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 헉... 헉... 헉...
뛰었다. 뛰고 또 뛰었다.
연애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련다. 소개팅만 하면 연애도 하게 될 줄 알았다. 이상형만 적어두면 이상형을 만날 수 있을지 알았다. 그동안 이상형을 적어두지 않아서, 내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생각해 두지 않아서, 옆에 이상형이 지나가도 못 알아보는 줄 알았다. 멍충이. 그딴 건 다 필요 없는 거였는데.
나만 좋아서 되는 것도 아니고, 상대방만 좋아도 안 되는 게 연애임을 나이 서른 다 돼서 알게 되다니. 멍충이.
낯선 누군가를 만나서, 나를 알려주고, 상대방을 알아가면서 익숙해지는 과정이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나? 한 살을 더 먹어서 그런 건가? 아, 이제 다 귀찮다.
헉... 헉... 헉...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멈췄다.
보기와 달리 보수적이라는 얘기를 들은 지 2주일이 지났다.
이제 소개팅을 구걸하지 않는다. 이상형 리스트도 없다.
직장 친구들은 내가 소개팅을 하고 올 때마다 궁금해했다. 그때마다 난 너무 가볍게 내 감정을 정리해서 이야기해주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냥 좋은 경험을 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문드러지는 속내를 다 들추어 보여주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내 소개팅 얘기는 손바닥만 한 사무실에서 다시 발바닥만 한 사무실로 옮겨 다녔다. 에잇. 역시 발 없는 말이 제일 빨랐다. 뭐. 그러든 말든 신경 안 쓰기로 했다. 그럴 줄 알고 적당히 내 중심적으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부장님이 커피 한잔하자고 살짝 불렀다. 입사 때부터 어리바리한 나를 잘 챙겨주신 분이다. 벌써 함께 일한 지 5년째다. 직원도 몇 안 되는데 회사에서, 몇 년 동안 쭉 함께한 직원은 더 몇 안 된다. 그중에 한 분이 부장님이다. 나이 차이는 좀 있지만 그래도 친구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분이다.
“요즘 선보고 다닌다며?”
“선이요? 아... 니에요. 그냥 소개팅이에요.”
“그게 그거지 뭐. 내 후배 중에 괜찮은 친구가 있는데, 한 번 만나 볼텨?”
부장님은 올해 마흔하고 여섯 살이 되었다. 부장님의 후배라고 하면 대충, 제일 어리다고 해도 마흔은 될 거다. 아무리 마음을 활짝 열어 둔다고 해도 10살 많은 분은 생각 안 해봤다.
“아니에요. 괜... 찮아요. 내년에 서른이라는 생각에 괜히 마음이 조급해서 이 사람 저 사람 소개받았었나 봐요. 누군가를 만나서 내 얘기 늘어놓고, 그 사람 얘기 들어주는 게 이렇게 힘든지 몰랐어요.”
“서른이 뭐 별거라고. 서른도 똑같 데이. 써니씨는 분명 좋은 사람 만날 테니까 걱정 말고.”
“네, 고마워요. 부장님.”
“내 후배 진짜 안 만나 볼래?”
“하하하. 진짜 괜찮아요. 좀 쉴래요.”
헉... 헉... 헉...
매일 뛰었다. 뛰고 또 뛰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자만했던 행동들과 가식적인 행동들이 자꾸만 생각나 얼굴이 달아올랐다. 마지막에 만난 그분의 목소리와 말투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를 괴롭혔다.
전환이 필요했다. 뭘 하면 좋을까? 운동을 시작할까? 영어 학원에 다닐까? 이놈에 잡생각들을 어떻게 치워버릴까? 난 상당히 쿨(COOL)한 사람인 줄 알았다. 이렇게 뒤끝이 오래갈 줄이야.
띠링띠링~ 띠링띠링~
헉... 헉... 헉.... 휴우. 선배 언니의 전화다. 받을까... 말까... 휴우.
-여보세요.
-써니야. 운동 중이야? 통화 가능해?
-네. 한 바퀴 뛰고 있었지. 잘 지내죠?
-응 나야 뭐. 맨날 힘들지 뭐. 육아가 장난 아니다. 100일이 되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데 나한테는 그 기적이 안 일어난다.
사실 매번 언니가 아기와의 전쟁을 얘기해주지만 와닿지 않는다. 그게 어떤 삶인지, 100일의 기적이라는 말도 처음 들어 본다. 100일이면 아기가 기어 다니는 건가? 난 아직 거기까지는 관심이 없다. 그냥 언니의 넋두리만 영혼 없이 공감해 줄 뿐이다.
-아, 그런 기적도 있어요?
-에효. 그런 게 있어. 넌 그냥 딴 세상 얘기 같지? 하하. 그건 그렇고. 다음 주 금요일에 언니 집에 올래? 우리 아들 이번 주에 100일 잔치했는데, 가족들하고만 했거든. 친구들 못 본 지 오래 돼서 겸사겸사 초대하려고. 너도 와라. 신랑 친구도 온다고 했거든. 그때 말한 그 친구 말이야. 소개팅 아니고 그냥 자연스럽게 와서 한번 얘기만 나눠봐. 부담 갖지 말고. 혹시라도 둘이 진지하게 만나게 되면 나도 부담되거든.
-나 당분간 누구 만나는 거 쉬기로 했어요. 그래도 조카 100일인데 가볼게요. 언니 얼굴도 보고 싶고.
-오케이. 다음 주에 회사 마치고 우리 집으로 와. 다음 주에 보자.
언니와의 전화를 끊고 다시 뛰었다.
언니가 통화할 때마다 말한 사람이 있다. ‘키는 작지만’으로 시작하는 사람이다. 이름도, 하는 일도 모른다. 그냥 키가 작은 사람이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란다.
헉... 헉... 헉...
그리고 멈췄다.
에이. 아니야.
그만하자.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