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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에 대해

by 멜랑콜리너마저


1.

저번 달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났을 때였다. 인턴 끝나면 뭐 할 거냐는 질문에 또 여행 갈 생각이라고 말하자, “또 가?” 그러면서 하는 말, “야, 돈도 많다..”.



2.

어떻게 보면 그 말이 당연하다. 내가 여행 때마다 SNS에 올린 것만 보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자연스럽다. 내 고독과 구슬픔은 배제하고 근사한 풍경과 맛있는 음식 사진을 골라서 올렸으니까. 그게 여행의 전부는 아닌데도, 여행이란 단어가 상징하는 이미지와 합쳐지면서 결국 ‘여유롭고 풍족한 삶’처럼 비치기 마련이니까. 그들은 내가 보여주는 것밖에는 보지 못했으니까. 내 일거수일투족을 하나하나 다 관찰하지 않았으니까.


관객은 감독이 선택해서 보여주는 이미지만을 볼 뿐.



3.

최근에 인스타인가 어디서 이런 말을 본 적이 있다. “유럽 여행을 1, 2주 가려면 최소 천만원은 들고 가야 한다.”


그런데 놀라지 마시라. 나는 이탈리아에 한달 다녀오는데 오백도 안 썼다. 그러니까 위의 말은 틀렸다. 아니면 이렇게 고쳐야 맞을 것이다. ‘유럽여행 가려면’을 ‘호화롭고 편한 유럽 여행 가려면’으로.



4.

여행 할 때 ‘꼭 써야 하는 돈’ 같은 게 있을까? 당연히 있다. 일단 그곳까지 가야 하니 비행기 값, 지친 몸을 쉬어야 하니 숙박 비용, 안 먹으면 죽으니까 식비, 거기에 쇼핑까지. 다만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어떤 비행기를 타고, 어디서 자고, 무얼 먹는지에 따라 드는 돈은 천차만별이다.



5.

요즘 사람들의 ‘여행’이라는 말에는 ‘호화로운 휴양’이라는 말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여행 브이로그에서) 종종 듣는 말이 있다. 바로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조식 뷔페 나오는 호텔에서 자봐야지’와 같은 식의.


그런데 이 문장의 ‘호텔’ 자리에 ‘게스트 하우스’를 넣으면 어색한가? 오히려 더 자연스럽지 않나? 언제 또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과 함께 부대끼며 묵는 경험을 해보겠는가? 물론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 다르니.



5.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이런 마인드가 탑재되어 있는 듯하다. 그렇게 느낀 이유는, 단순히 내 경험에서 온다. 저렴한 호스텔에서 만난 대부분의 여행자는 서구권 젊은이들이었고, 지금까지 한국인은 딱 한번 봤다. 길거리에는 자기 몸집만한 배낭을 짊어지고 다니는 젊은 서양 여성들이 흔히 보이는 반면 동양, 특히 한국인들은 예쁜 옷을 입고 캐리어를 끌고 다닌다.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내가 내 시각으로 관찰하고 체감한 현상이다. 이러한 차이가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서 오는 것인지 단정할 순 없지만, 여행에 대한 관점 차이가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6.

‘여행은 돈 쓰러 가는 것’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다만 그게 여행의 전부는 아니다. 적어도 내게 있어 더 중요한 건 경험이다. 물론 나도 편한 곳에서 자고 싶고 매일 레스토랑 가고 싶지. 돈이 없는 걸 어찌하랴! 처음에 언급한 고등학교 친구들 같은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라면 여행을 가지 않는 쪽을 택한 거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겠지. 홍상수 영화 중에 이런 제목이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7.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떠난다. 내게 있어 여행은 돈 쓰러 가는 일이 아니니까. 최소한의 돈만 있으면 어떻게든 가는 방법은 있으니까. 이건 개인의 선택의 문제고, 그에 따르는 책임도 본인이 져야 한다. 나처럼 여행하려면 그만큼 각오를 해야 하긴 한다는 말이다.


나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호텔이나 택시를 이용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숙소의 9할은 싸구려 호스텔이었고 나머지는 에어비앤비다. 시내에선 웬만하면 걸어 다녔고, 이러다 죽겠다 싶을 때만 버스나 전철을 탔다. 레스토랑이나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일반 음식점조차 중부 유럽 여행 당시는 하루에 한번 꼴로, 심지어 이탈리아에선 거의 안 갔다. 대신 마트에서 빵을 사 먹거나 맥도날드 같은 패스트푸드, 샌드위치 같은 길거리 음식으로 대충 해결했다. 음식점에서 음료 없이 밥만 먹고 나와 근처 마트에서 병맥주를 따로 사 마신 적도 많다.


내가 봐도 좀 심하다 싶을 때가 있고, 스스로 초라하게 느껴질 때도 많다. 이게 쌓이고 쌓여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하며 눈물이 터질 때도 있었다. 이렇게 절망의 수렁으로 나를 던져버리면 생각지도 못한 또다른 내가 나오기도 한다. 정말로 혼자이기 때문에, 이 세계를 홀로 마주한 단독자이자 이방인이기 때문에, 또 동시에 모든 걸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혼자 가지 않으면 불가능한 여행이다. 그렇게 ‘나’라는 복잡한 존재를 더 깊이 들여다봤다.


그래도 보고 싶은 거 다 보고, 먹고 싶은 것도 다 먹어보고 왔다. 유명 미술관이나 관광지는 물론 그 도시의 대표 음식도 (매일 세끼까지는 먹지 못했다 뿐이지) 다 먹어봤다.



8.

제아무리 아낀다고 해도 유럽 여행을 하려면 당연히 큰 돈이 든다. 그럼 나는 무슨 돈으로? 별 게 없다. 평소 다른 데 돈을 많이 안 쓴다. 오마카세는 태어나서 딱 한번 가봤고, 비싼 카페도 자주 안 간다. 술을 자주 먹는 것도 아니고, 쇼핑을 즐겨 하지도 않는다. 기껏해야 가끔 장 보고 책 사고 극장 가는 정도.


이동진이 한 말 중에 공감가는 말이 있다. (젠장 또 이동진이야?) 결국 돈과 시간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가 결국 ‘나’다. 입으로는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영화 보는 덴 돈과 시간을 많이 안 쓰고 술 먹고 노는 데만 쓴다면 그 사람은 정말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일까?


+)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책 볼 시간은 없으면서 쇼츠, 릴스 보고 술 마시러 다닐 시간은 있나?


그래서 내가 여행 다니는 걸 보는 친구들이 하는 ‘나도 가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못 가’라는 말은 모순이나 거짓말처럼 들린다. ‘너희들은 그 돈을 다른 데 쓰잖아’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 돈을 모아서 호텔에서 안 자고 레스토랑 안 가고 택시 안 타면 누구나 다 갈 수 있어’라고도. 아니 실제로 이렇게 말하긴 한다.



9.

돈보다 더 큰 장벽은 시간인 것 같다. 흔히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돈은 어떻게든 모을 수 있지만 시간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지금 이 시기에, 길게 떠날 수 있는 이 시간이 소중하다. 언젠가 돈은 더 많아지겠지만, 이만큼의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을 테니까.








10.

이건 어디까지나 내 방식일 뿐이다. 이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라 이런 방법도 있다는 이야기다. 누군가에겐 호텔에서 푹 쉬는 여행이 더 소중할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여행 자체가 필요 없는 일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각자의 선택이고, 그 선택엔 책임이 따른다는 점이다. 나도 불확실성과 고독과 고통을 감수할 각오가 돼 있었기에 그런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거다. 모든 사람이 나처럼 할 필요도 없고, 할 이유도 없다.


작년 여름, 베네치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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