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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어딘가

25. 04 월간 시네마

by 멜랑콜리너마저


1.

<택시 드라이버>, 마틴 스코시즈 (1976)


영화를 본격적으로 마구 보기 시작한 재작년 가을로부터도 삼년 전쯤, 아주 오래전에 한번 봤었다. 본지가 너무나 오래되었기 때문에 (또 그간 과도하게 영화를 봤기 때문에) 기억 나는 거라곤 후반부의 피칠갑뿐이었다. 다시 보니, 위플래쉬처럼 보이지 않던 것이 꽤나 보였다.


먼저 스코세이지 감독이 직접 등장한다는 사실. 30대의 젊은 시절이지만 단번에 알아봤다. 트래비스가 점점 폭력으로 물들어가는 단초를 제공하는, 나름 중요한 역할.. 후반부의 총격 장면은 눈을 가려가면서 힘겹게 봤던 거 같은데 지금 보니 ‘이 정도 쯤이야’다.


해석이나 상징 이런 이야기는 인터넷 찾아보면 많이 나오니까, 개인적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써볼까 한다.


어느 금요일 6시 땡 퇴근하자마자 헐레벌떡 메가박스로 향했다. 저녁 먹을 시간이 없을 것 같아 극장에서 먹으려고 챙겨온 두유와 초코바와 함께.. 예매할 때만 해도 나 말고도 두자리가 더 있었는데 극장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다 취소하고 어디 놀러갔나 보다.. 멀티플렉스 대관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심지어 ‘고독’의 끝판왕 같은 영화 택시 드라이버를 보며..


극중 로버트 드 니로가 혼자 극장에서 포르노 영화를 보는 장면이 두 번 나오는데, 그 두 장면에서 이상하게도 눈물이 날 거 같았다. 사실 눈에 조금 맺혔더랬다. 내 운명과도 같은 외로움-나쁘다는 게 아니라-이 어떤 임계점을 넘는 순간이었달까…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끝나고 밤거리를 걷는데 트래비스가 된 기분이었다. 문득 차에 치이고 싶단 생각도 들었다. 나도 그처럼 신체 단련을 해볼까..? 싶기도. (호호) 우리나라에선 총을 못구하니까 패스. 심지어 그날 입었던 옷도 주인공과 비슷한 베이지색 자켓이었다.


당시 미국의 기득권 카르텔은 이 영화를 무지 싫어했을 것 같다. 환상과 낭만의 도시 뉴욕을 황폐와 우울의 끝으로 그려냈기 때문에. 5, 60년대 미국 중산층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너도 할 수 있어’ 식의 아메리칸 드림을 앞세워 환상을 심어온 기득권과 미디어. 이에 반기를 들듯 스코시즈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도시에서 파괴되어 가는 이 친구를 한번 보라고, 우리의 뒤통수를 한 방 후려치고 싶었던 것 같다. 확실히 걸작은 걸작이다.









2.

<더 헌트>, 토마스 빈터베르크 (2012)


분명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그 인과관계와 상관없이 재앙이 나에게 닥친다. 심지어 그 원인은 '순수의 표상'인 어린 아이. 코엔 형제의 '시리어스 맨'이 떠오르기도. 클라라의 부모가 아이를 제대로 돌봤더라면, 그녀의 정신이 불안정하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오빠가 몹쓸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현대판 마녀사냥. 공동체의 이면에 숨은 잔학성. 인간의 본성.


영화 후반, 주인공의 억울함과 고통이 극에 달한 성당 장면에서 매즈 미켈슨이 스윽 총을 꺼내 존윅처럼 공동체 일원을 다 쏴죽이는 상상을 해보았다.^^


무엇보다 다 끝난 줄 알았던 비극이 다시 얼굴을 드리우는 결말(라스트 신을 포함해 우리를 깜짝 놀래키는 장면이 몇 차례 나온다)은, 아직도 몸을 얼얼하게 만든다.








3.

<레토>,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2018)


과거를 떠올리는 일은 언제나 현재를 파괴하는 일. 소비에트 말기의 록 신scene을 향한 열망을 과거형으로 기록하면서도, 그 열망이 현실과 충돌하는 과정을 냉소하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흑백화면은 모든 감정을 앗아 가는 듯하면서도, 남은 잔열만큼은 고스란히 스며든다. 시대는 허락하지 않았고, 그들은 결국 지나가버렸지만, ‘그 여름은 진짜였다’는 문장은 끝내 지워지지 않는다.







4.

<방랑자>, 아녜스 바르다 (1985)


타인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채 영영 혼자 살 수 있을까. 절대 자유는 곧 절대 고독이니. 결국에 이르게 되는 종착지는 파멸 뿐. 문득 내 미래 같기도 하면서..


배낭을 메고 타국의 땅을 혼자 쓸쓸히 걸어다닐 때의 나를 보는 것 같아 공감이 되었다(하기야 모나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심지어는 얼굴까지 나를 닮은 것 같아서.. 죽음까지의 과정을 따라가는 플롯이라는 점에서는 '시민 케인'이 생각났다.







5.

<퍼스트 카우>, 켈리 라이카트 (2019)


켈리 라이카트만의 조심스럽고도 섬세한 터치가 묻은 정적인 아름다움이 마음을 은은하게 울린다. 서부영화라고 다 장대해야 하는가. 작고 느린 것만의 미학. 극적인 갈등보다 자연의 리듬과 같은 정적과 여백의 활용이 탁월하다. 엔딩의 적막도 좋았지만 오프닝의 그것 역시 잊을 수 없다.







6.

<자전거 탄 소년>, 장 피에르 다르덴/뤽 다르덴 (2011)


이 얼마만에 만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엔딩인지! 포스터 속 장면인 시릴과 아만다가 경찰서를 다녀온 후 함께 자전거를 타는 신에서 이제 끝나겠구나.. 했다. 그러나 역시 다르덴은 관객이 예상할 만한 지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나무에서 떨어진 시릴이 조용히 일어나는 장면에선 닭똥 같은 눈물이 똑 떨어졌다.


중요한 장면마다 네번 정도 반복해서 흐르는 베토벤의 음악도 큰 역할을 한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넘어 구원에 관한 영화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 세상의 어딘가에선.







7.

<그을린 사랑>, 드니 빌뇌브 (2010)


엔딩에서야 타이틀이 뜨며 되살아나는 강렬한 오프닝. 잊을 만하면 절규하듯 읊조리는 톰 요크의 익숙한 목소리. 131분의 러닝타임이 빠르게 흘렀다고 느껴지도록 하는 과거와 현재의 교차 구조는 진실의 무게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끝내 도달한 진실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는 관객들. '알아야 할 권리'와 '알아버린 후의 고통' 사이의 딜레마. 때론 모르는 게 약일 때도. 그는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그의 얼굴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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