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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Oct 17. 2019

내가 우울증과 관련된 잡지를 만든 이유




그래비티라는 영화를 극장에서 다섯 번 넘게 봤다. 광막한 우주 공간에서 헤매며 고투하는 주인공의  체험에 공감이 갔다. 무엇보다 한 장면이 마음 깊숙이 들어왔다. 영화 중반, 주인공은 손상된 소유즈를 타고 중국정거장으로 건너가려  한다. 지구로 귀환할 수 있는 방법은 중국 우주선 셴조를 타는 방법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료가 완전히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인공은 절망에 빠진다.

지구의 어딘가로 구조요청을 보내보지만 묵묵부답일뿐이다. 서서히 줌아웃 하는 카메라는  고장난 소유즈에서 실의에 빠져 소리치는 주인공의 모습을 오래 담아낸다. 다급한 숨소리와 소란스러운 전파음은 갑작스럽게 중단되고  둥그런 창 안의 주인공은 어두운 우주공간 속으로 멀어진다.

살면서 자주 무너졌다. 그럴 때마다 아주 작은 방 안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목소리는 어느 곳에도 닿지 않았고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대체로 소리치고 있었는데도 그랬다.

스물세살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고 다니던 대학을 자퇴했다. 몇 년간 예술대학에서 수업을 듣고 공부를 했지만 완성한 글은 손에 꼽는다.  누군가의 글이 누군가를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끔찍한 느낌을 받았다.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은 괜찮은 사람으로 보였지만  반대의 사람은 인생 전체가 어설퍼보였다. 졸업할 즈음에는 수치로 만신창이가 됐다. 변명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조금은 특이했었다는  것이다.

대학을 다니던 중 군대를 갔다왔다. 복학하고 나서 모든 게 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람들을 만나는 게 힘들었고 친해지는 건 더 어려웠다. 하고 싶은 일에는 재능이 없었고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다. 졸업 후에는 더 심해졌다.

일  년간 어떤 활동도 하지 않았다. 가끔 누군가를 만나기도 했지만 의미가 되진 않았다. 우울증과 사회공포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뒤늦게 알게 된 성인 ADHD 진단에도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가끔 서점을 들러 책을 사 읽었고 주기적으로  병원에 갔다. 늦은 밤 누워 잠에 들려고 하면 살면서 내가 저지른 크고 작은 모든 실수들이 머리 주위를 맴돌며 괴롭혔다. 절박함에  붙잡은 종교에서는 이질적인 나에 대한 혐오감을 느꼈다.



과수면에 빠져 지내던 어느 날 침대에 누워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무슨  병이 있어서가 아니라도 사는 게 쉬운 세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 머리맡에 실패한 과거를 두고 자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을 말하고 기분장애와 조울증을 호소하지만 그럭저럭 잘 살아가는 듯했다.  극복을 말하는 이가 아니라면 힘든 일을 겪은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단지  나만 어두운 방 안에서 썩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분명 나와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이 있을텐데 왜 아무도 보이지 않을까.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사회적으로 수긍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사라진다. 이해될 수 없는 일은 공론화 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자살 소식에서 우리는 이야기가 삭제된 파편적인 사실만을 전해듣는다. 그 안에는 보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개별의 고통들이 있다.

몇 년 후 다시 혼자만의 방 안에서 생각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자고, 어쩌면 곧 사라질지도 모를, 보편으로 전혀 다가갈 길 없는 사람들의 제거된 이야기를 살려보자고. 그래서 잡지를 만들게 됐다.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이야기를 가공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중요한 것은 혼자라고 생각했던 망망한 우주 속에서 다른 누군가 역시 홀로  유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살아남은 혹은 살아남고 있다는 진술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처럼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대답해줄 수 있기를 바랐다. 세상의 모든 것들과 분리된 채로 끔찍한 기억들을 떠다녔던 나에게 말할  수 있었으면 했다. 너 뿐만이 아니라고. 너만 버텨내는 것은 아니라고. 우리 모두 애쓰고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멜랑콜리아는 몇  년 전 내가 던진 질문에 대한 늦은 답변이기도 하다.

지금 방안에 홀로인 사람이 있다면 내 답변을 전해주고 싶다. 그들의 말을 듣고 싶다. 그리고 함께 깨닫고 싶다. 우리가 연대할 수 없다고 해도, 우리가 같이 행복할 수 없다고 해도 적어도 말을 건넬 수는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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