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야, 소개팅 잘하고 있어?
-다 끝났어요. 지난주에 만난 사람이 오늘 영화 보자고 해서 다시 한번 만나보려고.
-저번에 말한 형부 친구 참 괜찮은데.
-키 작다는 사람?
-응 키는 좀 작긴 한데, 그래도 사람이 참 괜찮아. 같이 봉사활동 다니면서 겪어봤는데 이런저런 얘기도 해봤는데. 다른 사람 소개해주기 아까워서.
-그래? 키가 얼마나 작은데?
-너랑 얼마 차이 안... 날... 걸... 내가 결혼해서 살아보니 외형적인 건 하나 소용없더라. 내면이 중요하지. 암튼, 오늘 영화 잘 보고 생각 있으면 연락해.
토요일 아침부터 선배 언니가 잠을 깨웠다. 언니는 갓 육아를 시작한 초보 엄마이다. 신생아와 보내는 살인적인 24시간을 이야기하며, 아기가 밤낮이 바뀌어 언니도 언제가 밤이고 아침인지 모르겠다고 한참 수다를 늘어놓았다.
아, 난 결혼은 좀 천천히 해야지! 내게 지금 필요한 건 연애다!!
아침 일찍 깨워준 언니 덕분에 간단히 운동하고 얼굴의 부기를 뺐다. 약속은 3시. 영화 보고, 간단하게 저녁 먹자는 그분의 계획에 따르기로 했다.
단 3번의 소개팅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개팅이니, 이상형이니, 생각하지 않아도, 주위에서 부딪치는 남자 사람들에게 말랑말랑한 감정을 느끼던 20대 초반의 나는 온데 간데 없어졌다. 누가 보면 비웃을지도 모르는 이상형 리스트를 작성해 체크하며, 20대 끄트머리에서 빳빳했던 고개를 점점 숙이는 나만 있었다.
‘오늘은 제발 그분이 혼자 김칫국 마시고 앞서가지 않게 해주세요. 플리즈’
딱 그거만 안 하면 몇 번 더 만나보자!
두 번째 만남이니 좀 편한 옷을 입었다. 옷차림이 편해지니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하지만 공기는 코끝이 빨개질 정도로 차가웠다. 하늘은 파란 바닷물이 얇게 언 것처럼 차가워 보였다. 내 코끝으로 찌르면 쫘악 금이 갈 것 같았다. 조금 일찍 나왔지만, 추위를 이기려고 발걸음을 빨리했다.
약속 장소에 그분이 먼저 나와 있었다. 지난번에 만날 때도 나보다 일찍 나왔었다. 저런 모습은 나와 생각이 비슷한 것 같아 좋았다.
“안녕하세요.”
그분은 나를 향해 다가오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처음보다 확실히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아직 30분 남았어요. 갈까요?”
그분은 영화표까지 미리 준비해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팝콘과 콜라를 샀다. 우린 극장 안으로 들어가 옆에 나란히 앉았다. 우리의 모습은 극장에서 흔히 보는 연인들과 별반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남자와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심장도 그걸 느꼈는지 제 맘대로 몸을 흔들어 댄다. 심장아 나대지 말자. 그래도 아직 연인은 아니다. 이제 그냥 두 번 만났을 뿐이야.
영화는 코미디였다. 보는 내내 배꼽 잡고 웃었다. 몸도 노근 노근, 마음도 흐물흐물해졌다. 결말도 훈훈했다. 웃느라 고생한 볼을 마사지하며 극장을 나왔다.
영화의 여운을 이야기하며 저녁 메뉴를 정했다.
“닭갈비 먹으러 갈래요? 근처에 맛있는 집 알고 있는데.”
“아, 그래요.”
그분은 어색할 틈 없이 자연스럽게 리드를 잘했다. 우린 나란히 걸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또! 손을 잡았다.
이 또한 처음이 아니니 덜 놀라긴 했다. 하지만 그분의 흥건한 손은 여전히 찝찝하고 싫었다. 나는 손을 쓱 뺐다. 그리고 내 코트 속에 손을 넣었다. 그분은 그때의 그 표정을 지었다. 헤벌쭉. 오마이갓.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분과 좀 더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 같아 더더욱 그냥 넘어가면 안 됐다.
“왜 자꾸 손을 잡으세요?”
마음속에서는 사납게 쏘아붙이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살짝 눈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꾸요? 오늘은 처음 잡았잖아요. 아까부터 잡고 싶은 걸 얼마나 참았다고요. 헤헤”
그분은 도리어 억울하다는 듯 말하며 웃었다.
“아니. 아직 우리가 사귀기로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알아가는 단계잖아요. 지난번에도 그렇고, 자꾸 손을 덥석 잡으니 사실 기분이 별로예요.”
나는 조곤조곤 불쾌한 심경을 이야기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분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중저음의 부드럽던 음성은 사라지고 차가운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 그 나이에 소개팅에 나오는 건, 결혼할 마음까지 갖고 나오는 거겠고, 금방 30살이 되니 급할 텐데. 처음 만난서 밥 먹고 2차까지 갔다는 건 내가 마음에 든 거 아닌가요? 굳이 ‘오늘부터 우리 사귀어요. 준비 땡’ 해지야 손잡고 할 수 있는 건가요. 써니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상당히 보수적이네요. 아, 써니 씨가 기분이 별로인 것처럼 저도 오늘 기분이 별로네요. 저녁은 다음에 먹기로 해요.”
그분은 쉼 없이 불쾌한 감정을 쏟아냈다. 내가 잘못한 것처럼. 마구 윽박질렀다.
그러고는 그분은 등을 보이며 점점 사라졌다.
뭐지? 내가 잘못한 건가? 소개팅 2차를 가면 사귀는 건가? 나만 모르고 있었나? 그리고 내가 뭐, 그렇게 안 보이는 데 보수적이라고? 그렇게 안 보인 다는 거는 뭐지?
나는 그분이 안 보일 때까지 그 자리에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어느덧, 얇게 얼어있던 파란 바닷물은 와장창 깨지고 깜깜한 깊은 바닷속이 되어있었다. 그 속은 더 차갑게 느껴졌다.
어쩌면 처음에 아닌 건 끝까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맥주를 드리 부었다. 그리고 이상형 리스트를 찢어버렸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