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이직 일기
이직 준비의 시작은 포트폴리오 업데이트다. 포트폴리오를 쓸 때마다 나는 어떤 사람이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빠른 시간 안에 나를 매력적으로 보여주려면 나는 어떤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까?
내 커리어로 만들 수 있는 키워드
내가 드러내고 싶은 키워드
사람들이 나에 대해 떠올리는 키워드
이 세 가지 키워드가 조금씩 다를 것 같다. 하나씩 찾아보기로 했다.
구글 설문지를 만들어 인스타그램으로 홍보했다.
** 구글 설문지 질문과 답변 (총 11개의 답변을 받았다)
답변을 받기 전에는 두리뭉실하게 좋은 이야기만 써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있었는데 익명 설문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훨씬 솔직한 답변들이 도착했다.
키워드는 <계속하는 사람>의 것이다. 잘 어울리는 직무를 묻는 질문에 기획자 > 작가/강연가 순으로 응답이 많았다. 잘 어울리는 산업을 묻는 질문에 콘텐츠/출판 > 차/요리 순으로 응답이 몰렸다. 10년간 사회인으로서 가장 많은 시간을 쏟은 마케터, 회사원, 교육 직무를 대답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키워드는 시간의 양이나 성과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행동하고 말하면> 그 사람의 것이 된다.
내가 생각한 나와 남들이 보는 내가 다르다. 나와 잘 어울리는 산업을 묻는 질문에 제시한 4개의 선택지 [E커머스] [교육/커뮤니티] [콘텐츠/출판] [차와 요리]는 모두 내가 오래 해온 강점 분야다. 놀랍게도 10년 간 회사에서 해온 [E커머스]와 [교육] 업무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다. [콘텐츠/출판] [차와 요리]는 인스타그램에서 자주 드러낸 모습이었는데 인스타그램으로 홍보한 설문이어서 응답자 모두 그 모습을 잘 어울린다고 답했다.
잘하는 것을 묻는 질문도 비슷했다. [커뮤니케이션] [실행력] [리더십] [콘텐츠] [기획력] 모두 내가 잘하는 역량이라고 생각했는데 응답은 압도적으로 콘텐츠 (60%)가 높았고, 나머지 응답은 실행력 (40%)이었다. 나름 회사를 다니면 커뮤니케이션과 리더십에 내공을 쌓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남들이 보는 나를 맞출 필요는 없다. 같은 사실을 보고도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다. 보완점을 묻는 질문에 누군가는 <다양한 회사 경험이 좀 더 필요해 보인다>고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한 분야를 정하고 파고들라>고 했다. <하나를 포기하라>는 의견과 함께 <과감하게!! 용기를 내라>는 의견이 있었다. 그 누구에게 맞추든 모두에게 맞출 수 없게 된다. 결국 열쇠는 나에게 있다. 남에게 맞출 수 없다면 나에게 맞추면 된다.
좋은 것은 선택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흘려보내면 된다. 좋은 피드백만 걸러서 간직하기로 했다. 내 미래를 상상해달라는 질문에 간직하고 싶은 응원이 많았다.
자, 이제 내가 나설 차례다.
나를 멀찍이서 보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회사 다니면서 이것저것 일을 벌이다니. 용기 있어요."
나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이 설문에 이런 코멘트를 남겼다.
"더 용기 내도 될 것 같아요. 생각 많이 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봐요."
이직 상담을 시작할 때 커리어 코치님께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커뮤니티를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커뮤니티나 교육을 하는 스타트업으로 이직하고 싶어요."
내가 가진 키워드, 가지고 싶은 키워드, 가진 것처럼 보이는 키워드 중에 #용기와 #기획을 선택하기로 했다.
더 용기내고, 덜 생각하고, 하고 싶은 걸 다 행동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언젠가 하고 싶다고 마음먹은 일을 지금 당장 해보면 어떨까? 왜 꼭 중간 미션을 완수해야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 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해 왜 꼭 커뮤니티나 교육 스타트업 경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걸까.
지금 당장 해보자!
지금 당장 커뮤니티를 만들자! 앉은자리에서 그동안 생각했던 커뮤니티를 기획안으로 만들었다.
** 그 당시 만들었던 <함께하는 독학클럽> 기획안
키워드 설문지를 만들면서 리더십이나 회사원으로서의 자질에 대한 긍정 피드백이 많이 나올 줄 알았다. 오랫동안 나는 회사원이었으니까. 그러나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다. 사람들은 나를 기획자, 콘텐츠 메이커로 보고 있었다. 내가 그토록 갖고 싶어 하던 정체성, 그러나 너무 멀리 있어서 중간 경유 단계가 필요하겠구나, 싶었던 정체성이었다. 그런데 누군가는 내가 이미 그것을 갖고 있다고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물론, 지금의 역량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안다. 그러나 모두가 언제나 완벽하게 시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일단 해보는 게 맞는 사람이다. 해보면서 알아가고 발전시키고, 그러다 보면 무언가가 되지 않을까? 왜 꼭 1부터 10까지 차례대로 가야 하지? 그냥 10부터 시작하면 안 되는 걸까.
사이드 프로젝트를 처음 기획했던 때도 그런 마음이었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둘러앉아 차 시음 노트를 적으며 차 마시는 감각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런 모임이 없길래 "그럼 내가 만들어야지!" 하고 만들어 같이 할 사람을 모았다. 밤마다 공부하는 모임을 발견하고 너무 같이하고 싶었는데 멤버가 되지 못했다. "안 불러주면 내가 만들지 뭐!" 하고 공부 모임을 만들어서 온라인으로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첫 회사를 구하던 2012년부터 9년 간 단 한 번도 내가 원하던 회사에서 나를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일, 나에게 주어진 일부터 시작했다. 하고 싶은 일들은 그냥 혼자 따로 했다. 직업이 아니면 뭐 어떤가 싶었다. 사이드 프로젝트는 "안 시켜주니까 그냥 한다"에서 시작된 것이다. 회사 밖에서 부수입을 얻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대단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냥 시작해버리면 봐주는 사람이 적다. 모임을 알리고 신청자를 모으는 게 꽤 힘들지만 나름의 장점이 있다. 보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 좀 못 해도 괜찮고 방향을 이리저리 수정해도 부담 없다. 신기하게도 "그냥 시작해버리는 무모함"이 반복되자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뭐,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쟤... 뭐 돼?"
뭐라도 되길래 저러는 거 아닐까 하는 궁금이 내가 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여전히 이직을 하고 싶다. 요즘 잘 나간다는 회사에 다니며 사람들에게 "저, 여기 다녀요."라고 말했을 때 감추지 못하는 놀람과 부러움의 표정을 보고 싶다. 머리는 "유명하고 멋져 보이는 회사"를 향해 가는데 몸은 자꾸만 딴짓을 한다. 독서 모임을 만들고 차 워크숍을 기획하고 글을 쓴다. 나... 이래서 진짜 뭐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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