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도 벗지 못하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천장에 방실 거리고 매달려있는 둥근 전등을 보았다. 그 안에 상민 씨가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작아진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귀에 딱 붙어있는 귀걸이도 반짝였다.
‘왜 저렇게 계속 웃는 거야.’
돌아누워 눈을 감아버렸다.
- 상민 씨랑 데이트 어땠어?
- 데이트는 무슨. 그냥 한 번 만난거지.
- 한 번? 다음엔 안 만나기로 했어? 별로였어?
- 아니, 다음엔 영화 보자고는 했는데, 잘 모르겠어.
- 왜에? 그래도 상민 씨 한 사람만 보면 꽤 괜찮은데. 내가 본 신랑 친구 중에서 제일 괜찮아. 생긴 것도 그만하면 괜찮고, 성격도 괜찮고, 뭐, 키가 좀 그렇긴 해도. 살다보니 그런 건 문제도 안 돼. 안 중요하더라.
- 뭐, 당장 같이 살 것도 아닌데, 난 키도 중요해.
키... 글쎄...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휴우. 같이 얘기하며 걷는 동안 키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키보다 그 사람의 생각과 말투가 더 크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말은 그렇게 해버렸다.
- 네가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 영화까지만 봐봐.
- 응, 그러긴 할건데. 그 사람 귀걸이도 했데? 언니 알고 있었어?
- 귀걸이? 몰라. 난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까지 꼼꼼히 본 적이 없어서. 그런데 그게 뭐? 남자가 귀걸이 하면 안 돼?
- 난 귀걸이 한 남자는 싫거든. 그냥 내 눈에 그게 이상하게 보여. 별로야.
- 헐. 웃긴다 너. 너 취향이니 어쩔 수 없다만. 나는 자기를 꾸밀 줄 아는 사람인 것 같아서 멋지기만 하고만. 상민씨가 귀걸이도 했었구나. 다음에 만나면 다시 봐봐야 겠네.
자기를 꾸밀 줄 아는 사람? 그렇지. 그래서 싫다고. 내가 귀걸이를 한 사람을 싫어하기 시작한 건 20대 초반에 만났던 사람 때문이다. 옷 입는 스타일도 꽤 괜찮았고, 외모에 신경을 많이 썼던 사람. 그 사람이 귀걸이를 했었다. 그런 그 사람이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유난히 반짝이는 귀걸이를 하고 왔는데, 그 반짝이는 빛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런 게 여자들만 있다는 육감이라는 걸까. 그 낯선 빛이 내 친구 귀에서도 반짝이고 있었다. 그렇게 그 사람과 만난 지 3개월 만에 헤어졌다. 물론 친구와도 멀어졌다.
- 응. 영화는 보려구요. 형부랑 언니를 봐서라도 그러는 게 맞는 거 같아서.
- 아니야. 우리 때문에 일부러 그러지 않아도 돼. 너 하고 싶은 대로해. 우리가 뭐라고 눈치보냐.
눈치? 내가 그랬나? 그래서 다음 약속을 한 건 아니었다. 상민 씨랑 같이 밥 먹고 산책하는 동안 귀걸이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사람의 유머와 웃는 얼굴이 더 반짝였다. 그랬으면서 핑계를 대고 있다.
첫 눈에 반하게 되는 게 꼭 겉모습에서 발하는 후광만이 아닌 것 같다. 그 사람과 대화하는 동안 아무것도 재고 있지 않았다. 그 사람의 웃는 얼굴에, 유머스러운 말투에, 깊은 생각에 , 그냥 빠져들었다. 어쩌면 키도, 귀걸이도 내게 중요한 기준이 아니지 않았을까. 더 크고, 더 반짝이는 걸 봤다.
흑, 그렇다고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아직은!
푸르른 5월이다. 따뜻한 공기에 마음은 절로 여유로워지고, 싱싱한 초록잎들이 뿜는 에너지에 몸이 가벼워졌다. 상민 씨와 영화 보기로 한 날이다.
가볍고 편안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신발장 앞에 섰다. 가지런히 놓여진 낡은 신발이 기다리고 있었다. 7cm의 그 신발. 고민이 됐다. 신발장 밑에 먼지가 얇게 쌓인 분홍색 단화를 번갈아 보았다.
오늘이 정말 마지막 만남이 될까? 에이, 모르겠다.
후후
분홍색 단화를 꺼냈다. 신발에 쌓인 먼지를 불고, 휴지로 쓰윽 닦았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