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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택트와 이터널 선샤인, 그리고 카레닌의 미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영화

by 멜랑콜리너마저


1.

영화 ‘컨택트(Arrival)’에서 루이즈는 외계 종족 ‘헵타 포드’와의 접촉 후 앞과 뒤, 미래와 과거가 동시에 존재하는 원형의 언어를 배우면서 시간에 대한 인식과 사고방식이 변화하게 된다. 언어는 곧 존재다. 내가 쓰는 말과 글이 나다.


루이즈는 미래에 벌어질 일, 딸이 태어나고 병으로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이를 갖기로 결심한다. ‘삶이 비극이라고 해서 그 자체를 부정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드니 빌뇌브는 조용히 ‘아니’라고 답한 셈이다.


그 끝이 비극이라고 해서, 삶 전체를 포기한다면 하루하루, 순간순간 행복한(할) 나날들까지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므로. 때문에 그는 아이가 존재하는 모든 순간들을 더욱 사랑할 것이다.


최근에 김혜리의 필름클럽 컨택트 편을 듣고, 반려동물을 입양하는 우리의 마음을 루이즈의 선택에 비유한 부분에서 크게 공감했다.


우리는 매우 높은 확률로 우리보다 먼저 무지개 다리를 건너게 될 존재와 함께하기를 선택한다. (딸의 죽음과 반려동물의 이별 사이에 경중의 차이는 있겠으나) 심지어 그 이전에 함께하던 생명과의 가슴 아픈 이별을 경험한 후에도 말이다. 어쩌면 모든 반려인은 이미 루이즈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2.

말로 표현하지 못할 고통과 슬픔을 알면서도 모든 순간을 사랑하고자 하는 자세. ‘이터널 선샤인’에도 이와 비슷한 태도가 있다.


서로에게 큰 상처를 주고 이별한 클레멘타인과 조엘은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한다. 그 과정에서 조엘은 고통스러웠던 기억조차도 둘이 함께했던 소중한 순간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 애초에 기쁘고 행복하기만 한 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기는 할까.


그렇게 영화의 마지막, 다시 만나게 되는 둘. 서로의 상처와 실망을, 그 때문에 아플 거라는 사실을 앎에도 ‘그래도’ 다시 한번 사랑해 보겠다는 용기.




컨택트와 이터널 선샤인은 모두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겠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겠다는 것.




3.

마지막으로 ‘카레닌’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테레자와 토마시의 반려견 이름이다. 그는 시간을 직선적으로 인식하는 인간과 달리 시간을 원형적으로 인식한다.


그야 모든 개들이 그렇다.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매 순간을 그저 있는 그대로 산다. 하루의 시작은 태어남이고, 하루의 끝은 죽음이다.


우리 집 반려견 마루만 보아도 그렇다. 매일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부모님을 볼 때마다 매번 처음 만난 것처럼 기뻐하고, 밤이 되어 잠이 들 때는 평생을 다 산 것처럼 평온하다. 오늘 하루를,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낸다. 이런 점에서 세상의 모든 개는 ‘컨택트’의 헵타포드와 닮았고, 이런 점을 나도 본받고 싶다.



견(犬)생에서, 인(人)생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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