲]의 쿠니가 바로 여기를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28번 효고-현의 북쪽 지역에 대해서 타지마-쿠니가 있던 곳이라고 하였는데 그곳의 동쪽에는 26번 쿄토-부라고 적은 곳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북쪽 지역은 단후-국[丹後-國]이 있던 곳이고 남쪽 지역은 단바-국[丹波-國]이 있던 곳입니다. 앞서 키비-쿠니에 대해서 살핀 바와 비슷하게, 타지마-쿠니, 단후-국, 단바-국은 본래 함께 단바-국이라고 일컫던 곳입니다.




그리하여 돌아보면 스사노-오는 32번에 해당하는 곳의 가운데 북쪽 바다로 와서 남쪽 산줄기에서 이나-타-히메와 후나타들의 일들을 만났으며, 동쪽의 산줄기, 33번 동쪽에 자리한 31번, 28번 지나서 다시 27번, 30번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29번 지역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자리잡은 곳이 본래 이자나-기, 이자나-미가 그가 우두머리 노릇을 하도록 하려던 네-쿠니 가운데 카타-이 또는 카타-타치라고 하게 되었던 장소였습니다.


그렇게 이어보면, 스사노-오가 오오-야마츠미와 손잡고 네-쿠니로 나아간 일들에 영향을 받았을 곳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이자나-기를 뒤쫓을 때에는 오오-야마츠미와 함께 하였던 무리들 - 카구츠-치의 뒤를 이은 무리들 - 이 이어 다스리던 다른 쿠니들이 있었을 곳들, 스사노-오가 움직인 길의 동북쪽에 있던 28번의 타지마-쿠니, 26번의 단바-쿠니와 탄후-쿠니 곧 아울러 단바-쿠니라고 하던 곳과, 반대로 스사노-오의 움직인 길의 서남쪽에 있던 키비-쿠니가 그곳입니다.


이 가운데 스사노-오가 움직여 자리잡은 곳과 멀리 떨어진 키비-쿠니보다 큰 영향을 받은 곳은 가까이 자리잡고 있던 단바-쿠니였습니다. 그 영향은 스사노-오가, 먼저 키-쿠니로 보내 나무의 씨들을 퍼뜨리도록 할 만큼 그 아들 이스-타케루가 자랐던 시기, 스사노-오가 해당하는 세대의 주활동시기 MC-40[+30)가 끝나가던 즈음 나타났습니다.


단바-쿠니에서는 그 즈음에 이르러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1세대 30해를 지나 주활동시기가 MC-10[+30)인 세대에 해당하는 어떤 사람, 어린 나이에 다파-나 - 단바 - 를 떠나 신라에 이르렀고 자라서는 뒤에 신라의 왕이 되는 탈해를 낳았던 그 아버지에 대한 자료들 가운데 그 일들이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그러니, 그 시기의 일들을 이야기할 때에 이 질문의 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스사노-오가 일으킨 변화를 끝으로 이제 3장 3편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지는, 왜에 대한 다음 글들은 그 변화를 타고 일어났던 새로운 우두머리 오오-아나-무치에 대해 다시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기약하며 이제 다음은 3장 4편으로 넘어가 부여 일들, 고구려의 건국 한 걸음 앞까지의 일들을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3장 3편 왜倭 (0-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