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4월이다.
오늘은 선배언니 집에 가기로 한 금요일이다. 퇴근시간을 앞당겨 나왔는데도 도로에 차가 많았다. 신호에 자꾸 걸리고, 끼어드는 차에 속도가 줄었다. 덕분에 거리에 활짝 핀 매화꽃, 이제 기지개를 켜며 꽃잎을 하나둘 펼치는 벚꽃을 볼 수 있었다. ‘너희 참 예쁘다.’
30분 거리를 1시간에 걸려 도착했다.
벨을 눌렀다. 벨소리가 채 두 번이 울리기 전에 문이 열렸다.
“어서와요. 써니씨.”
형부는 환하게 웃으며 반겨줬다.
“써니야, 어서 와.”
안에서 아기 울음소리와 함께 언니 목소리도 들렸다. 언니 내 얼굴을 보지 않았는데도 목소리가 한껏 들떠있었다.
“안녕하세요. 잘시내셨어요?”
먼저 형부한테 인사를 건네고 안으로 들어갔다.
“언니, 우와 신기해. 언니 진짜 엄마 같다.”
언니는 아기 기저귀를 갈고 있었다. 엄마가 된 언니의 모습이 낯설었다. 손놀림이 얼설픈 것 같으면서도 작은 아기의 몸을 만지는 손길에 사랑이 가득했다. 언닌 진짜 엄마가 되있었다.
아직 손님은 나뿐이었다.
“거기 잠깐 앉아있어. 애기 기저귀 좀 갈고. 그래도 일찍 왔네. 차는 안 막혔어?”
언니는 반가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숨도 안 쉬고 말을 했다. 선물을 내려놓고 식탁 의자에 앉았다.
“언니 천천히 말해. 금요일이라 당연히 막혔지. 그래서 일부러 좀 일찍 출발했어. 나 신혼집 처음 와 봐요. 둘러봐도 돼?”
“그럼 둘러 봐. 살림살이 사느라 내가 얼마나 발품 팔았는지 아니? 내가 돈을 이렇게 펑펑 써보기는 처음이야. 그래도 이것저것 다 따져보고 저렴한 가격에 산거 긴 해. 다음에 너 혼수 살 때 내가 다 넘길 게.”
세 식구가 살기에 아담하고 적당한 크기의 집이었다. 아직 새 거 냄새도 안 빠진 가구들하며, 주방 용품들이 알맞은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혼수는 무슨. 언제가 될 줄 알고.”
언닌 계속해서 말을 늘어놓았다. 기저귀를 갈아차고 울음을 그친 아기는 엄청 귀여웠다. 아기를 한번도 제대로 안아 본 적이 없어 섣불리 안아보겠다는 말을 못하고 있는데 언니가 내품에 아기를 안겼다.
“한번 안고 있어봐. 음식은 준비 다해놨거든 차리기 만하면 돼.”
언니는 주방으로 가서 음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기와 눈이 마주쳤다. 아기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아랫입술을 쭉 빼더니 눈이 다시 촉촉해졌다. 금방이라도 싸이렌 소리가 울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언니 아기 울려고 해. 어떻게 해? 언니가 아기 봐. 내가 음식 차릴게”
“아기 주세요. 자, 아빠한테 오자.”
형부는 아기를 받아 안았다. 아기를 보는 형부의 눈에서 하트가 뿅뿅뿅 쏟아지는 것 같았다. 저렇게 좋을까?
벨이 울렸다.
“누구세요? 써니야, 문 좀 열어줘.”
바쁜 집주인들 대신 내가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
“어머, 써니야. 오랜만이다.”
“언니, 오랜만이에요. 졸업하고 처음이죠? 얼른 들어와요.”
쎈캐 선배언니였다. 자유로운 영혼에, 성격이 좀 세서, 별명이 쎈캐였다. 그러다 보니 졸업 후엔 자연스럽게 연락을 잘 안하게 되었다. 가끔 소식만 듣고 지냈었다. 그래도 함께한 추억거리가 있는 사람이라 오랜만에 보니 반가웠다.
우린 식탁에 모여 앉아 그간 서로 못보고 지낸 시간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옛 일을 추억하며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모처럼 마음 편히 크게 웃었다.
다시 벨이 울렸다.
“상민이냐?”
이번에는 형부가 아기를 안고 뛰어 나갔다.
“또 누구 온 다고 했어?”
“응 남편 친구. 상민씨”
“그래? 오~”
아직 솔로인 쎈캐 언니는 머리를 매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나 형부 뒤를 따라갔다. 나도 같이 일어났다. 언니가 계속 얘기했던 그 ‘키가 좀 작은 분’이었다. 이번엔 형부의 얼굴이 활짝 폈다. 잠깐이었지만, 여자들끼리 목소리 높여 수다 떠는 걸 듣느라 고생했다는 얼굴로, ‘저도 친구 있습니다.’하며 소개했다. 상민씨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청바지에 하얀 티셔츠를 입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개구쟁이 아이 같았다. 다들 인사를 마치고 상에 둘러앉았다. 그 순간이 짧아 키가 작았는지, 어땠는지는 잘 보지 못했다. 굳이 그 사람을 신경쓰며 살피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
밥을 먹으며 형부는 수다스러워졌고, 나를 제외한 셋은 동갑이어서 금세 말을 놓는 친구가 되었다. 어른들이 웃고 떠드는 사이 아기는 잠이 들었다. 언니는 아기를 방에 눕히고 맥주를 꺼내왔다. 나는 운전을 해야 해서 음료수만 마셨다.
“써니는 안자고가? 오랜만에 밤새 수다 떨고 내일 가자.”
“그러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더 놀다가요.”
쎈캐언니와 상민씨는 자고 갈 작정으로 왔다며 내게 술을 권했다. 하지만 난 남에 집에서 자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늦어도 잠은 집에서.(아, 이런 것도 보수적인 건가?)
대화의 톤은 점점 낮아졌지만, 말은 끊이지 않았다. 형부는 주로 상민씨와의 어릴적 추억 얘기를 했다. 상민씨의 첫째 누나가 좀 무서웠느니, 둘째 누나가 진짜 예뻤다는 둥, 셋째 누나는 성격이 좋아고, 여동생이 간호사라는 이야기를 했다.
“오, 상민씨 귀하게 자랐겠네. 귀남이네. 하하하.”
쎈캐 언니의 말에 상민씨는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그럼요. 우리 상민이 귀남이지. 하하하.”
“귀남이는 무슨. 누나들 틈에서 내가 얼마나 힘들었다고.”
상민씨는 웃으며 이 대화를 끝내고 싶어했다.
“써니씨는 연애 안 해요?”
형부는 갑자기 화제를 내 연애로 돌렸다.
“하고야 싶죠. 그런데 그게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상민이 어때요? 내 친구 중에 정말 괜찮은 앤데. 한번 만나봐요.”
“뭐에요. 갑자기. 분위기 이상해지게.”
나는 얼굴이 빨개져 컵을 입에 가져다댔다. 상민씨는 형부의 말에 그냥 웃고만 있었다.
“어머, 상민씨 써니 마음에 드나봐. 뭐야~ 나도 솔론데. 내가 더 급한 거 아냐? 써니 너는 서른도 안됐잖아.”
쎈캐 언니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서운한 내색을 했다.
“오늘은 그냥 노는 날, 사랑의 짝대기는 우리 집에서 나가서 하기.”
선배언니가 이상해지는 분위기를 정리했다.
분위기에 휩쓸려 웃고 떠드는 사이 벌써 11시가 되었다. 나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부와 상민씨가 담배를 피우러 나가면서 배웅을 해줬다.
“아 아쉽네요. 써니씨랑 더 얘기하고 싶은데. 다음에 연락해도 될까요?”
“써니씨, 상민이한테 연락처 줘도 되죠?”
“아... 네.”
상민씨는 짙은 쌍꺼풀에 눈이 컸다. 그 큰 눈이 깜깜한 밤에 반짝이며 웃었다. 연락하겠다는 말이 농담같은 진담인지, 진담 같은 농담인지 헷갈렸다.
“오늘 잘 먹고 잘 놀다 가요. 다음에 또 뵈요. 형부. 상민씨도요.”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내내 상민씨는 내 차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