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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가야 철든다고?

by 멜랑콜리너마저


1.

군대를 다녀와야지만 비로소 남자가, 어른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다 개소리.



2.

그 말 뒤에 숨은 진실은, 군대를 다녀오면 결국 한국 사회의 틀에 나를 끼워 맞추기가 용이해진다는 것뿐이다. 18개월의 시간이 한국 특유의 위계질서와 집단주의 문화에 적응할 수 있는 인간의 몸과 정신으로 ‘개조’되는 데 소모된다.


‘나다싶’. 군필자라면 매우 익숙할 단어다. 직장 회식자리에서 술이나 셀프 반찬이 떨어졌을 때, 가까운 사람이 가져오면 그만일 일을 굳이 누가 가장 어린 지 ‘짬’이 낮은 지 눈치 보고 움직이는 분위기. 이런 감각을 배우는 곳이 군대다. 남초 집단일수록 이 공기의 농도가 짙은 경향이 있다.



3.

전역 이후 여러 알바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군대에서 배운 말과 행동이 튀어나오곤 했다. 그럴 때면 막 어른이 된 것 같고 그랬는데, 돌아보니 이와 ‘어른스럽다’라는 것은 별개인 것 같다. 단지 이 위계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개조된 형질이 발현된 것에 불과하다.


한국에서 태어났고 이민을 갈 게 아니라면, 결국 이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기에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는 걸까.


다만 이렇게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에 대한 최소한의 인지는 필요하다고 보는데, 일말의 인식 없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분위기는 문제다.


당연한 걸 당연하게만 여기고 살면 그 당연함을 만든 그 무언가의 꼭두각시가 되기 마련이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4.

내가 느끼는 군대는,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소위 말하는 ‘이찍남’, ‘이대남’, ‘한남’ 등등(그게 무엇이라 불리든)의 양산소다.


군 복무를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라는 구호를 수십 번 넘게 들었을 것이다. 자연스레 북한은 혐오의 대상이 되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보수당과 언론의 공작에 동화된다. 평화나 남북 관계 개선을 이야기하는 진보 정부에 대한 거부감으로도 이어진다. 특정 말을 반복해서 귀에 들려주는 방식은 ‘가스라이팅’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남자들끼리만 모여있어서 그런지 여성을 대상화하는 대화나 농담도 아무렇지 않게 자주 오간다. 어디까지나 모든 건 내 경험에서, 내가 보고 들은 실제 현상으로부터 나온다.


젊은 남성의 극우화에 군대가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본다. 고등학교 동창 대부분이 이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이제는 더 이상 놀랍지 않다. 내가 ‘남자의 세계’와 잘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게 주위에 이런 사람들밖에 없기 때문인 걸지도 모르겠다.



5.

나와 군번이 한달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지금 팀의 막내는 군대식 버릇이 ‘아직도’ 몸에 배어 있다. “이런 건 주임 따리가 해야죠”, “아직 그런 거 할 짬이 아니죠” 같은 말을 자주 내뱉는다.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 의도적으로 가면을 쓰고 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튀어 나오는 말 같다. 특정 언어를 습관처럼 각인시킨 어떤 구조의 존재라...


또, 내 맞선임은 우연히도 고등학교 때 꽤나 친했던 친구였다. 그 때문에 군생활이 나름 편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지금은 연락을 안 하지만, 그는 자의인지 타의인지 후임병들을 잡는 역할을 자처하며 군생활 내내 ‘이게 맞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었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가끔 인스스 올리는 거 보면 아마 그럴 가능성이 커 보인다. 고등학생 시절 점심시간마다 같이 족구도 하고 노래방도 다녔던 순수한 친구였는데 안타깝다.


어떻게 보면 군대식 위계 문화에 희생된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대신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데 큰 무리는 없을 거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이준석 키즈’들이 무럭무럭 생성되고 있다.



6.

군대의 장점을 굳이 찾아보자면, 스마트폰의 도파민 중독에서 벗어난 생각할 시간이 많다는 점이다. 이 외에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이 사회에 부합하는 정신으로 개조된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장점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이 시간을 잘만 활용하면 어차피 가야 하는 군대가 단순히 시간 낭비로만 끝나지는 않을 거라 믿는다. 자신을 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다.



7.

그럼 철든다는 것, 어른스럽다는 것은 무엇일까? 오은영 박사의 말로 단번에 정리가 가능할 듯 싶은데, 육아의 가장 큰 목적은 ‘아이를 독립시키는 것’이다. 육체적인 독립을 넘어, 정신적인 독립. 그야말로 한 ‘개인’이 되는 것. 엄마 아빠가 나의 부모가 아니라 욕망과 상처, 모순을 지닌 하나의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많은 부모들은 (특히 대도시에 사는 가정일수록) ‘다 너가 잘 되라고 그러는 거야’라는 말로 자신들의 불안과 욕망을 아이에게 투영한다. 아이는 생존을 위한 그 발버둥을 자신의 의지로, 부모의 기대를 사랑으로 착각한다. 그렇게 길들여져 서열과 경쟁의 질서를 내면화한다. 이런 양상이 점점 익숙해지고 당연시 여겨진다. ‘4등’이라는 영화를 보면 이런 문제가 잘 드러나 있다.



8.

단순히 부모만의 잘못이라고 보긴 어렵다. 그들 역시 거대한 사회 시스템 속에서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으니까. 파이는 작고 남들은 다 앞서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 자식이 도태될까 불안하니까.


아이는 자라서 또 다른 누군가의 부모가 되고, 악순환은 계속된다. 결국 바꿔야 하는 것은 욕망을 부추기고 인간성을 갉아먹는 사회 구조, 시스템 그 자체가 아닐까.


이 시스템 역시 누군가에 의해 유지된다. 모든 것을 구조의 탓으로만 돌린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그 구조의 일부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항상 질문을 던지고, 의심하고, 때로는 불편함을 감수하며 말을 걸어보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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