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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Aug 05. 2022

브라보, 디카페인 라이프

내 것만큼만 욕심내고 살기

"디카페인 아이스 라테 얼음 조금 그란데 사이즈요.

아! 오트 밀크로 변경할게요."


매일 점심마다 먹는 음료다. ‘오트 밀크’도 ‘그란데’도 ‘얼음 조금’도 모두 중요하지만 핵심은 ‘디카페인’이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활동량이 줄어서일까, 카페인 취약 체질이 되어버렸다. 왕복 2시간씩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출퇴근하던 시절에는 하루에 커피를 두 잔씩 마셔도 열두 시만 되면 비실비실 잠이 들었는데 지금은 커피 한 잔 마시면 새벽 세시까지 정신이 말똥 하다.


커피를 끊지는 못하겠어서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디카페인 커피 효과는 빠르게 찾아왔다. 매일 밤 열한 시에 졸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카페인이 밤마다 얼마나 내 뇌를 각성시켰던 걸까. 이 혁명적인 변화로 카페인의 강력한 위력을 깨달았다.


재깍재깍 열한 시만 되면 잠이 오는 탓에 예전처럼 새벽까지 책을 읽을 수가 없게 되었다. 몇 장 읽다 보면 졸면서 같은 문장을 여러 번 읽다가 결국 책을 덮고 침대로 향한다. 저녁 야근을 할 때에도 예전 같지 않다. 멍-하게 졸린 상태로 일하다 내일의 나에게 미루고 잠을 택하고야 만다.


카페인-프리 라이프는 어째 좀 손해를 보는 것 같다. 하루가 줄어든 기분이다. 그나마 좋은 점이라면 새벽 세 시까지 뒤척이는 불면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카페인을 마시던 때는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을 한 날에도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 누워서 몇 시간을 흘려보내곤 했다. 정신은 말짱한데 몸은 너덜너덜 피곤한 채로 누워 있다가 새벽 세 시쯤 잠에 들면 다음날 아침은 여지없이 늦잠에 피로 추가다.


지금은 매일 열한 시, 늦어도 열두 시에 잠들고 8시에 눈을 뜬다. 새벽 2시에 잠들어 9시에 일어나던 때보다 많이 자고 깨어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짧아진 하루를 달래는 것은 한결 가뿐해진 몸과 마음이었다. 시간은 줄었지만 하루에 처리하는 일의 양은 비슷하다. 어쨌든 처리해야 하는 일은 어떻게든 하게 되어 있다.


주 52시간 제도가 도입되던 시절이 떠오른다. 매일 9시까지 야근을 하던 때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회사 컴퓨터가 6시에 꺼진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다들 좋아하면서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날 처리해야 할 일을 다 끝내지 못할까 봐 불안한 것이다.


카페인을 끊고 난 후 내 체력은 6시에 셧다운 되는 컴퓨터처럼 11시에 자체 종료되었다. 아직 써야 할 글이 남았는데, 끝내지 못한 일이 있는데 어쩌지? 걱정하는 마음이 커지는 날은 이런 마음이 들었다. '그냥 커피를 마셔야 하는 거 아닐까? 그깟 불면증 쯤 뭐 어때! 차라리 그 시간에 할 일 더 하면 좋은 거 아냐?'


한창 두세 잔씩 연달아 커피를 마시던 시절, 커피를 마시고 각성된 몸과 마음을 '내가 가진 시간과 체력'이라고 생각했다. 카페인을 끊고 늘어난 잠과 솔직한 피로를 마주할 때 이 상태가 원래 내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2주가 지나고 나서야 인정했다. 커피로 에너지를 만들어 낸 게 아니라 내일치 에너지를 미리 당겨와 마치 말짱한 것처럼 착각했던 거다. 커피를 마시고 늦게 잔 다음날 아침이 피곤한 이유, 매일 아침마다 피곤에 짓눌려 하루를 시작하는 이유, 언제나 피로를 느끼는 이유가 있었다. 커피를 마시고 에너지를 얻은 것이 아니라 커피로 인해 잠시 착각한 것이었다. 사실 내 몸은 잠을 원했다. 커피가 뇌에 거짓 신호를 보내 ‘잠이 오지 않는다’고 믿게 만들었던 것뿐이다.


디카페인 라이프는 신용 카드를 쓰는 삶에서 체크카드를 쓰는 삶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카페인을 끊고 잠을 많이 자게 된 후 아침에 눈을 뜰 때 피곤하다는 감각이 없어졌다. 그만큼 충분히 오랜 시간 자기 때문이다. 짧아진 하루가 억울하긴 했지만 인정해야 했다. 이만큼이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체력이다. 욕심 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어쩔 수 없다. 신용카드를 마음껏 긁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니까.


내 것이 아닌 것을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좋아 보인다고 모두 욕심냈다간 몸이 남아나지 않거나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거나 둘 중 하나다. 이 마음을 먹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까지 세상은 좋아 보이는 것이 있으면 뭐든 하라고, 꿈을 꾸고 이루며 살라고 부추겨왔다. 좋아 보이는 것을 욕심 내라는 목소리에 외면하기 어려웠다. 내 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일단 좋아 보이는 것에 뛰어드는 것 외에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이것저것 들쑤시듯 여러 우물을 판 후에야 무엇이 진짜 내 욕망이고 무엇이 외부의 욕망인지 알게 되었다. 드라마 <안나>에서 안나는 말한다. "내가 그것을 원하는지는 가져봐야 안다."



무언가를 잃는다는 말 뒤에는 '그것을 이미 가져봤다'는 뜻이 숨어있다.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말 뒤에는 '먼저 그것을 소유했다'는 뜻이 숨어있다. 디카페인 라이프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Full 카페인 라이프를 살아봤기 때문이다. 


포기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먼저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진 것 없이는 아무것도 포기할 수 없다. 이긴 적도 없으면서 이기기를 포기하면 처음 시작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셈인데, 그것이 바로 실패자인 것이다. 정체성을 포기하기 전에, 자신을 위해 먼저 그것을 만들어놓아야 한다. 자아를 잃기 전에 당신의 자아를 발달시켜놓아야 한다.

- 아직도 가야 할 길, 스캇 팩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을 때의 기쁨이 유지되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게 애쓰는 기분이 든다면 내 것이 아니다. 카페인을 마시며 억지로 정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나 다름없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려놓겠다는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건 10년간 회사를 다니며 원하던 것을 다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나만의 커리어 버킷리스트가 있었다.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회사에서 일하기

포트폴리오를 탄탄하게 만들어서 이직하기

커리어를 주제로 칼럼 연재하기

책 출간하기

대학생 취업 멘토링 하기


이제 여기서 어디로 더 가야 할지 선택해야 했다. 승진하고 리더가 되고 몸값을 올리는 길? 책을 더 많이 출간하고 강연을 하러 다니기? 모두 의미 있는 일이다. 그 길로 열심히 가는 것도 좋다. 문제는 몸과 마음이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더 이상 외부의 목표를 향해 이 악물고 달리고 싶지 않았다. 목표를 세우고 달리고 허들을 뛰어넘고 또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달리고 허들을 뛰어넘는 일을 반복하는 과정이 더 이상 재미있지 않았다. 이제는 그 모든 과정까지도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적당히 배가 부르고 나니 남을 위한 욕심이 아니라 나를 위한 욕심을 내고 싶어진 거다.


내 몫만큼만 욕심내는 것은 내가 나답게 일하고 성장하고 행복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할 수 있는 데 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만큼 하면서 살자는 거다. 내가 무엇을 할 때 더 하고 싶은지 더 할 수 있는지 경험해봤으니까 가능한 마음이다.


예전에는 뭔가를 잘하는 사람이 능력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진짜 능력 있는 사람은 할 때와 하지 않을 때는 잘 알아차리고 선택하는 사람이다. 그러려면 늘 스스로에게 열려있고 깨어있어야 한다.


폴인 페이퍼에서 정구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회사를 차리지 않고 혼자 프리랜서처럼 일한다고 한다. 매니저도, 운전해주는 사람도 없이 일정 관리하는 사람 두 명이 전부다. 정구호 CD(Creative Director)는 30년 넘게 현역으로 일하면서도 여전히 거침없이 자유롭고 창의적이다.


회사를 차리고 일의 규모를 키우는 방식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그는 혼자 일하기를 선택했다. 회사를 차리면 내 몫 이상 해야 할 일이 생긴다. 책임질 것이 늘어나는 만큼 리스크도 커진다. 선택의 대가도 크다. 더 이상 재미있어 보여서, 해보고 싶어서 선택할 수 없게 되는 거다. 일정 규모 이상의 돈을 벌어다 줄 수 있는 일만 고르게 된다. 그는 규모를 키우는 대신 1인분의 책임과 자유를 선택했다.


정구호 CD는 자신의 일하는 방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혼자 일하는 게 제일 효율적이다.

✔️회사를 세우면 관리 업무를 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 기업이 기대하는 일은 그게 아니다.

✔️기업과 협업하는 방식으로 큰 프로젝트를 계속 맡을 수 있다.


한 때 나만의 일을 하려면 커뮤니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커뮤니티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였다. 지금은 모두가 커뮤니티를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커뮤니티에 잘 맞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커뮤니티를 만들어보니 나는 관리하고 운영하는 것보다 빠르게 시도하고 자유롭게 도전하고 방향을 바꾸는 일이 더 잘 맞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은 회사에 소속되어 일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회사에서 독립할 때가 올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회사에서 독립할 때를 대비해서 커뮤니티를 만들고 싶었지만 그건 내 방식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나는 계속 혼자 일할 것이다. 가장 효율적이고 자유롭고 기민한 방식을 선택할 것이다. 일의 규모를 키우고 싶을 때는 정구호 CD처럼 기업이나 단체와 프로젝트 단위로 함께 일하는 방식을 택할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하든 기획자가 되어야 한다. 나만의 내러티브가 확실한 기획자가 되어야 한다.


지난 10년은 사회인으로서 제 몫을 다 해내는 훈련에 집중했다. 앞으로의 10년은 내가 할 수 있는 내 몫의 일이 무엇인지 날카롭게 벼르고 또 벼르는 데 투자할 것이다. 10년 후, 40대 중반이 되어 날개 돋친 듯 어디로든 자유롭게 날아오르기 위해 앞으로 10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며 카페인 없이 주어진 딱 그만큼의 시간과 체력을 내 것으로 인정하며 살자고 다짐해본다.


카페인 없는 보리 커피와 토마토 파운드케이크와 수박을 아침으로 먹으며 일기를 쓴다.
재택근무를 하다가 지치는 오후 3시, 콜드 브루 디카페인 페루 커피를 마시며 쉬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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