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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Jul 09. 2022

아르헨티나 말벡과 살구 콩포트

모든 사건의 발단은 요가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들었던 팟캐스트 였다. <듣.똑.라> 에피소드 중 오늘은 뭘 들을까~ 고민하다가 눈에 확 들어오는 타이틀이 있었다.



입문자를 위한 '와인'의 거의 모든 것



덥고 습한 날씨 속에서도 건강하게 살아보겠다고 한시간 운동을 하고 나니 몸이 찝찝하게 찐득거렸다. 바깥 날씨는 비가 오는 건지 안 오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태로 꾸물거렸다. 버스를 기다리며, 버스를 타고 오며, 버스에서 내리며 와인 이야기를 들었다.



"와인 초보자 분들께 주로 추천하는 와인은
화이트는 소비뇽 블랑, 레드는 말벡이에요."



거기까지도 좋았다. 그런데, 진행을 맡은 최연수 기자가 직접 이마트 수색점에서 사왔다는 아르헨티나산 말벡을 쫄쫄쫄 따르는 소리는 듣는 그 순간! 오늘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르헨티나산 말벡을 먹어야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집에는 살구 콩포트를 만드려고 사둔 살구 한 봉지가 있었다. 그래, 살구를 손질하면서 말벡을 마시는 거야! 아니, 말벡을 마시면서 살구를 손질하는 거야! 좋았어!



모든 운이 따라주려는지 머리 속에서 반짝이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얼마 전 아파트 상가에 오픈한 맥주 보틀샵이 기억났다. 와인도 있을거야, 어쩌면 아르헨티나산 말벡도 있을지 몰라.



그리고 기어이 오늘의 운은 내 손을 들어주었다. 딱 한 병, 아르헨티나산 말벡이 진열대에 딱 한 병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 주방 바닥에 쭈그려 앉아 급하게 코르크 마개를 땄다. (왜 나는 와인을 딸 때마다 쪼그려 앉는 걸까.) 선물받은 고블렛 잔을 꺼내 팟캐스트에서 배운 대로 잔의 가장 뚱뚱한 부분 시작점까지 말벡을 따랐다.



자, 이제 시작해 볼까.


일렬 종대로 살구를 줄 세우고 손질을 시작했다. 손질한 살구를 냄비에 우르르 넣고 레몬즙, 소금, 메이플 시럽과 함께 졸였다. 잊을만 하면 주걱으로 냄비 바닥을 눌러붙지 않게 휘휘 저어주기만 하면 된다. 아무 생각이 필요 없는 단순 노동, 살구와 말벡이 어우러진 향기, 배경음악으로 선택한 브라질 노래까지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있을까?




정말이지, 나는 성공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이렇게 살구 콩포트를 만들며 말벡을 마시는 순간이 좋은 사람인데, 그런데 왜 콩포트를 만들자마자 다시 책장에 앉아 야근을 하고 있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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