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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Feb 23. 2023

납작해진 유행어를 쓰다 보면

인스타그램을 휙휙 넘겨보다가 반복해서 나오는 표현에 시선이 멈췄다.



"기 쎄다"



언제부턴가 예능 자막에 이 표현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자주 등장했다. <기 쎄다>가 차지한 자리에 원래 있었을 말을 떠올려본다. 휘둘리지 않는다, 주눅 들지 않는다, 소신 있다, 줏대 있다, 용감하다, 나답다, 용기 있다, 배짱 있다, 호방하다, 호쾌하다.



꽤 많은 표현이 떠오른다. 상황에 따라, 말하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기 쎄다>는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한 의미로 해석된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렇게 쓰이던 고전 단어가 있었으니, 바로 '거시기'다.



거시기 있잖아, 거시기가, 거시기하네 등등 명사와 동사 형용사 자리에 두루두루 쓰이는데 앞뒤 문맥을 잘 추리해야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다. 비슷한 말로 '가'도 있다. 가가 가가?라는 예시로 쓰이곤 한다.



'거시기'나 '가'처럼 이런저런 상황을 뭉뚱그려 쓰는 단어들이 유행어로 자주 등장한다. 현타, 대박, 킹받는다 같은 표현이다. 이런 말들은 비슷한 상황이나 감정을 하나의 표현으로 통합해 버린다. 유행어의 영향력이 커지면 엄연히 구별되는 다른 상황에서도 마치 같은 상황인 것처럼 쓰이기도 한다.



일에 압도되어 막막할 때도 '현타 온다'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할 때도 '현타 온다'

믿었던 동료에게 배신감을 느낄 때도 '현타 온다'라고 말한다.



어떤 감정을 느낄 때 납작하고 단순한 단어로 표현하는 습관을 들이면 그 감정 자체를 애매하게 뭉뚱그려진 채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면 이 감정이 대체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고, 알 수 없기에 원인도 해결책도 찾을 수 없다. 알 수 없는 대상은 궁극적으로 통제 가능한 영역에 들어오지 않는다.



납작해진 유행어를 쓰는 습관을 들이면 결과적으로 스스로 감정을 통제하기 어려워진다. 기분을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종종 마주치곤 한다. 버럭 화를 내거나 꽉 막힌 태도를 보며 답답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정말 답답한 것은 그들 자신일 것이다. 스스로 왜 이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을 것이기에.



새로 유행하는 표현이 나오면 가늘게 실눈을 뜨고 생각해 본다. 이 말은 어떤 표현을 대체하게 될까? 어떤 감정을, 상황을, 태도를 감추게 될까?



내가 좋아하는 기 센 장면, 드라마 <멜로가 체질> 10화다. 전여빈의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욕이 너무나 통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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