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써니 Aug 23. 2020

비밀여행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현관문을 닫고 나와 어깨에 걸친 양쪽 가방끈을 꽉 부여잡았다. 그러고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뱉었다. 동네 아이들은 끼리끼리 몰려 학교에 갔다. 나는 아직 함께 팔짱을 끼고 같이 학교에 갈 친구가 없다. 이사 온 지 3개월이 넘었는데도 말이다. 시골에 살다가 도시로 이사 와서인지 높고 화려한 건물도, 하얀 피부와 알록달록 예쁜 옷을 입은 아이들도 아직은 낯설었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내가 누구인지, 학교에 가는 건지 다른 곳에 가는 건지 아무도 관심 없다는 거다. 한마디로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웠다. 난 가방끈을 좀 더 꽉 잡고 발걸음을 재촉해서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22번 버스를 기다렸다.


 이곳에 이사 온 이후 동네 시장보다 더 많이 간 곳이 외할머니댁이다. 외할머니는 버스로 일곱 정거장 떨어진 곳에 혼자 살고 계셨는데, 엄마는 주말에도 가끔 일해서 대신 우리끼리만 보냈다. 나는 나보다 3살 많아 6학년이 된 언니 손을 잡고 주말마다 외할머니댁에 갔다. 처음엔 중학생인 오빠가 함께 갔었는데 오빠는 이제 버스 타는 게 재미없어졌는지 언니랑 나만 보냈다.


언니랑 단둘이 처음에 버스를 탔을 때, 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내리는 문 쪽 옆에 봉을 잡고 섰다. 버스 창밖을 계속 살피면서 여섯 번째 버스정류장을 지나자마자 내림 벨을 눌렀다. 한 정거장 뒤 버스는 멈췄고, 우리는 무사히 내렸다. 언니는 꽉 잡고 있던 내 손을 놓아주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이제 미로 같은 골목길만 빠져나가면 바로 외할머니 집이다.



 22번 버스가 내 앞에 섰다. 오늘은 오빠도 언니도 없이 혼자 버스에 올라탔다. 언니가 했던 것처럼 내리는 문 옆에 서서 봉을 잡았다. 나머지 손을 꽉 잡아주던 언니의 손은 어깨의 가방끈이 대신해주었다. 버스가 멈출 때마다 속으로 정류장을 헤아렸다. 창밖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버스는 여섯 번째 정류장에서 멈춰 사람들을 내려주었다. 나는 문이 닫히자마자 내림 벨을 눌렀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더 긴장되었다. 창밖을 살피고, 내림 벨이 잘 눌러졌는지 다시 한번 보고, 운전기사 아저씨를 쳐다보았다. ‘다음에 내릴 사람 있는 거 잊으면 안 돼요.’라는 눈빛을 운전기사 아저씨에게 쏘았다. 버스는 제대로 멈췄다. 버스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한 정류장이다. 그제야 가방끈을 쥐어짜듯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이제 골목길을 헤쳐나가는 건 식은 죽 먹기다. 내 발은 이 골목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외할머니댁은 골목 끝 집이다. 3층짜리 다가구 주택의 3층이다. 나는 대단한 일을 해낸 것처럼 신나서 3층까지 뛰어 올라갔다. 그런데 막상 문 앞에 서니 문을 두드리기가 두렵다. 오늘은 수요일이고, 학교 수업 시간으로 따지면 1교시가 끝나가는 시간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와있다. ‘외할머니한테 뭐라고 거짓말을 해야 할까?’ 머릿속은 얼음이 되었고, 가슴만 쿵쾅쿵쾅 뛰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외할머니는 근처 들과 산에서 나물을 뜯어 정성껏 손 놀이를 해서 시장에 내다 파는 일을 하셨는데, 이제 막 나물 캐러 나가시는 참이었던 거다.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보고 외할머니는 눈이 동그래지면서 반가워하셨다. 나는 외할머니를 보자마자 “외할머니 보고 싶어서 왔어요.”라고 말했다. 외할머니는 “아이고 고마워라. 잘 왔다.”라고 하시며 집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외할머니는 왜 내가 여기에 왔는지, 학교는 어쩌고 왔는지, 엄마는 아는지, 궁금한 게 많은 눈으로 바라보셨다. 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외할머니는 물 한 컵을 건네주셨다. 물을 마시고 외할머니를 따라나섰다.


 외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시장으로 가셨다. 시장은 이제 막 문을 열기 시작했다. 외할머니는 아동 옷 가게로 들어가셨다. 마음에 드는 옷이 있으면 골라보라고 하셨다. 내가 아무리 평일에 학교도 땡땡이치는 대범한 아이라지만 염치는 있었다. 난 입고 싶은 옷이 없다고 했다. 사실 염치보다 앞선 생각은 새 옷을 입고 집에 가거나 엄마가 모르는 옷이 생긴 걸 알게 되면, 오늘의 일도 알게 될 테고, 그럼 내 종아리는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외할머니의 손을 끌고 가게를 나왔다. 외할머니는 먹을 거라도 사주겠다고 하셨다. 벌써 4교시가 끝나갈 시간쯤 되었는지, 아니면 아침부터 너무 긴장하고 여행한 탓인지 배 속에선 텅 빈 깡통 속에서 춤추는 돌멩이 소리가 났다. 점심 장사를 준비하는 가게들의 냄비는 하얀 김을 내뿜었다. 그 김은 잘 익은 고기만두 냄새를 안고 폴폴 올라와 시장 골목에 퍼트렸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외할머니는 그 소리를 들었는지 만두라도 먹고 가자고 가게로 들어가셨다.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고기만두와 김치만두를 6개나 먹어 치웠다. 외할머니는 미소를 지으시며 물을 건네셨다. 천천히 먹으라는 말도 보태셨다. 만두를 다 먹고 가게를 나섰다. 외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시장 노상에서 장사하는 할머니들에게 인사를 시켜주시고 시장통을 빠져나왔다.


 외할머니와 나는 잠시 아무 말도 안 하고 걸었다. 그러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할머니, 오늘 내가 여기 온 거 엄마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 내일은 학교에 꼭 갈게요.” 이미 외할머니는 내 편이 된 걸 알았다. “알았어, 비밀이야, 대신 내일은 꼭 학교에 가야 해.” 외할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외할머니 집에 도착해서 가방을 가지고 나왔다. 외할머니는 버스정류장까지 함께 가주시고, 22번이 올 때까지 기다려 주셨다.


 버스에 올라타고 아침과 똑같이 내리는 문 쪽으로 가서 봉을 잡았다. 그리고 가방을 잡았던 손은 버스정류장에 서서 나를 보고 계신 외할머니를 향해 흔들었다. 외할머니는 버스가 멀어질 때까지 계속 그곳에서 바라보셨다. 외할머니의 모습이 안 보이기 시작하면서 흔들던 손은 다시 가방끈을 잡았다. 마음속으로 정류장을 헤아리고 일곱 번째 정류장에서 내렸다.   


 동네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들 틈에 껴서 집으로 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