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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돌아보니 그 집에서 산 기억은 꿈이었던 것 같다.

지금 돌아보니 그 집에서 산 기억은 꿈이었던 것 같다.  

우리가 2015년 8월부터 1년 조금 넘게 살았던 곳이다. 그때 우리 가족이 살던 곳은 경기도 근교였다. 우리가 살던 집 뒤에는 10살 된 큰 딸아이와 정상까지 올라가는 데 2시간이 걸릴 정도로 낮지 않은 산이 그림처럼 서 있었다. 집이 있는 단지의 경계가 되는 곳에는 발을 담그면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차가운 계곡이 흐르고 있었다. 봄 무렵부터 그 계곡에서 개구리울음 소리가 작은 배경음으로 들렸다. 그곳은 10가구 정도가 모여 사는 작은 단지다. 그 단지에 주인은 집집마다 월세를 주고 있었는데, 펜션을 하려고 지었다가 허가가 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펜션 단지로 조성된 곳이라 여러 편의시설이 있었다. 공동주방이 있어서, 계곡을 옆에 두고 바비큐 파티를 할 수 있었다. 그 옆에는 입주민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헬스장이 있었다. 내부에는 한쪽 면 전체가 거울로 되어 있었고, 많은 기구들은 아니지만, 런닝머신과 여러 무게의 덤벨과 웨이트트레이닝 기구들이 있었다. 또 나와 죽이 잘 맞았던 주인집 아들은 나의 요청으로 턱걸이를 할 수 있는 풀업바도 마련해 주었다. 그래서 퇴근하고 집에 오면 일주일에 2~3번은 편안하게 운동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집에 살기로 했던 이유는 수영장이었다. 친구의 소개로 처음 그곳을 방문한 때는 7월 말이었다. 태양은 찌는 듯이 내리쬐고 있었고, 아무 기대가 없는 상태에서 단지 입구를 들어갔을 때의 짜증은 그 수영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풀렸다. 물과 수영을 좋아하는 나는 주인에게 들어가도 되는지 허락을 구했고, 된다는 말에 윗옷만 벗고 뛰어들었다. 수영장은 가로 30m, 세로 15m 정도로 제법 컸다. 웬만한 실내수영장보다 약간 더 큰 것 같다. 물이 깊은 곳은 내 목 바로 밑까지 왔고, 낮은 곳에는 아이들이 놀 수 있게 낮은 수심으로 구획이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물 색깔이 너무 영롱하고 아름다웠다. 물에서는 소독약 냄새도 나지 않고 맑고 깨끗했다. 수영장 둘레에는 파라솔과 비치체어가 10개쯤 여유 있게 놓여있었다. 수영장 옆에는 샤워장과 화장실 그리고 각종 편의시설이 있는 바가 있다. 바 한쪽에 있는 커다란 보스 블루투스 스피커에는 제이슨 므라즈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바 내부에는 큰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한쪽에는 얼음이 가득 찬 아이스박스에 맥주가 가득 꽂혀 있었다. 마시고 싶은 마시고 다음에 채워놓으면 된다고 했다. 수영장 옆에는 수영장 크기만큼의 평평한 타일 바닥이 깔려 있었고, 봄이나 가을에 수영을 할 수 없을 때에는 아이들이 인라인스케이트를 탔다. 그 조그마한 광장 옆에는 펜스가 쳐있고 우레탄이 깔린 농구장 겸 풋살장이 있다. 외진 곳에 있고 단지 내에 있어서 이 시설도 입주민 전용이었다. 수영장과 농구장 사이를 가로질러 가면 주차장이 나오고 그 주차장을 지나면 입주자들이 가꿀 수 있는 텃밭이 있다. 밤이 되면 하늘에 별이 반짝인다. 어릴 적 제주에서 봤던 만큼 반짝이지는 않았지만,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긴 했다. 우리집은 3층에 있었는데, 창밖을 보면 물밑에서 나오는 수영장의 영롱한 조명과 산책로의 가로등이 은은하게 길을 비추어 주는 곳이었다. 그렇게 그곳에서 당분간 살기로 했다.


처음 8월 말에 이사를 왔을 때는 연예를 시작할 때 같이 설렜지만, 실상 그곳에서의 일상은 단조로웠다. 나는 아침에 출근하고 퇴근해서는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수영을 했다. 아이들은 아침밥을 먹고 나가면 온종일 뛰어다녔고, 10월까지는 매일 수영을 했다. 아이들은 검게 그을려서 처음에는 동남아인처럼 보이다가 점점 인도를 지나 아프리카 아이들처럼 피부색이 변했다. 아내는 아이들이 물에서 놀 때만 수영장 바에서 자리를 지켰고, 수영장에서 놀지 않을 때면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주말마다 손님들이 와서 아마 두 달 정도는 매주 바비큐 파티를 했던 것 같다. 그렇게 11월이 되고 수영장 물을 뺐다. 시골에서의 겨울은 길고 춥고 적막했다. 날이 춥지 않을 때는 사람들이 왕래가 잦은데, 겨울에는 사람들이 집에만 있었다. 그래도 눈이라도 오는 날에는 또 나가서 눈 장난을 했다. 

이사 온 이듬해 봄에는 텃밭에 가꾸었다. 가지, 오이, 고추, 감자, 토마토, 수박, 상추 등 모종을 사와서 밭을 다듬고 심었다. 천성이 게으른지라 심기만 하고 돌보지는 못해 온갖 잡초가 무성했지만, 때가 되면 수확을 했다. 상품성으로 따지자면 사고 싶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이지만, 우리가 기른 것이라 맛있게 즐길 수 있었다. 4월이 되자 다시 수영장 물을 채웠다. 수영장 물은 4월에 채우고 11월에 뺀다고 한다. 4월에 5일부터 물을 채우는 것을 보았는데, 1주일 정도가 걸린 것 같다. 물차가 몇십대가 오갔고, 그 물값만 천만 원 정도 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설마 했었는데, 그 많은 차들이 오가는 것을 보고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을 채운 다음에도 천연 소금으로 물을 소독하고 정수시스템으로 물을 정화하고, 수영장을 매일 청소하는 것을 보니 나중에라도 수영장을 갖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월부터는 또 물놀이가 시작되었다. 5월에는 낮 2시에서 4시까지 정도 할 수 있었지만, 6월이 되면 밤에도 수영을 할 수가 있었다. 겨울 동안 약간 피부색이 돌아왔던 아이들은 또다시 아프리카 아이들이 되었다. 그다음의 일상은 똑같았다. 나는 출근하고 아이들은 온종일 놀고, 물놀이가 지겨우면 단지를 뛰어다니다가 밥을 먹고 잠을 잤다. 여름이 되자 다시 손님들이 놀러 오기 시작했고, 매주 손님들을 치렀다.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11월에 다시 서울로 오기로 결정이 되자 이곳에서의 하루하루가 다시 소중해졌다. 

우리는 지금 서울에 산다. 아이들은 다시 서울로 오고 나서 한동안 향수병에 빠졌다. 그곳 기억이 떠오를 때면 다시 양평으로 이사가자고 한다. 나도 아내도 꿈처럼 느껴지는 그곳이 그리웠다. 그런데 서울에서의 일상을 살아가니 그곳은 잊혀 갔고, 아이들도 양평집 이야기를 하는 횟수도 줄었다. 이제는 그곳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그곳을 떠날 때는 마치 연인과 헤어지는 것 같은 안타까움과 그리움으로 사무칠 것 같았는데, 이제는 그곳에서의 삶은 꿈처럼 아득하고 담담하다. 아직 1년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삶은 계속되고 또 우리는 적응을 하며 살아간다. 그때의 기억이 소중하지만, 지금의 삶은 또 지금의 삶대로 소중하고 감사하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우리는 그곳에서 새생명을 선물받았고, 몇 일전 넷째 아이가 태어났다. 우리에게는 이곳에서 또 새로운 시작을 한다.   


LIFE GOES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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