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단 Jun 20. 2021

<당신을 이어 말한다>로 이어 말하기 - 1~2부

<함께하는 독학클럽> 여름시즌 첫 책

** <함께하는 독학클럽> 호스트 단단입니다. 이번 시즌에는 <정원, 효연, 혜수, 혜진, 지혜> 다섯 분과 함께하고 있어요.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다섯 명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가 더 넓고 깊게 확장되어 더 많은 분들과  연결되고 힘을 모으고 싶어요. 그래서 우리가 함께 나눴던 이야기와 생각을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더 많은 분들과 눈을 마주치고 손을 맞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기록은 호스트 단단의 관점에서 정리된 독서모임 이야기입니다.





<당신을 이어 말한다> 이길보라


** 아래 내용은 대화 녹취록이 아닙니다. 모임에서 나눴던 이야기와 독서노트에 작성된 내용을 기반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 이번 글은 1~2부에 대한 대화입니다. 3~5부 내용이 이어서 연재될 예정입니다.



책 어땠어요?


단단 | 책을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해요. 카카오TV <톡이나할까>를 가끔 보는데 최근에 이길보라 감독님이 출연하셨더라고요. 꽤 대중적인 매체라고 생각한 프로그램에서 이길보라 감독님을 만나니까 반가웠어요. <당신을 이어 말한다>를 읽고 독서모임 도서로 선정하면서 '농인 세계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건 아닐까?' 제가 좋게 읽은 것과는 별개로 다른 분들은 책의 어조를 단호하다고 느끼시진 않을까? 조금 걱정되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인기있는 프로그램에 이길보라 감독님이 출연한 것을 보니 제가 책 선정을 꽤나 시의적절하게 잘 했구나 안도했어요.


혜수 | 생각해볼 지점들이 많아서 좋았어요. 특히 농인 입장에서는 수어가 중심 언어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는데, 생각해보니 농인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거였더라고요. 소수자에게 우리가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지도 생각해보게 되었고요. 시혜적인 태도가 아니라 그들을 다른 개인으로 받아들이는 사회를 그려봤어요.


정원 | 전 사실 단호하다라고 느끼지 못했어요. 오히려 좀더 단호했어도 되지않나 싶었거든요. (멤버 모집 안내문에서 단호하게 어려운 책, 불편한 책 읽을거에요 라고 말하길 잘했습니다.ㅎㅎ)



모두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을까요?


단단 | 이 책을 읽으면서 반대 의견을 상상해봤어요. 그런 말들을 하잖아요. "아프리카 난민을 왜 도와? 국내에도 어려운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라던지 "동물권 보장 지지한다면서 왜 고기 먹어?" 이런 질문들이요. 제가 무례한 질문들을 너무 많이 목격했나봐요 ㅎㅎ.. 이 책의 1~2부에서 이길보라 감독은 CODA로서 농인 사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모두가 차별받지 않은 권리>라는 맥락에서 농인들의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입장으로요. 갑자기 궁금해졌어요. 그러나 청인과 농인 말고도 세상에는 다양한 장애가 있고, 장애로 규정할 만큼은 아니지만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 모든 사람들의 모든 권리를 동시에 보장할 수 있을까요? 청인 사회에서 농인의 권리를 보장하려다가 놓치게 되는 계층이 있지 않을까요? 이런 생각이 드니, 과연 누구의 권리를 얼마큼 보장해야 옳은가? 하는 질문이 떠오르더라고요.


혜수 | 그래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 그리고 '연대의 힘'을 강조하고 싶어요. 각자가 보장 받아야 할 권리가 다르잖아요. 필요한 보호와 배려가 다르니까요. 문제는 그것을 외부자인 타인이 모두 알 수는 없잖아요. 결국 각각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사회에 개입하고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있는 사회 시스템을 잘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고요. 정치인들의 공약을 꼼꼼히 검토한다거나, 청원, 글 기고 등등의 방법을 통해서요. 서로 다른 집단 간의 힘의 차이, 부조리, 부당함은 결국 '연대'를 통해 해결해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단어이기도 해요, 연대하자는 말이요. 약자가 서로를 돕는 방법으로 힘을 모아 권력이 무시할 수 없게 만드는 거죠.


정원 | 절대 닿을 수 없는, 하지만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하는 목표라고 생각해요. 각자의 역할이 다른 것 같아요. 모두가 다 알 수는 없죠. 물론 정치적으로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넓은 범위의 문제들에 대해 알아야 하겠지만 일상생활을 하는 우리가 '정상'으로 규정되는 상황 외의 모든 상황들을 알지 못하죠. 목소리를 낼 사람은 내고, 행동할 사람은 행동하고, 그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끌어가고 의사결정을 할 사람은 좀더 잘 알아야 하고요.



듣고 보고 말하는 감각에 대한 '표준'이 있을까요?


효연 | 제가 수강생 중에 수어를 배우는 분이 있어요. 마치 우리가 제2외국어 배우듯이요. 우리가 외국어를 배울 때 '언어의 차이'에 대해서 느끼잖아요. 수어라는 세계에 대해서 알게 된 게 새로웠어요.


단단 | 감각이라는 게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책을 읽으면서 실감했어요. 실제로 특정 스펙트럼의 자극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남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자극을 알아차리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와인이나 차(tea)처럼 특정 감각을 애호하는 사람들을 보고 느낀 건데요. 그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기본 감각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 같기도 해요. 그들은 향을 세상을 인식하는 주요한 도구로 삼는 거죠. 저는 농인 문화에 대해 읽으면서 농인에게 시각적인 정보가 주요한 기본 감각이라는 점을 새로 알게 되었어요. 이렇게나 사람들이 각자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데 특정한 감각을 가지고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게 맞는건가? 의문이 들어요. 학교에 다닐 때 말하기 능력 평가, 듣기 능력 평가 이런 테스트가 있었는데요. 과연 말하고 듣고 보는 능력의 '표준'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서로 말을 하고 듣고 있는 건 분명히 맞는데 전혀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잖아요. 이게 정상적으로 말하고 듣는 게 맞나? 싶어요. 우리가 '표준'이라고 생각하는 음성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도 알고보면 서로를 다른 감각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굳이 '음성언어'를 정상 언어, 주류 언어로 삼을 필요가 있을까요? 좀더 나아가 본다면 청인이 수어로 대화하도 되지 않을까요?


정원 | 저는 표준이라는 개념을 '효율'의 관점에서 생각해봤어요. 김초엽 작가님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수없다면> 중 <스펙트럼>을 떠올렸어요. SF소설 읽다보면 제 6의 감각에 대해서 자주 나오거든요. 아, 제가 SF소설을 좋아하는데 다른 분들은 흥미롭게 들으실지 모르겠네요. ㅎㅎ 저는 이상을 기술로 구현하는 것이 SF소설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거기서 뇌파로 생각을 전달해요. 그런데, 설사 특정 언어가 아니라 뇌파만으로 대화를 한다고 해서 제약이 사라지진 않을 것 같아요. 어떤 언어도 100% 완벽한 생각의 전달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효율'의 관점에서 포기할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게 되는 것 같아요. 기술과 정책은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모두를 포괄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제약사항이 많은 현실세계에서 가능한 일일까? 하는 생각을 해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표준'이라는 게 필요할까요? 


지혜 | 공식적인 자리에서 갖추어야 하는 것들을 '표준'으로 정의해야 할까요? 글쎄요, 듣고 보고 말하는 감각에 대한 '표준'은 정의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사랑하는 연인들은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감정을 느낄 수 있고, 또 어린 아이도 엄마의 표정을 보고 감정을 읽어낸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이 책에서 나온 다양한 대화법을 고려해보면, 의사소통을 하는 당사자들끼리 교류가 잘 되었다면 그것으로 감정적, 감각적으로 교류가 잘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같은 문학작품을 읽어도 독자마다 해석의 결과가 다양한 것처럼 오히려 그 외적인 것이나, 그밖의 맥락을 읽을 수 있는 감각은 어느 정도 공통된 부분은 있겠지만 '표준'이 있다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혜수 | 사랑하는 연인들은 눈빛만으로도 느낄 수 있다는 말, 다정하고 낭만적이인 예시에요.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마음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단단 | 이 질문을 던져주신 혜수님께서 먼저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혜수 | '개방성'과 '다양성'이라는 말은 항상 긍정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인데 반해, 실제 우리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다수의 시선은 부정으로 시작하는 것 같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질적인 상황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더라도 표현하지 않으려 노력하겠지만, 또 다른 많은 수의 사람들은 본인들의 부정적 감정을 혐오, 배타, 비판 등의 파괴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 같아요. 가장 이해되지 않는 부류는 예를 들어 성소수자의 퍼레이드 맞은편에서 성소수자 반대시위 등을 통해 본인들의 혐오를 대놓고 표현하는 사람들 입니다. 나와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들의 퍼레이드를 왜 굳이 나서서 반대를 하는걸까요? 나 혼자의 생각은 분명 개인 자유의 영역이겠지만, 그것을 남에게 표현하는 순간 타인의 자유가 침해되는건 아닌 지 생각이 필요한 영역 같은데요. 오지랖이라고 표현하기에도 훨씬 파괴적으로 본인들의 편견을 표현하는 사람들에게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자는 메시지'는 힘있게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들은 어떠한 이유에서 본인과 관계도 없는 사람들에게 혐오와 감히 '교화'라는 표현으로 그들을 변화시키려고 하는걸까요? 좀 개념적인 질문이긴 하지만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마음의 저변에는 어떤 심리가 있는 지 분석해야 결국 혐오하지 않는 사회를 위한 솔루션도 도출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효연 | 우월감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을 해요. 내가 맞다라는 생각은 내가 우월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 같거든요. 더 높은 곳에 있는 내가 맞다. 권력이 있는 내가 맞다는 생각이요. 우월한 자신에게 당위성을 부여하니까 차이를 틀림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정원 | 저는 같은 이유로 시작해서 다르게 해석 해봤어요. 그 우월감이라는 게 불안감 때문인 것 같아요. 불안하니까 객관적인 지표들, 표면적인 성과와 결과물에 의지해서 맞다 틀리다를 판단하고 그 논리에 맹목적으로 종속되는 거죠. 달라도 된다는 확신이 없고 불안해서 그런 것 같아요. 종교를 봐도 그런 것 같아요. 특정 종교에 대한 선입견은 아니고요, 예를 들어 교리에 틀린 점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럼 이건 틀렸고, 이렇게 수정해보자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틀렸다고 인정하면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무너질까봐 절대 안 틀렸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타인을 인정할 수가 없는 거죠.


단단 | 여러분 말씀을 듣고 스카이캐슬 속 부모들이 떠올랐어요.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의사가 되고 병원장이 되는 삶을 그들은 표준으로 삼잖아요. 자신들이 그렇게 살고 있고, 자식들도 무조건 그렇게 살도록 강요하고요. 그 마음이 우월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내포한다고 봐요. 그들은 정해진 루트 외에는 경험해 본 적도 없고, 상상해 본적도 없는 거에요. 그 불안함을 우월감으로 승화시켜 버리고,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아요.


지혜 | 타인을 보면서 '우리는 아예 다른 삶'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단단 | 이런 생각도 들어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결합된 우리 시대에서는 <돈이 인격이다>라는 말이 농담이 아니라 명제처럼 사용되는 것 같아요. 돈이라는 건 너무나도 명확하잖아요. 개인의 차이, 다양성, 개방성으로 표현하기에는 좁은 개념인데, 이 좁은 개념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논리가 되어버려서 개인의 차이를 개인의 '격차'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경험하지 않은 것을 말할 권리가 있을까요?


단단 | '안 해봤으면 말하지 마세요.' 이 말은 마치 무적의 입막음 논리처럼 느껴졌어요. 살면서 해본 것보다 안 해본게 더 많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지만 인간이 가진 고유한 능력인 '상상력'은 바로 이럴 때 빛나는 것 아닐까요? 경험하지 않은 것들을 '상상'을 통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저는 경험하지 않은 것들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p.49) 이 질문의 시작은 아마 이것이었을 거에요. '가난을 모르는 내가, 세상의 거친 면을 경험해보지 못한 내가,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다고 말하면 위선자로 비춰지지 않을까?' 나는 그들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은 건 이것이었어요. '그 생각부터가 나와 그들을 나누고 분리했던 것이다. 우리는 다르지 않다. 나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고 싶은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안전하고 다정한 사회에 살기를 바라는 것 뿐이다." 라고요.


정원 | 경험하지 않았으니 현실을 모른다고 누군가의 입을 막기에는 경험한 사람 또한 당사자이기 때문에 볼 수 없는 시야가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장시간 정신적, 육체적으로 학대받거나 억압받아온 당사자가 객관적,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지의 문제도 있구요. 다만,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객관성을 무기삼아 당사자의 앞에 서는건… 제3자의 입장에서도 기분나쁘고 시혜적이라 느껴지지 않나요? 당사자의 경험이나 말에 대해 객관성, 신뢰성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서는 과연 그들에게 마이크가 돌아가기는 하는지, 같은 화제를 이야기할 때 당사자가 발화할 때와 그 경계 바깥에서 안전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 발화할 때 같은 무게로 조명하는지부터 생각해봐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발화자의 태도도 고려되어야 해요. 자신을 위해 말하는 시혜적인 발화인지, 정말 그 당사자를 위해 말하는건지요.


지혜 | 경험하지 않은 것도 충분히 말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개개인이 겪는 경험은 다를 수 밖에 없지만, 맥락적으로 비슷한 경험들을 겪기 마련이니까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혹은 영화나 책같은 매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한 것도 경험의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해요. '안 해봤으면 말하지 마세요.' 라는 말은 살면서 한 번 쯤은 들어보기도 직접 해보기도 할 법한 말인데요,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기분이 언짢을 문장이에요. 말하는 사람이 몰아붙여지는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 상대방의 입을 틀어막는 발화일 수도 있을 것 같고, 상대방의 경험의 부재를 무시하는 발화일 수도 있겠어요. 여러 경우의 수가 있겠지만, 저 문장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폭력적인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혜수 | 물리적 경험만을 '경험'의 범주로 제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해요. fact만을 추구하는 과학의 기반은 아이러니 하게도 상상력입니다. 상상력은 분명 경험으로 사유하는 영역만은 아니구요. 인간의 놀라운 점은 바로 추상적인 개념을 사유할 수 있다는 점과 상상력, 유추 등이 아닐까요? 경험은 분명 상상력과 사유의 근간이 되지만, 경험주의는 지극히 단순하고 위험한 개념이 될 수 있고, 인간의 놀라운 상상력을 제한하는 편견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