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나는 꽤나 만화에 심취해 있는 청소년이었다. 처음엔 국내 작가들의 순정만화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소년소녀 가리지 않는 장르와 일본 만화까지.
전 세계의 콘텐츠가 공유되고 소비되는 현재에 살고 있는 청소년들은 믿을 수 없겠지만, 당시만 해도 우리 나라에는 일본 대중문화가 금기시되고 있었다. 영화나 음악은 전면 금지였고, 만화의 경우 일부 정식 발매되기도 했지만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는 작품이 많았고, 그러다보니 소위 '해적판'이라는 만화 콘텐츠들이 판을 쳤다.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지금은 누구나 다 아는 만화 <꽃보다 남자>는 <오렌지 보이>였고, 배우 이민호가 연기해서 유명해진 극 중 주인공 츠카사는 당시 우리에겐 황보명이었다. 금지되었던 일본 대중문화는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시대에 이르러서야 개방되었다. 우리의 황보명은 이제 츠카사가 되었다.
일본 만화에서 시작된 일본 문화에 대한 관심은 음악으로까지 이어졌다. 당시 내가 좋아했던 뮤지션은 X-Japan과 L'Arc~en~Ciel. 물론, 그들의 음악도 당시엔 정식 수입되지 않아서 불법 복제 CD를 지하상가의 어두운 음반점에서 구입해야 했다. PC 통신을 통해 다운받은 노래 가사와 번역본을 프린트해서 정확하지도 않은 일본어 발음으로 통째로 외우며 따라 부르곤 했던 나의 청소년기.
그 취향은 범위를 넓혀가며 20대까지도 지속됐지만 결혼 후 스멀스멀 사라졌다. 만화와 음악보다는 당장 내 앞에 떨어진 아이들을 돌보느라 바빴으니까. 만화도 음악도 그렇게 잊고 지냈다. 우연히 책을 보다 스페인 화가 고야의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를 보기 전까진.
18세기 후반의 스페인 궁정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는 다소 충격적인 작품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인물을 그린 것이지만 마치 사람을 잡아먹는 거인처럼 느껴지는 이 작품과 연관된 컨텐츠가 꼬리를 타고 연결되며 일본의 유명 만화 <진격의 거인>으로 이어졌다.
한 때 많은 방송에서 자주 등장했던 ‘진격의 ㅇㅇ’ 이라는 문구의 시작인 일본의 만화 <진격의 거인>. 어느 날 갑자기 정체 불명의 거인들이 등장해 사람들을 잡아먹기 시작한다는 파격적인 설정 때문에 연재 초기 화제가 되었지만, 나는 정작 그 때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우연히 연결된 고리에, 살짝 들여다볼까, 라며 시작하고선 완전히 빨려들어갔다. 이 그로테스크한 비쥬얼은 내 취향이 절!대! 아니었지만, 상상할 수 없었던 세계관과 묻혀있는 비밀이 밝혀질 때의 재미, 앞으로의 스토리 전개가 너무 궁금해서 멈출 수가 없었다.
청소년 시기의 그 시절처럼 밤새 만화책과 TV 시리즈를 몰아 보았다. 전국에 4개 밖에 없는 4D 개봉관을 찾아서 아이들이 학교 간 사이에 왕복 두 시간 반을 들여 보고 오기도 했다. 상영 시간에 늦을까 헐레벌떡 뛰어가는 내 모습이 웃겨서 숨을 헐떡이면서도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진격의 거인>, 이게 뭐라고...
그런데 한편으로 학창 시절의 내가 떠올라 즐거웠던 것도 사실이다. 잊고 지내던 나의 취향이 깨어났다. 옛날의 나를 만나 반가웠다. 10대 그 시절의 모습이 내 몸 한 구석에서 다시 움트기 시작했다.
요즘 드라마가 시즌제로 나오는 것처럼 일본의 많은 애니메이션의 TV시리즈도 시즌제로 방영된다. 1,2기를 다 보고 3기를 시작할 차례. 빠른 템포로 흘러나오던 1,2기의 오프닝 곡과는 달리 잔잔한 멜로디와 함께 노래가 시작되었다. ‘어라? 잠깐만... 이 목소리, 내가 아는 목소리 같은데..?’ 생각하며 계속 보고 있는데, 오프닝 영상의 타이틀을 보고 두 눈을 다시 크게 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프닝 타이틀 Red Swan
곡 : YOSHIKI feat. HYDE
YOSHIKI ?? HYDE ??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다 싶더니만, 내가 청소년기에 좋아했던 L'Arc~en~Ciel의 하이도와 X-Japan의 리더 요시키가 함께 작업한 곡이었다. 한 때는 왕성한 활동을 했던 뮤지션들이지만, 이제는 이제는 활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아직도 활동하고 있다니…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내가 한때 애정했던 이름을 다시 만나 반가운 감정도 컸지만, 나는 그들이 아직까지도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 감동적이었다. 8,90년에 활동을 시작한 X-Japan과 L'Arc~en~Ciel이 2,30년이 넘도록 건재하다고? 50이 넘은 나이에도 끊임없는 에너지로 활동하고 있다고? 계속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물론 그들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세계 각국에도 오랜 시간 계속 활동하고 있는 뮤지션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에 더 마음이 움직였던 것은 그들을 좋아했던 10대의 내가 떠올라서일 거다. 어린 시절의 내가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되기까지의 긴 시간 동안, 이제는 더이상 활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의 꾸준함은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너도 우리처럼 꾸준히, 이 정도쯤은 해봐야지.’
1, 2년도 길게 느껴지는데 하물며, 2, 30년은 오죽할까… 그 일을 그만둘 수 있는 수많은 이유가 계속 찾아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마음을 다잡아야 할까… 알아봐주는 사람이 예전보다 적어졌어도 그 오랜시간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계속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대단한 일인지, 나는 그 꾸준함이 숭고하게 느껴졌다. 그 힘은 무엇일까? 어쩌면 다른 생각은 없이 그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해왔을 뿐인 건 아닐까?
생각해보면,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인 <진격의 거인>도 그렇다. 만화를 보지 않는 사람도 '진격의 거인' 이라는 이름은 들어봤을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킨 시작이 있었지만 그 열기는 곧 사그라들었다. 팬이 아니라면 연재가 계속되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내가 작가라면, 한 회, 한 회 연재하면서 과연 이 작품을 끝내는 날이 올까? 라고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았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런 시간이 쌓여서 이 작품은 연재 12년만에 끝을 맺었다. 2,30년 음악을 해온 요시키와 하이도도 그랬을 것이다. 중간에 멈춘 시간은 있었지만, 결국 하루 하루 해오다보니, 그러니까 대단한 뮤지션이 되겠다는 거창한 계획보다는, 그저 하다보니 어쩌다보니(?) 이렇게 오랜 시간 지속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 사이에서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답답한 시간들이 많았다. 그들을 보니, 나도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무언가가 되려는 거창한 목표 말고, 그 목적과 결과물을 생각하지 말고, 결국 지속적으로 꾸준히 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그저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 뿐이라고.
어쩌면 그것이 삶의 전부인 것은 아닐까.
<진격의 거인>, 이시야마 하지메
어느 날 갑자기 정체 불명의 거인들이 등장해 사람들을 잡아먹기 시작한다. 식인하는 거인들에게 이유 없이 잡아먹히는 위기에 처한 인류는 삼중의 벽을 세워 그 안에서 생활하게 된다. 갇힌 상태이긴 하지만 나름의 평화를 유지하며 100여 년을 지내왔는데, 돌연 나타난 초대형 거인이 벽에 구멍을 낸다. 벽에 생긴 구멍으로 거인들이 들어오고 다시 사람들을 잡아먹기 시작해 인류의 평화가 무너졌다.
이 거인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인류는 조사병단을 꾸리고 거인에 맞서는 과정에서 극비로 부쳐왔던 비밀이 하나씩 밝혀진다. 어두운 설정의 판타지에서 시작하지만 민족과 인종갈등, 계급주의, 전쟁과 자유 등의 담론을 던져주는 작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