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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Jul 16. 2022

요즘 시대의 능력 <생각력>


사라진 알람으로

얻은 것


월요일 오후 2시. 리추얼 모임 멤버에게 줌 미팅 공지를 하기 위해 카카오톡을 열었다. 순간 카톡 메시지가 다다닥 업데이트되며 생겨났다. 엇... 이상하다? 스마트폰 화면 속 네모난 카카오톡 어플 아이콘에는 분명 카톡이 왔다는 숫자 표시가 없었는데? 무려 63개의 카카오톡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무려 금토일 3일간 카카오톡을 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 이상했다. 평소에는 하루에도 여러 번 카카오톡으로 광고 메시지를 받았다. 알림은 무음이었지만 휴대폰을 만질 때마다 푸시 알림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연히 카카오톡도 하루에 여러 번 열어보았다. 그런 내가 3일간 카카오톡을 열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내가 그랬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리추얼 멤버 공지가 아니었다면 며칠이고 더 카카오톡을 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카카오톡 뿐만 아니라 업무용 슬랙, 이메일, 남편과 사용하는 비트윈까지 모두 알림이 울리지도 표시되지도 않고 있었다. 스마트폰은 문자와 전화가 올 때만 스크린 위에 기록을 남겼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업무용 슬랙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다가 꺼두려다가 아마 전체 알림 설정을 변경한 모양이다. 쌓여있는 카톡과 슬랙, 이메일을 확인했다.


즉시 확인했어야 할 알림도 있었다. 뉴스레터 회의 시간을 바꾸자는 크루의 카톡, 밤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광고 메시지 발송을 위해 긴박하게 프로모션 쿠폰번호를 알려달라는 동료의 슬랙, 프로모션 매출세금계산서 처리를 위해 회사 통장 사본을 보내달라는 업체의 메일이었다. 금요일에 바로 확인했다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큰일이 난 것은 아니었다. 당장 해결해야 할 큰 문제였다면 전화나 문자를 했을 것이다. 30분 정도 밀린 알림을 확인하고 답을 보냈다.


30분. 3일간 쌓인 알림에 답하는 데 걸린 시간은 딱 30분이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늦게 답한 것에 대해 비난하지 않았다. 만약 알림이 켜져 있었다면 휴대폰을 열 때마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뉴스레터를 열어봤을 것이다. 어쩌면 매번 휴대폰을 손에 쥘 때마다 짧게는 10분 길게는 30분을 소비했을지도 모른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알림이 울리지 않자 휴대폰을 열어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연락 중 절반은 바로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것이다. 언제나 빠르고 정확하게 피드백하는 것을 스스로의 강점으로 생각해온 나에게, 사라진 알람은 당혹스러웠지만 놀라운 깨달음의 계기였다. 알람 설정을 바꿔두지 않고 며칠 더 지내보기로 했다.


영감이나 글감이 떠오를 때마다 휴대폰 메모 앱에 기록하는 습관도 바꿔봤다. 수첩에 손글씨로 적기로 했다. 집에 있을 때는 두툼한 일기장 한 켠에 메모를 했다. 외출할 때는 손바닥 크기의 얇은 노트와 펜을 챙겼다. 버스와 지하철 안에서, 사무실에서 좋은 생각이 날 때마다 수첩에 적었다. 잠들기 전 그날 기록한 메모를 읽어보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2주가 흘렀다. 사라진 알람으로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알람이 울리지 않으니 일상이 덜 흔들린다. 하고 있던 일에 오랫동안 깊이 몰입할 수 있다.   

    바로 답해주지 않아도 사람들은 잘 기다린다. 내 답이 늦어도 화내지 않는다. 정말 급한 일이라면 전화나 문자를 보낸다.  

    정신이 맑고 깨끗해진 기분이다. 머릿 속이 정돈된 느낌이다. 내친 김에 광고 문자 하나하나 수신 거부를 신청했다.   


맑은 정신으로 하던 일에 오랫동안 집중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할 시간을 얻게 된 것이다.




투명한 과잉

정보의 시대


집 앞 산책을 하다가 장난을 치는 초등학생 한 무리를 만났다. 장난 이라고는 썼지만 상대를 향한 심한 비속어가 오갔다. '이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걸까? 어쩜 한 마디 한 마디가 이렇게 부정적이고 공격적일까?' 속으로 생각했다.


아이들은 순수하다. 순수함과 선함은 다르다. 선함에는 타인으로부터의 시선, 공동체의 규칙, 권력의 비대칭이 전제되어 있다. 인류가 국가라는 시스템을 만든 것도 권력과 규칙이 있어야 선이 사회 시스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DNA에 선함을 장착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생존을 위해 선함이 필요했던 것이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커지는 것도 같은 원리다. 문명이 발달하고 기술이 발달할 수록 정보가 투명해진다. 권력을 독점한다는 것은 정보를 독점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투명한 과잉 정보의 시대이다. 다 보지도 못할 만큼 많은 정보가 공개되어 있다. 요즘 시대에는 정보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보다 얼마나 잘 정리하는지가 중요하다.


누구나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누구나 잘 활용하는 것은 아니다. 정보를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정보를 다루는 자신만의 관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하루하루 꾸준히 자신의 관점으로 정보를 정리하고 쌓아나가는 힘이 있어야 한다. 관점과 꾸준함. 이 두 가지 능력이 강력한 힘이 되는 시대이다.




공상을 즐기던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어


어릴 적 나의 취미는 침대에 누워 공상하는 것이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언니의 일기장에는 이런 문장이 자주 등장했다. "동생이랑 같이 놀고 싶은데 매일 누워 있다. 내가 100원을 주겠다고 했는데도 같이 놀이터에 가지 않았다. 밉다." 정말 그랬다. 언니가 아무리 사정을 해도 집 밖에 나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언니는 나를 설득하다 지쳐서 혼자 놀러 나갔다. 그러면 나는 비로소 조용해진 방에 들어와 공상을 시작했다.


공상은 계속 되었다. 학생 때 공부를 하다가 힘들면 음악을 들으며 공상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되는 상상, 새로 오신 선생님의 일상에 대한 상상, 어제 본 드라마의 다음 스토리에 대한 상상, 끝없이 상상을 했다.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혼자 하는 상상이 더 흥미진진했다.


공상을 즐기던 어린이는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공상을 즐겼다. 어른이 되어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공상이 글쓰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자주 묻는 질문이 있다. "어떻게 지치지도 않고 질리지도 않고 꾸준을 글을 쓸 수 있는 거야?" 답은 당연했다. 나에게 가장 재미있는 놀이다. 하루 동안 경험한 일에 대해 생각하고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하고 기록하는 일은 짜릿하다.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꿈꾸는 사람은

이길 수 없다


열심히 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했던가. 나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덧붙이겠다.


"즐기는 사람은 꿈꾸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꿈은 삶의 의미이자 의도, 목적이다. 무엇을 위해 사는지에 대한 답이다. 모든 순간을 즐기는 마음으로 임할 수는 없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 재미있는 일이라도 반복하다 보면 힘들어지는 순간이 온다. 그 구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은 꿈이다. 꿈을 꾼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불확실한 것을 굳게 믿는 힘을 갖는 것이다.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일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지속할 수 있는 이유는 리스크를 감수하고 인내했을 때 미래에 얻게 되는 보상을 "떠올리고 믿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구체적으로 설계하고 가치를 부여하고 믿으려면 생각의 힘이 있어야 한다. 오랫동안 그 생각에 몰입할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에게 중요한 인생의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기 위해 장기간의 사고 실험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인슈타인이 탁월한 과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머릿 속 시뮬레이션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러면 어떻게 될까? 저러면 어떻게 될까?' 하는 사고 실험을 끊임없이 했다는 것이다. 끝없는 걱정과 사고실험의 차이는 '목적지가 분명한 생각인지'이다. 아인슈타인은 10년간 하나의 질문을 계속 생각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반대로 뒤집어보면 10년이나 걸릴 만큼 어려운 질문, 실패할지도 모르는 문제에 오랜시간 몰입하고 상상해왔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소설가인 장강명 작가의 소설에 이런 평이 달린 적이 있다.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진정한 소설인가?" 한 편의 긴 취재 기사와도 같은 그의 글쓰기 방식에 대한 독자 의견이었다. 그의 소설을 읽으며 나는 그가 소설을 쓰며 사고 실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독자의 평대로 그의 소설은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10년간의 기자 생활을 통해 사실 기반의 글쓰기가 체화된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고 있다고 느꼈다. "소설은 현실인가 허구인가? 현실은 소설인가? 소설은 현실인가? 이것은 소설인가? 소설이 아닌가? 그렇다면 대체 소설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이 그를 계속 쓰게 한 것은 아닐까.


한동안 장강명 작가의 소설 집필 활동이 뜸했던 시기가 있었다. 얼마 뒤 출간된 그의 에세이에서 소설 쓰기의 괴로움에 대한 글을 읽었다. 우울증과도 비슷한 고통을 겪었다고 했다. 신문사 기자 시절, 퇴근 후 소설을 쓰는 것은 그에게 즐거움 취미였을 것이다. 일터에서의 괴로움을 잊고 즐겁게 몰입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직업인이 된 후 소설 쓰기는 즐거움과 동시에 괴로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 시간을 통과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에는 글쓰기에 대한 그의 꿈, 공상, 사고 실험이 있었다고 추측해본다.


"어떻게 지치지도 않고 질리지도 않고 꾸준을 글을 쓸 수 있는 거야?" 이 질문에 다시 답해보겠다. 나도 글을 쓰다보면 질리고 지치고 힘든 순간을 만난다. 그럴 때 얼마간 손에서 글을 놓기도 한다. 그리고는 다시 꾸역꾸역 노트를 펼쳐 메모를 하고 노트북을 열어 키보드를 두드린다. 나에게는 불확실하지만 믿고 싶은 꿈이 있기 때문이다. 평생 글을 쓰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 글로 내 생각을 뾰족하게 반짝거리게 벼리고 벼리겠다는 것. 생각하는 힘을 잃지 않고 다듬다보면 '생각하는 힘'이 큰 무기가 되어 줄 거라는 것. 나의 생각이, 글이, 기록이 언젠가 무너진 나를 일으켜 세워줄 거라는 것을 나는 언제나 굳게 믿는다.




독립은 실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능력있는 개인이 되는 것을 '독립'이라고 말한다. 경제적 독립이란 조직이나 타인에 귀속되지 않고 스스로 생활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춘다는 의미다. 경제적 독립, 정서적 독립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독립은 '생각의 독립'이라고 믿는다. 단순히 조직에 속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말 경제적으로 독립한 것일까? 회사를 다니면서도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사고 실험의 끝에서 나는 '생각의 독립'을 해야 진짜 스스로 우뚝 서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독립은 실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상대방이 나에게 실망할까봐 스스로의 생각을 바꿔야 한다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많아도 독립적이라고 볼 수 없다. 


투명한 과잉 정보의 시대, 기술이 단순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가 되었다. 효율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탁월의 시대, 매력의 시대이다. 개인이 가진 고유함을 매력적으로 표현하고 탁월하게 설득할 줄 아는 사람이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다. 고유함은 이미 만들어진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 필연적으로 누군가는 나의 고유함으로 인해 실망할 것이다. 그 순간, 실망의 눈빛을 똑바로 보고 외면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이상한 게 아니라 특별하다는 것을 진심으로 알아 주어야 한다. 용기있게 생각을 밀어붙일 줄 알아야 한다.




나는 계속 변한다


지난주 목요일에는 그룹 회식이 있다. 20명이 넘는 인원이 모였다. 코로나가 시작된 후 두 번의 이직을 했다. 직전 회사에서는 1년 반 동안 단체 회식을 한 번도 하지 않았으니 무려 2년 반 만의 회식이었다. 2년 반 동안 회식이 없는 삶을 만끽했었다. 공상을 즐기던 어린이, 언니가 용돈을 나눠준다고 해도 꿈쩍않던 어린이, 친구들과 나가 노는 것보다 혼자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 더 좋았던 나에게 회식이란 가당치도 않는 미션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회식에서 나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즐겼다. 입사 3개월 차인 나와 함께 처음 술을 먹은 동료들은 "메리, 이런 사람이었어요? MBTI가 INFJ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너무 외향적인 사람이잖아요!" 놀랍게도 정말로 즐거웠다. 그동안 알던 내 모습이 아니었다. 원래의 나라면 1차가 끝나자마자 스윽 자연스럽게 도망쳐 집에 가야했다. 12시 반이 넘을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고 술을 마시는 내가 어색하면서도 자연스러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생각했다. "나는 계속 변하는 구나." 어떤 상황에서 누구와 함께 하는냐에 따라서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하는구나. 앞으로는 나를 너무 규정하고 한계짓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생각 안에 갇혀있지 않기로 했다. 내가 못할 때 너무 스스로를 비난하지 말고, 잘 하고 있을 때 지나치게 우쭐해하지 않기로 했다. 능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이 있고, 잘 맞는 상황이 있는 것 뿐이다.


나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내 생각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세상이 자유롭게 재미있게 느껴졌다. 매일 밤 일기를 쓴 지 3개월이 지났다. 조금씩 변하는 스스로를 손으로, 눈으로, 마음으로 지켜본다. 가끔은 소리내어 읽기를 읽기도 한다. 나의 생각을 귀로도 경험한다.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힘. 나는 언제든 변할 수 있지만 이 힘만은 변함없이 지키고 싶다.


스스로 생각하고, 내 생각을 믿고, 생각 밖으로 나올 용기가 있다면 세상은 무서울 것이 없다. 요즘 시대의 진정한 능력은 생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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