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γνῶθι σεαυτόν!

너 자신을 알라!

by 멜랑콜리너마저


"내가 첫번째 관객이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찍는다."




봉준호 감독이 어디선가 했던 말이다.


이처럼 인생도 자기만족의 연속이다.(인 것 같다)


왜냐


어차피 세상엔 내.마.음.대.로.되.는.게.생.각.보.다.많.이.없.기.때.문.이.다.





1.

우연, 유전자(본능이나 욕망), 환경, 사회구조, 무의식, 호르몬... 수많은 인자가 얽히고 설켜 개개인에게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것들에 의해 역사의 바퀴는 우리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굴러간다. 뜻하지 않은, 예상치 못한 우연이 늘 우리를 따라다닌다. 이런 세계에서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내 마음밖에 없다.


지금 이 순간 브런치에 글을 쓰는 행위로 예를 들어보면, 누군가의 공감과 댓글을 목표로 글을 쓴다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꼭 그렇다기보다 자신의 행복을 확률에 맡기는 셈이다. (좋은) 댓글이 달리면 당연히 기분이 좋겠지만,


반대로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도 있다. 이건 내 통제를 벗어난 일이다.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외부 반응에 따라 일상의 기분이 좌지우지된다면, 그것만큼 허망한 일이 또 없다.


(이렇게 반문이 가능하다. 평소 이웃들과 잘 지내는 등 본인이 스스로 노력하면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지만, 입력값(노력)과 출력값(결과)이 항상 일대일 대응으로 비례하진 않는다. 위플래쉬 글에도 썼듯이 나는 결코 노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노력만능주의가 싫을 뿐이다.)


첫번째로 중요한 건 내가 이 글을 작성했고, 업로드했으며, 순간의 생각과 감정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데서 오는 '자기만족'이다. 누군가 내가 쓴 걸 보고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 다음 문제다. 사소한 예시이지만, 거의 모든 일에 적용 가능하다.


물론 자기만족만을 좇으며 살 순 없다. 인간은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기에. 내가 스스로 만족하는 삶과 타인에게 보여지는 삶 사이의 '균형'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 현대사회는 지나치게 남들에게 '보여지는 것'에만 집착하는, 그러니까 그 '균형'이라는게 붕괴된 경향이 내겐 보인다.



이 기울어진 균형을 지금 한국 정치에 비유할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에) 국민의힘은 파시즘에 가까운 극우 정당이고 민주당이 보수 정당인데, 일반적으로 국민의힘을 보수, 민주당을 진보로 묘사하는 것과 비슷하다. 심지어 이재명 본인은 자신을 보수라고 정의하는데도, 일부에서는 그를 종북 좌파라고 한다. 그렇게 해야 자신들의 파시스트적인 행태가 가려지기 때문.


아무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조건에 따라 행복의 유무가 결정된다면, 불안은 점차 영혼을 잠식해나갈 수밖에 없다. 내 삶은 내 것이 아니게 된다.




타일러가 요즘 한국의 젊은층이 심히 걱정된다고 하는 대목을 보고 뼛속까지 공감했다.

https://youtube.com/shorts/KNUtW9BQaEQ?si=E6ni2hYft45UfFFt


그럼 내 삶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너 자신을 알라(γνῶθι σεαυτόν).'


2.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에 슬퍼하고 화가 나는지, 내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또 추하고 악한 면은 무엇인지...


그러니까 '나'라는 인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면, 훗날 후회할 선택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사회가 정해준, 남들이 다 가는 길을 따라갈 확률 역시 높다. 그 길을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라 착각한 채 말이다. 고등학교 때 내가 그랬다.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그걸 좋아한다고 믿었다. 무엇보다 앞서 말한 ‘자기만족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전제조건이다.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내린 결정이 과연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단순히 여러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른다고 하여 그게 자유의지의 발현이 결코 아니다. 그건 습관이고, 복종일뿐이다.



"자유라는 허상."


자기 인식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자유의지의 범위도 확장된다. 이는 내가 혼자 여행을 떠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랑 더 친해지기 위해,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


"너 자신을 알라"던 소크라테스가 지금 이 시대를, 특히 한국 사회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하고 반응을 보일까. 아마 되살아난 소크라테스를 두번 죽이려 들거다. 역사는 반복된다.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


3.

'양심'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다. '자기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 타인이나 법과 질서가 이래라 저래라 하기 전에 내가 나를 심판하는, 내 마음 어딘가에 살고 있는, 나만 알고 있는 법관.


아무도 없는 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려 할 때 어딘가 쿡 찔리는 느낌. 불의와 부조리를 목도할 때 본능적으로 드는 저항심같은 것들.


양심은 우리가 행동을 선택할 때의 기준이 된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 혹은 그 행동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에 대한 걱정보다, 내가 한 행동의 이유가 무엇인지, 그 선택을 했을 때의 내 마음이 편한지가 더 중요하다. 결국 또 ‘자기 만족’인 것이다.


https://youtube.com/shorts/sUogEk7rlLs?si=l8JE3H9T8cqVtMZb

유시민 작가의 말처럼 벌 받을까봐, 누가 손가락질 할까봐 착한 일을 하는게 아니다. 그냥 내 마음이 편하려고, 스스로 만족하려고 하는거다.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아니!


의미는 내가 스스로 만드는 거고,

내가 나를 알아주는 것부터가 출발이다.


고독의 무게를 견디는 자만이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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