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영감을 받는 순간은 음악을 들을 때다. 음악을 들으면 머릿속에서 문장이 떠오른다. 음표와 함께 단어가 배치되고 연결되고 물 흐르듯 이어진다. 생각해보면 늘 음악을 듣다가 글을 쓰곤 했다. 20년도 넘은 오랜 취미다.
언젠가 내가 운전하는 차를 탄 아빠는 이렇게 말했다. “죄다 자장가 같은 음악만 주구장창 듣는구만.” 트로트를 좋아하는 아빠에게 내가 좋아하는 잔잔한 연주곡은 잠을 부르는 노래였지만 나에게 그 음악들은 순식간에 꿈을 꾸게 하고, 마음을 춤추게 하는 격동의 뮤즈였다.
my blue valentine 채널의 플레이리스트를 들었다. [눈이 내린다. 밤의 끝이 하얘졌다] 이 플리를 만드는 사람은 음악으로 소설을 쓰는 것만 같다. 가만히 앉아서 밤새도록 이런 노래를 듣는 게 좋다.
https://youtu.be/4Ei4dHzLiDE
스무 살 때는 새벽에 enrio moriconne의 love affair 를 3시간 동안 듣기도 했다. 이소라의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를 잠들 때까지 들은 적도 있다. 고요하고 적막하고 처절하고 새하얗게 질린 아름다운 노래들. 정말 좋다.
내가 정말 쓰고 싶었던 글은 소설이었다. 초등학생 때 쓴 첫 작품도 소설이었다. 꿈속을 헤매는 주인공의 이야기였다. 내 이야기였다. 열두 살 때는 어린이 드라마 공모전에 시나리오를 출품했다. 제목은 “슈팅스타”였다. (당시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슈팅스타에 단단히 빠져있었다) 세 자매 중 둘째로 태어난 주인공의 인생 대서사시였는데, 대차게 탈락했다. 내 이야기였다. 대학시절, 신춘문예에 글을 보내고 싶었는데 도저히 써지지 않아 포기했다.
작년 봄, 첫 책으로 에세이를 펴냈다. 다시 소설을 쓰고 싶어졌다. 두 달 동안 소설 쓰는 법 책을 여러 권 읽고 플롯을 짜고 몇 편의 단편 소설을 썼다. 다시 읽어보니 소설이 아니라 그냥.. 내 이야기였다. 에세이와 자전소설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나는 왜 나밖에 못 쓸까? 김초엽 작가는 나보다 어린 나이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창조해 SF 소설의 빛이 되었는데, 왜 나는 현실 세계에서조차 내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쓰지 못하는 걸까. 이런 생각으로 한없이 우울했었다. 지금은 안다. 나는 나를 쓸 줄 아는 재주가 있다. 그거면 충분하다.
알면서도 왜 소설을 쓰고 싶을까? 빨래를 널다가 정세린의 purple forest 를 들으며 알았다. 노래가 흘러나오자 순간 어떤 상황이 떠올랐다. 기시감이 들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그 장면은 낯설었다. 경험한 게 아니라 만든 기억이었으나 만들어낸 기억에 기시감을 느끼는 감각이 익숙했다. 아… 이거였어! 다른 내가 되는 경험.
나를 쓰는 글은 나를 똑바로 마주하게 한다. 덕분에 정신없는 흘러가는 세상에서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다. 글은 온전히 나로서 살 권리를 되찾아준다. 동시에 나로 살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허용한다. 그것이 소설 아닐까? 내게는 이런 환상이 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