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얼굴을 감추지 못하는 것처럼 눈도 입도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그 사람을 향해 웃었다.
“잘 지내셨어요?”
그 사람은 내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나도 그와 똑같은 인사를 건넸다. 어색할 것 같던 기운은 1초도 우리 사이에 머무르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분은 쌍꺼풀이 짙어 눈이 컸다. 그 큰 눈에 웃음이 가득 차 있었다. 그 눈을 잠시라도 마주치면 가슴이 뛰었다. 신기했다. 난 저렇게 부리부리한 눈 안 좋아하는데. 뭐지 이 사람?
“써니 씨, 저녁 안 먹었죠? 이 동네는 뭐가 맛있나요?”
“음, 저 집 돈가스 맛있는데, 돈가스 좋아하세요?”
나는 건너편에 보이는 일식 돈가스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몇 번 가보지는 않았지만 깔끔하고 맛있던 것 같다. 무엇보다 그 집 간판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돈가스 좋아요.”
그분, 아니, 상민 씨는 내가 뭐를 먹자고 해도 그냥 저렇게 눈웃음치며 좋다고 할 것 같았다.
내 얼굴처럼 빨개진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나란히 섰다. 아직 상민 씨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그냥 부리부리한 눈과 그 눈이 웃음을 실을 때마다 생기는 주름만 보였다. 그리고 상민 씨의 말투, 억양은 상당히 편안했다. 거칠 거나 세지 않은 말투, 높지 않은 억양에 재미있는 유행어를 섞어 이야기했고, 나는 별다른 대답 없이 계속 웃고만 있었다. 나는 원래 잘 웃는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웃지는 않는데, 오늘은 이상하다. 뭐지 이 사람?
돈가스를 다 먹지 못했다. 소개팅할 때 처음 만난 사람과 밥 먹는 게 어색해서 남겼던 그때와는 다르다. 너무 빨리 움직이는 심장 때문에 위가 제대로 운동을 못 하는 것 같다. 조금만 더 먹으면 그냥 체해버릴 것 같았다.
“왜 그렇게 먹어요? 전에 봤을 때 정말 맛있게 잘 드시던데. 어디 안 좋은 건 아니죠?”
“아, 그때, 제가 그랬나요? 안 좋은 건 아니에요. 하하... 하... 많이 먹었어요.”
나는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그랬었나? 앞으로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거라고 전혀 상상도 못 했었으니까. 따뜻한 방바닥에 편하게 앉아서 편한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정신없이 먹었었나 보다. 으이구.
“이 집이 양이 많네요. 저도 다 먹었어요. 그럼 나갈까요?”
먼저 포크를 내려놓고 있는 내가 불편했는지 상민 씨도 포크를 내려놓고 입을 닦았다. 상민 씨는 자기가 먼저 만나 달라고 했으니, 저녁은 자기가 사겠다고 했다.
“그럼 커피는 제가 살게요. 저 집 커피 맛있어요.”
우린 다시 신호등 앞에 섰다.
“아까 써니 씨 기다리면서 이 동네에 뭐가 있나 잠깐 검색했는데, 호수공원이 있더라고요. 커피 테이크아웃해서 공원 조금 걸을래요? 소화도 시킬 겸.”
맞다. 회사 근처에 호수 공원이 있다. 그런데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회사에서 커피 마실 때 창문에 살짝 걸쳐지는 호수의 끄트머리를 바라본 적은 있지만.
“그래요. 좋아요.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는데, 이 가까이에 있는 건 알아요. 아마 저쪽 뒤쪽으로 쭉 가면 될 거 같아요.”
아무래도 커피숍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것보다 같이 걷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날씨도 딱 이었다. 마음을 살랑살랑 흔들어 놓기 좋은 봄바람에, 남들 다 떨어질 때 끝까지 버티다 혼자 남아 고고하게 떨어지는 벚꽃잎까지.
우리는 커피를 들고 호수공원을 찾아 걸었다. 큰길 두 개를 건너니 바로 공원이었다. 상민 씨가 나보다 더 길눈이 밝았다. 날 기다린 시간이 길어야 5분 정도였는데, 그 사이에 주변을 탐색하고 가는 길까지 익혔다는 게 놀라웠다. (설마 몇 박 며칠 공부한 건 아니겠지?ㅋ)
공원을 걸으며 본격적인 이야기를 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취미는 뭔지, 좋아하는 건 뭔지 등등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늘어놓는 질문들과 답을 했다. 나는 그동안 갈고 닦은 기술이 있기에 자연스럽게 묻고 답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질문은 좀 달랐다. 여러 다른 질문이 아니라 한 가지의 질문이 가지를 치고 내려갔다. 상대방을 알기 위한 자료조사 식의 질문이 아닌, 꼬리에 꼬리를 문 공감을 찾아가는 질문이라고 할까. 그리고 그 사람의 답은 무슨 EBS 교육방송의 강사가 개그콘서트 나와 말하는 것처럼 정말 바른말을 재미있게 했다.
난 괜히 비꼬고 비판적 시각으로 헐뜯는 사람을 싫어한다. 긍정적이고 바른 사람을 좋아하는데, 사실 그런 사람은 EBS 방송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밖에 본 적이 없다. 어쩌면 처음 만나는 거니 설정일 수도 있지 뭐. 아니면 자기계발 서적을 엄청 많이 읽은 사람인가? 암튼 신기했다.
공원 한 바퀴를 돌면서 얼마나 웃었던지 볼이 아팠다. 예능 보면서 웃는 거 말고, 누군가 대화를 나누며 이렇게 웃어 본 게 상당히 오랜만이다.
우린 처음 만났던 회사 앞으로 다시 왔다.
“써니 씨, 오늘 즐거웠습니다. 커피 잘 마셨어요.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아, 네. 그래요. 저도 즐거웠습니다.”
마주 보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음을 약속했다.
그때, 덩치가 크고 키가 큰 남자가 상민 씨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다. 순간 뭔가 번쩍하는 가 싶더니, 마법에서 풀려난 것처럼 상민 씨를 감싸고 있던 신기한 기운이 사라졌다. 상민 씨의 키가 보였다. 방금 옆으로 지나간 남자보다 많이(상당히? 훨씬?) 작았다. 지금까지 나와 눈높이가 맞아서 키에 대한 생각을 잊고 있었나 보다. 아뿔싸.
앗! 또 저건 뭐지? 상민 씨의 귀가 갑자기 반짝였다. 귀! 걸! 이! 였다. 검은색 귀걸이라 잘 안 보였던 건가? 아니면 마주 앉아서 찬찬히 살펴볼 시간이 없어서 몰랐던 건가? 이런.
뭐에 홀린 듯 정신없이 웃다가 이제야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어쩌지?
“써니 씨, 다음엔 영화 볼까요?”
그분은 여전히 웃었고, 난 더 이상 웃지 못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