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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Jan 09. 2022

새 해에는 더 다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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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새해 달리기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상암 숲 새하얀 길 위를 뛰어다녔다. 내 발자국이 얇게 쌓인 눈 위로 총총총 남았다. 눈 내린 다음날의 추위는 매섭지 않았다. 목티 위에 기모 후디를 두 겹이나 겹쳐 입었더니 포근하기까지 하다. 여름용 요가 레깅스를 입은 다리는 따갑도록 추웠지만.


후-하 후-하

가쁜 숨을 내쉴 때마다 마스크 안에서 피어오른 더운 숨이 얼굴 위로 번졌다. 더운 숨은 수증기가 되어 눈썹 위에 작은 고드름이 되어버렸다. 그런 내 얼굴을 보고 나란히 뛰던 남편이 깔깔 웃었다.


밤 사이 내린 눈이 땅에 쿠션처럼 쌓여 오랜만의 달리기가 어쩐지 힘들지 않았다. 달리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치즈의 노래 icanttellUeverything을 들었다. 그 순간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가벼운 운동을 마치고 방 안에 앉아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 것. 차를 마시고 책을 뒤적이며 흘려보내는 시간. 아무것도 되지 못해도 무엇이든 될 것만 같은 순간을 만끽하는 기분을 왜 잊고 살았을까.


내가 좋아하던 것들이 ‘사이드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하고 새로운 기회와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그 기회를 성실하게 맞이했다. ‘순간을 만끽’하기보다는 ‘효율적인 수행’을 했다.


실력과 인정이 쌓여가는 속도는 기대와 달리 비효율적이었지만 결과 하나하나 모두 뿌듯한 성취감을 가져다 주었다. 댓글 하나, 피드백 메일 답장 하나, 매체에 소개된 글 한 편, 새로운 제안 하나가 모두 비효율적인 노력의 효율적인 성과처럼 보였다.


이 모든 일들이 생계를 위한 일이었다면 도저히 지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들이는 시간에 비해 돌아오는 보상이 너무 적은 일이니까. 사람들은 ‘좋아서 하는 일’에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 그래서 그 일을 하는 것 자체에 이미 보상이 포함되어있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박봉에 시달리는 사람을 보면 '그래도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나보다 행복하겠지'라는 시선을 보낸다.


일과 놀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무엇이 일이고 무엇이 놀이인지 한참을 찾아헤매던 2021년이었다. 이제야 눈에 보인다. 무엇을 일이라고 할 수 있는지, 무엇을 놀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어떠한 일을 하겠다고 약속하고 누군가를 위해 반복적으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일’이다. 그것이 돈이 되지 않아도, 인정을 받지 못해도, 재미가 있건 없건 간에.


어떠한 일을 또 할지 말지 생각하지 않은 채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고 싶지 않을 때는 놓아버려도 된다면, 아무런 결과물이 남지 않아도 된다면, 그것은 놀이이다. 설령 그것이 돈이 되고, 큰 인정을 받는다고 해도.


그러니 놀이를 일처럼 하려면 꾸준히 결과물을 만들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일을 놀이처럼 하려면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 결과물이 나오지 않아도 괜찮아야 한다.


사이드 프로젝트는 일인가? 놀이인가? 한동안은 놀이였다가 점차 일이 되었다. 회사일에 추가로 일이 늘어난 셈이다. 2021년 연말이 되니 일은 점점 스스로 몸집을 불려나갔다. 일을 더 하려고 시작한 건 아니었는데 라는 생각이 들 때쯤 타이탄의 도구들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우리는 모두 바쁘게 ‘사라지고’ 있지 않은가? 아무도 보지 않는 뉴스, 콘텐츠, 기사를 비롯해 잡다한 것들을 만드느라 정신없는 건 아닌가?

<타이탄의 도구들>, 짐 페리스


삶은 쓸모없지만 재미있는 것들로 채워져야 한다.

2022년은 하루에 하나라도, 10분이라도 쓸모없고 아름답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들로 시간을 보내고 싶다. 자주 많이 계속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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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내 일은

내일의 내가


오후 4시 반. 그냥 컴퓨터를 끄고 퇴근을 해버렸다. 다행히도 회사에는 자율 출퇴근 제도가 있다. 내일의 내가 어떻게든 하겠지. 지금까지 주어진 일은 어떻게든 해냈으니까. (실은 안 될 것 같으면 기꺼이 포기했던 것이지만)


좋아하는 떡볶이를 만들어 먹고 집을 나섰다. 연희동 책바에 갔다. 커티삭 하이볼 한 잔과 모스코 뮬 한 잔을 마셨다. 얼마전 인스타그램 친구 A가 위스키를 배운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른이 된 걸까? 위스키와 보드카가 이렇게 맛있다는 걸 몰랐다...! 아마도 이 곳의 분위기와 사장님의 제조 스킬 덕분이겠지만. 오늘 알았다. 나는 술을 안 좋아하는 게 아니라 소주를 안 좋아하는 거였어...!


내추럴 와인을 들이키는 나를 보고 토끼눈을 뜨던 팀장님이 생각난다. 팀장님, 저 맛있는 술은 좋아하는데요... 맛있는 술은 꼭 비싸더라고요.


사실 오늘 책바에 오게  것은 인스타그램 친구 B 덕분이었다. 정말 열심히 사는 나는 가끔  때려치우고 싶은 기분이 드는데. 노트북을 끄고  일상까지 로그오프 하려던 나를 붙잡고 B이야기해주었다.


"단단님, 상이 없어도, 인정이 없어도 누가 뭐래도 열심히 하실 꺼잖아요! 올해는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제일 친절해봐요!"


B의 이야기를 듣고 책바에 가서 혼자라면 하지 않았을 일들을 했다. 맛있는 술을 먹고 좋은 노래를 듣고, 글을 썼다. SNS로 만난 인연도 얼마든지 귀한 인연이 될 수 있다. 가끔은 나의 생각과 취향을 지켜보는 SNS 친구들이 나를 더 잘 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나를 위해 보낸 오늘 오후가 정말 뿌듯하다.

비록 늦잠을 자고, 회사일도 반이나 남겨두고 무작정 퇴근해 버렸지만.

내일의 내 일은 내가 어떻게든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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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능성에

다정한 사람


6년 전 결혼식. 나와 배우자는 각자 준비한 혼인서약서를 읽었다. 내가 적어 온 서약은 이렇게 시작했다.


"평생 꿈꾸기를 멈추지 않겠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한결같이 내 꿈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내 서약을 듣고 친구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정말 너가 쓴 혼인서약서 같더라."


열심히 해도 안 될 때, 나의 한계를 느낄 때, 너는 아무리 해도 여기까지라는 눈빛을 받을 때 마음이 가장 힘들었다. 나는 훨훨 날아다닐거라고 소리 질러도 믿어주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오히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던 10대, 20대때 그런 피드백을 가장 많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은 나의 한계를 말한 게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이야기한 것이었는데 왜 그때 나는 그 한계에 갇혀 있었을까.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회사 취직하면 된 거지. 더 잘 될 필요가 뭐가 있어."

"장래희망이 CEO? 그거 되게 적극적이고 외향적이어야 할 수 있는 건데?"


"난 뭐든 할 수 있거든!"

"뭐든 할 수 있지는 않지. 너 지금 당장 100억 벌 수 있어? 그건 아니잖아."


오늘 소정님의 12월 생각구독을 다시 읽고, 유튜브 라이브에 참여했다. 생각구독을 읽을 때마다 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


나와 배우자는 참 공통점이 없는데 (취미도, 성격도, 관심사도 너무 다르다) 그럼에도 나는 이 관계를 절대적으로 의지한다. 최근에 그 이유를 알았다. 그는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너무 당연하게 진심을 담아 말한다.


"자기는 진짜 천재다. 최고 작가다. 세상 사람들이  줄서서  읽어줄 날이 올거다." 처음에는 고마워하며 흘려들었다. 그런데  말들을 6 내내 매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들었더니 이제  칭찬들을 당연하게 스스로에게 해주게 된다.


유튜브 라이브를 들으며 다시 결심했다. 아무리 오래 만나온 친구라도 내 한계를 정하는 사람과는 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나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의 비난을 귀담아 듣지 않을 거라고. 적당히 회사 다니라는 말에 동조하지 않을 거라고.


글로 남겨두지 않으면 이 다짐이 흘러갈 것 같아서 꼭꼭 남겨둔다. 다정하자, 나에게 다정하자. 나의 가능성에 다정하자. 상처받지 말자. 상처는 그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나는 더 나아가버리자.



/

내 모습이

나에게 좋아보이기를


"올 해 목표는 뭐야?"

"없어. 안 세웠어."


오랜만에 친구와 안부를 나누는 통화를 했다. 전화를 끊으며 친구가 새 해 목표를 물었다. 없다고 말했다. 목표를 세우고 거기에 맞춰서 살지 않겠다고 했다.


사실은 올해도 해야  일들이 많다. 작년 12월에는 올해를 상상하며 2022 플랜도 세웠다. 그러나  해가 되어 <해야  > 목록을 지워버렸다.


성취하고 싶은 것들을 위해 전력질주하며 살아왔다. 열심히 노력해서 어떤 것들은 손에 쥐게 되었고, 어떤 것들은 포기했다. 어렵게 손에  것들을 떠올리면 뿌듯하다. 그러나 이것얻기 위한 과정 속  모습을 떠올려보면 좋아보이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던 나는 쉽게 예민해졌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었지만 제대로 사랑할 줄은 몰랐다. 그런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조금 덜 얻더라도 그 과정의 내가 즐거웠으면 좋겠다.


새 해 목표를 굳이 말하자면, 무엇을 성취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성취하든 목적지까지 향하는 과정의 내 모습을 내가 좋아할 수 있는 모습으로 만드는 것이다.


브런치를 처음 시작할 때는 그냥 글 쓰는 게 좋았다. 지금은 내가 쓰고 싶은 글보다 써야 하는 글을 자주 쓴다. 누군가는 그것이 성장의 과정이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왜 성장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다시 해본다. 좋아하는 글을 쓰기 위해 성장해야 한다고? 글로 먹고 사는 작가가 되기 위해 성장하게 한다고?


그럼 그냥 적당히 먹고 살면서 좋아하는 글을 쓰면 되는  아닐까? 그건 지금 당장   있는 일인데  힘들게 다른 무언가를 성취하려고 하는 거지? 좋아하는  쓰는  모습이 마음에 들면 되는 거라고 생각하고 나자,   목표를 세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정과 긍정, 친절은 모두 다른 개념이다.


친절은 원하지 않아도 타인을 위해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긍정은 그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정은 있는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친절한 사람이고 싶었다. 그러나 스스로를 긍정할  없었다. 다정은 생각지도 못했다. 2022년은 나에게 다정한 사람이고 싶다. 무엇을 성취하지 않아도 좋다. 그보다는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내가 좋아할  있었으면 좋겠다.


매일 아침 저녁 거울을 보고 스스로에게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나 정말 사랑스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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