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홀썸 딜리버리
기록은 응원이다. 좋아하는 베이커리 홀썸을 응원하고 싶어서 홀썸 베이커리 정기배송 메뉴 미식 리뷰를 남긴다. 전하지 못한 마음은 전해지지 않는다. 좋아한다면 좋아한다고, 맛있으면 맛있다고 말하며 살 거다.
홀썸 메뉴의 기다란 이름이 좋다. 단어가 하나 늘어날수록 서영 사장님의 고민과, 땀과, 시간이 늘어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한 단어도 빼먹지 말고 기록한다.
몇 년 전, 서영님께 코코넛 오일을 크림화해서 만드는 휘낭시에를 배운 적이 있다. 갓 구운 휘낭시에를 앙- 하고 베어 물었을 때 입 안에서 차르르 녹아드는 식감을 경험하고 "아이쿠! 이거 뭐예요!" 외쳤다. 바로 그 식감의 반죽이었다. 그 안에 달큰한 산딸기 콩포트와 피스타치오 아몬드 크림이 두텁게 들어있었다. 필링에게 자리를 내어주느라 얇아진 마들렌 반죽은 촉촉하면서도 바삭했다.
스콘 양쪽 끝을 두 손으로 잡고 반으로 잘랐다. ㅋㅋㅋ 웃음이 났다. 와! 흑임자랑 참깨가 이런 고소한 향이 나는구나? 시장 골목의 참기름집에서나 날 법한 고소한 깨 냄새가 좋았다. 서둘러 보리 커피를 타서 함께 먹었다. 오독오독 씹히는 흑임자와 참깨를 느꼈다. 음식을 먹을 때 온전히 음식에 집중하는 연습을 한다. 식사 명상이 별 게 아니다. 그냥 맛있구나~ 왜 맛있는지, 어떻게 맛있는지 생각하며 먹으면 식사 명상인 거다.
진하고 상쾌한 로즈마리 향을 맡으니 진관동 계곡을 걷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날 계곡 주변에 로즈마리가 피었던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묵직한 파운드에 박힌 로즈마리와 레몬향은 말한다. "이제 여름이 시작되고 있어." 트와이닝의 레이디 그레이를 우렸다. 얼그레이보다 버터리한 레이디 그레이 향과 파운드 향이 잘 어울린다. 이 문장을 쓰고서야 알았다. 왜 로즈마리 향에서 진관동 계곡이 떠올랐는지.
몇 년 전 여름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남편과 나는 진관동 계곡을 다녀와서 온 집안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로즈마리에 재운 스테이크를 구웠다. 더위가 기세를 떨치기 직전 아직 시원한 여름밤 공기, 싱싱한 로즈마리와 올리브유의 향, 차가운 계곡물의 기억이 하나로 합쳐졌던 거다.
그날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같이 계곡에서 한참을 놀다가 집에 와 저녁을 차려먹었던 게 즐거웠다는 감정만 남았다. 아, 또 하나의 기억이 떠오른다. 계곡에 발을 담그고 손원평 작가의 소설 <아몬드>를 읽었던 것. 소설은 이렇게 쓰는구나, 충격을 받았던 기억도 있다.
나에게 글을 쓴다는 건 행복을 쉽게 흘려보내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글은 좋은 친구가 되어준다.
나는 내가 좋다. 아니, 나는 내가 가끔 못나서 너무 밉다. 뉴스레터를 만들면서 나의 못남을 시시각각 마주한다. 세상에는 내가 잘하는 것 1개와 못하는 것 99개가 있는 것 같다. 잘하는 것 1개만 하고 싶은데 못하는 것 99개를 해야 하는 때가 오고야 만다.
지금까지는 99개의 단점에 빠져서 나를 미워했다. 나는 혼자 하는 일에는 자신이 있다. 그런데 누군가와 함께 뭔가를 만드는 일은 잘 못하고 흥미가 없다. 대학 시절 조별 과제가 있는 수업은 피하고 개인 리포트를 왕창 내는 수업 위주로 들었다. 내 의견을 굽혀야 하는 순간이면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좌절했다. 겉으로는 티를 내지도 못하고 괜찮은 척 웃어넘기고 뒤돌아 조용히 관계를 끊었다. 사회생활을 10년 한 지금은 너무 말한다.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를 달고 산다...ㅋㅋ)
지난달 상담에서 선생님이 말했다.
"알잖아요. 더 이상 세상이 그렇게 살아지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다 끊어내면 남는 게 없잖아요.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잃고 났을 때 마음이 어땠어요? 그렇게 놓아버린 것 중에 쥐고 있어야 할 가치 있는 것도 있었을 텐데."
"그래서 저는 무너지고 싶을 때 찾아갈 사람이 선생님밖에 없어요."
"지금, 갖고 싶은 게 있잖아요. 더 이상 잃는 삶을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가지는 삶, 가지고 싶은 걸 가지기 위해 감당하는 삶을 살아요, 스스로를 위해서."
좌충우돌의 시간을 지나, 나는 내가 온전히 나일 수 있는 세계가 어디인지 찾아냈다. 그곳에서 나는 제대로 숨 쉬고, 사랑하고, 자유롭다. 이 세계를 확장하기 위해서 내가 건너야 할 다리가 많다. 먼 훗날의 내가 그 과정을 기분 좋은 애씀으로 기억했으면 좋겠다.
매달 홀썸에서 뉴스레터 크루 회의를 한다. 늘 같은 메뉴를 시키지만 늘 다른 재료로 요리된다. 그걸 알아차리는 즐거움이 크다.
오늘의 수프 & 스콘
키쉬
계절 케이크
홀썸을 나오는 길, 서영 사장님이랑 아주 짧게 인사를 했다. 마지막에 서로 눈을 보면서 서영님이 가볍게 내 손에 주먹을 갖다 댄다. 그 온기가 아직도 남아있다. 찰나의 눈빛을 읽었다.
"나는 단단님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어요."
나도요.
아침부터 늦잠을 잤더니 오전 내내 쫓기는 기분이었다. 출근 전 아기자기하게 아침밥 차려먹는 것을 좋아하는데 아기자기 는커녕 밥 한 술도 뜨지 못하고 부리나케 일을 시작했다. 한참 테트리스 부시듯 일을 하다가 냉동실 빵 보관 칸에서 스콘을 꺼냈다. 평소에는 홀썸 미식 시간을 위해 메모장에 적어둔 메뉴 이름과 재료를 천천히 살펴보고 맛을 음미한다.
아, 이 재료가 들어가서 이런 향이 나는구나
오? 이 재료가 이렇게 풍부한 향을 가지고 있었어?
생각보다 식감이 바삭하네?
오늘은 부랴부랴 하루를 시작한 탓에 정신없이 스콘을 먹어버렸다. 마지막 한 입을 먹는 순간 그제야 아차차! 나 미식 리뷰 기록 남겨야 하는데?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고 오물조물 스콘을 느껴봤다. 음... 씹히는 맛이 있는데 약간 알갱이 느낌인데? 그리고 레몬향이 강하게 나고 굉장히 구움색이 연하다. 오.. 레몬 소금을 넣어서 만들었나 봐! 레몬 소금 스콘이야!
방금 메모장을 열어보니 떡 하니 이렇게 쓰여 있는 게 아닌가. 레몬 타임 스콘
타임...? 타임...! 이 들어갔구나? 미리 메모장을 봤다면 타임이 어떤 향인지 반죽 안에서 어떤 식감인지 더 잘 느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제주 유기농 레몬 제스트와 논밭상점의 유기농 타임을 넣어
버터리하게 구운 스콘
이 설명을 보고 나니 이번 스콘은 평소보다 바삭하게 부서지는 식감이라 버터 스콘 같다고 생각한 것을 떠올렸다. 비스킷 같기도 했다. 뭐, 어쨌든 맛있었다. 이거 또 먹고 싶은데, 다음 시즌에 메뉴가 소개되면 또 주문해야겠다.
아침 식사로 홀썸 키쉬만큼 딱인 메뉴가 있을까? 따뜻한 채소를 부드럽게 먹다가 바삭한 테두리 타르트지를 디저트처럼 먹으며 마무리한다. 키쉬는 커피와 함께할 때 궁합이 가장 잘 어울린다.
한참 일을 하다가 오후 3시쯤이면 과자 하나 꺼내 먹고 싶어 진다. 꽤 많은 일을 했지만 아직 많은 일이 남은 시간 스스로에게 주는 보상이다. 빵 가득 냉동고에서 가나슈를 품은 얼그레이 마들렌을 꺼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말이 있다.
"공부 못하면 기술이나 배워."
그들이 생각하는 기술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 내가 생각하는 기술은 예술과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요리 역시 예술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식감을 디자인하는 것은 기술로는 절대 할 수 없다. 공부 못하면 기술이나 배우라는 말은 분야를 막론하고 무엇 하나도 제대로 해보지 않은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뭐 하나라도 제대로 해본 사람은 어떤 분야도 무시할 수가 없다. 세상 모든 일은 누가 하느냐에 따라 예술이 될 수 있다.
홀썸 메뉴에 이토록 정성스러운 리뷰를 남기는 이유는 바로 그 '예술'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요리 예술가는 메뉴를 눈으로 보고, 냄새를 맡고, 한 입 베어 물고, 오독오독 입 안에서 느끼고, 꿀꺽 삼키고, 몇 시간 흘러 소화가 되는 그 모든 경험과 시간을 디자인한다. 홀썸도 그렇다. 이 스콘이 선사하는 경험도 재미있었다.
스콘 위 캐러멜은 소금의 짠맛이 살짝 도는데, 소금 향도 같이 느껴졌다. 솔티 캐러멜을 만든 걸까? 솔티 캐러멜은 바삭하고 버터리한 스콘 풍미와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촉촉한 블루베리 과육과 같이 씹는 식감이 좋았다.
홀썸 스콘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풍미와 식감, 딱 이 메뉴다. 구수한 통밀, 너무 달지 않은 캔디드 넛츠, 예기치 못한 순간 씹히는 크랜베리. 이 메뉴에 대한 설명을 찾다 보니... 잉? 소개서에 없는 메뉴인데? 사장님이 또... 사랑으로 넣어주셨구나 흐어엉... 홀썸은 사랑이야.
오전 스크럼 회의 30분 전, 냉장고에 해동시켜둔 갸또를 꺼내고 커피를 내렸다. 회의에서 공유하기로 한 자료를 아직 못 끝냈다. 지끈 거리를 머리를 싸맨 채로 자료를 뒤적이다가 갸또를 한 입 먹었다.
오... 오? 이 쑥 진짜 엄청 진하네? 완전 내 스타일이다.
다크 초콜릿 갸또는 쫀득보다는 깔끔한 식감이었다. "글루텐 프리 갸또인가 본데? 예전에 홀썸 사장님한테 배운 브라우니 맛이야." 생각하며 재료를 봤는데 역시, 쌀가루와 아몬드가루였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갸또를 우물우물 먹으면서 집중에 집중을 더해 자료를 마무리했다. 좋은 음식을 먹을 때는 맛에 집중해야 하는데 어쩔 수 없다. 지금 나는 자료를 마무리해야 하고, 에너지 급속 충전이 필요하고, 그 에너지원이 내 눈앞에 있으니까!
포크를 세로로 날렵하게 세워 캐슈 크림과 거문도 쑥 크림과 다크 초콜릿 갸또를 한 번에 쑥 베어 먹었다. 으라랏차! 오늘도 달려보자!!!
5월도 정말 열심히 보냈다.
밀도 있는 하루하루에 홀썸이 있었다. 일을 시작하기 전 아침, 일과 한가운데 오후, 정성 가득한 홀썸의 디저트를 먹었다. 서영 사장님의 피곤한 눈웃음, 은실님의 늘 나무처럼 든든한 인사가 떠오른다. 이제 시매님도, 또 새로운 스탭도 있으니 홀썸의 기억에 더 많은 얼굴들이 보이겠지.
도대체 왜 그렇게 진심인지 알다가도 모를 홀썸 크루를 떠올리며,
역시 도대체 왜 이렇게 진심인지 알다가도 모를 나의 하루를 생각한다.
피식, 웃으며 5월의 홀썸 기록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