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설이가 새벽 3시부터 깼다. 어제 엄마들과 모임하고 집에 와서 남편과 과메기를 먹는 바람에 12시가 넘어서 잤다. 3시간 자고 깨니 피곤했다. 암만 재워도 안 되어 남편이 예설이 분유 먹이고 난 4시 반 전에 침대에서 나왔다.
평소처럼 자기암시를 외치고 명상 10분, 팔굽혀펴기 10회, 따뜻한 물 한 잔 마시면서 아침 일기 5분을 썼다. 다노의 레젼드 스트레칭 30분을 마치고 수영장으로 향했다. 수영장 앞에 도착해서 잠깐 5분 독서하고 들어갔다. 수영 마치고 집에 도착해서 주차해서 다시 책을 펼쳤는데 이 문구에서 더 읽을 수가 없었다.
“셰이가 요즘 깊이 붙들고 있는 클리셰는 ‘우리는 죽는다’다.
그는 인생은 짧고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스린다.
세네카를 비롯한 철학자들의 글을 노트에 옮기고, 호스피스 병동을 방문하고,
해변의 묘지를 산책하고, 최근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자서전을 읽으며 새로운 사업과 삶을 구상한다.
작은 클리셰 하나가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일상에 불어넣은 것이다.”
‘클리셰’라는 단어도 흥미로웠는데 철학자들의 글을 노트에 옮기고, 호스피스 병동을 방문하고, 묘지를 산책하고, 최근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자서전을 읽는다는 것이 의미 있게 느껴졌다.
이어령 작가님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인터넷으로 이렇게 검색하고 있었다.
“부산 호스피스 병동 자원봉사”
말기 암 환자인 엄마 곁에서 초등학교 6학년인 내가 곁에 있어 봤기에 어떤 심정일지는 간접적으로 조금은 안다. 비전 보드에 호스피스 관련된 것이 적혀 있는 이유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 하는 일을 비전 보드에 적는 것은 하지 않으려고 마음 먹었기에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싶다. 자원봉사자가 되려면 일종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 문구를 여러 번 곱씹지 않을 수가 없다. 오늘, 수십 번 더 곱씹어 보고 싶다.
당신만의 클리셰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