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이직 준비
왜 나는 늘 노력하는 것보다 성취하는 것이 적을까? 왜 나는 언제나 열심과 정성과 노오력만을 칭찬받아야 하는 걸까? 면접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기록을 남기는 과정에서 왜 나의 성장이 더뎠는지 이유를 알았다.
면접관 | 주도적으로 일하고 싶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는데, 주도적으로 일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나 | 의사결정 과정에서 제 의견을 표현하고 설득할 수 있는 환경을 의미해요. 지금보다 더 많이 책임지고 더 많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요. 그리고 회사가 하는 일이 개인의 가치관과 맞을 때, 나답게 일한다는 생각이 들 것 같아요. 대기업은 선례가 없으면 시도하려고 하지 않잖아요. 예를 들어 마켓컬리 서비스가 나오기 전에는 대기업 내부에서 누군가 새벽배송 아이디어를 내도 채택되지 않았을 거에요. 리스크가 있으니까요. 대기업은 리스크를 껴안고 도전하기보다는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한 관리 기능이 크다는 생각이 들어요.
면접관 | 보통 사람들은 스타트업에 오면 자신이 생각하던 것, 하고싶은 것을 실행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스타트업도 기업이에요. 리스크를 감수하고 싶은 기업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자본도 인력도 부족한 상황인데 어떻게 리스크 테이킹을 과감하게 하겠어요. 그런 점에서 대기업보다 더 심할 수도 있어요. 스타트업에서도 선례가 없는 시도는 하기 쉽지 않아요. 대기업은 체계적이고 정형화된 의사결정 과정을 가지고 있죠. 그럼 스타트업의 의사결정은 느슨하고 쉬운 걸까요? 아니에요. 오히려 체계적인 의사결정 프로세스가 없기 때문에 '영혼'을 투입해야 하는 거죠. (갈아 넣는다는 말을 순화하신 듯 했다 ㅎㅎ) 대기업에서 정해진 의사결정 프로세스를 수행하는 일에는 '나의 영혼'이 들어가지 않아도 되요. 정해진 절차 대로 논리적인 내용을 담으면 되죠. 그런데 스타트업에서는 어떤 일을 하기 위해 모두가 매료될 만한 방식과 내용으로 설득을 해야 해요.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에요. 매 순간 영혼을 담으면서 일한다는 거, 그거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에요. 그렇지만 정말 영혼을 담아 설득했고 그 설득이 타당하다면 대기업보다 빠르게 실행하고 자원을 집중할 수가 있죠. 정해진 속도와 자원 배분 원칙이 없으니까요.
나 |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차이를 본질적으로 뭐라고 생각하세요?
면접관 | 우선 질문을 바꿔야한다고 생각해요. 스타트업이라는 한 단어로 묶기에는 스타트업마다 일하는 방식이 너무 다르거든요. 질문에서 스타트업을 저희 회사로 바꿔서 대답할게요. 대기업, 특히 탑다운 방식으로 일하는 대기업에서는 한 사람이 한 명만 설득시키면 되요. 자신의 상사요. 그런데 이 곳에서는 모든 구성원을 설득시켜야 해요. 모두가 자신의 일을 오너십을 가지고 하고 있고, 수평적으로 커뮤니케이션 하니까요. 아주 길고 지난한 과정이에요. 모두를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논리 구조도 더 촘촘해야 하고 데이터도 더 많이 필요해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이해관계와 관점이 다르니까요.
사이드 프로젝트는 나에게 프리랜서 연습 과정이었다.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차이에 대해 알고 나니 프리랜서의 차이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대기업이 상사를 설득시켜야 한다면
스타트업은 회사 구성원 모두를 설득시켜야 한다.
프리랜서는? 내가 속한 시장의 모든 소비자를 설득시켜야 한다.
지금까지 이것을 몰랐기 때문에 나는 노력한 것만큼 성장하지 못한 것이다. 그동안 프리랜서는 개인의 뾰족하고 모난 매력을 강점으로 부각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인 기업가로서 나 스스로 의사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 지점에서 틀렸다.
프리랜서로서 나는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하는 잠재 고객 모두와 함께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특정 다수를 향해 내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그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같이 실행하고 개선해나가는 것이었다.
그동안 회사에서 일하며 동료들 각자가 가진 관점이 내 관점의 고유한 매력을 희석시킨다고 생각했다. 혼자 일해야 나답게 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반대였다. 그 수많은 목소리 속에서 나를 잃지 않으면서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 나답게 일하는 것이다.
세상의 목소리에 귀를 닫은 채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이 나다울 수는 있겠지만 돈이 되는 일로 성장할 수는 없다. 지속가능하려면 나답게 행동하는 일이 동시에 돈도 되야 한다. 돈이 되려면 돈을 줄 사람(시장, market)을 설득해야 한다.
회사 안에서 성장해야 한다면, 대기업이 아닌 스타트업으로 이직하려고 한다면, 내가 스타트업에서 얻을 수 있는 이것이었다. 내가 설득해야 하는 대상 범위를 넓혀보는 연습. 궁극적으로는 세상에 나의 이야기를 설득시켜야 한다.
일을 잘하는 것이 뭘까? 지난 10년간 나는 이 개념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일을 빠르고 정확하고 깔끔하게 해내는 것, 가능하다면 거기에 내 관점을 넣어보고, 결과물을 한 단계 발전시켜 보는 것.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수준을 넘어가면 '적당히 잘 하는 사람들이 많은 구역'에 진입하게 된다. 회사에서 나와 독립을 하려면 어느 한 분야에서만큼은 눈에 띄게 잘 해야 한다. 이 구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좌절을 하게 된다. 그동안 알고 있었던 성장 곡선과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성장 곡선은 이렇다.
성장을 향해 달리고 있는 사람들은 이 곡선을 떠올리면서 생각한다. 초반에는 성장이 더뎌도 임계치를 지나면 폭발적으로 성장한다던데... 난 어느정도 성장을 했는데 (책도 냈는데)... 왜 내 성장은 돈이 되지 못하는 거지?
이유는 성장곡선에 있다. 위의 성장곡선은 전체 성장곡선의 앞 일부 구간에 불과하다. 실제 성장 곡선은 이렇게 생겼다.
기존에 알고 있던 성장곡선은 전체 성장곡선의 앞 부분인 A구간에 불과했던 것이다. A구간은 [취미 영역]이다. 취미가 성장해서 전문가 구간 [돈이 되는 영역]이 되려면 꾸준히 INPUT과 OUPUT을 반복하는 B구간을 지나 성장이 더딘 C구간까지 지나 D구간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작은 성과들을 계속해서 내고 있는데 될듯 말듯 하면서 답답하게 터지지 않는 시점이라면, 이제 막 C구간에 진입한 것이다. 이 구간을 버텨서 조금씩이라도 계속 성장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독립 영역인 D구간에 도착할 수 있다.
내가 스타트업 이직을 결심하게 된 이유를 다시 생각했다. 잘 나가는 것 같던 B구간을 지나고 예상치 못한 정체기인 C구간에 돌입하자 벽 앞에 선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찾아도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변화는 이직이었다.
대기업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을 스타트업에서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실력을 쌓으면 세상이 나를 봐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주 잘못된 생각은 아니다. C구간을 돌파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시도해볼 만한 선택지이다.
그러나 스타트업으로 이직해서 열심히 일을 배운다고 해서 무조건 C구간을 돌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타트업 이직은 C구간을 돌파하기 위한 스몰 스텝 중 하나이다. 계속해서 정면돌파 방법을 찾다가 유튜브 드로우앤드류 채널에서 답을 발견했다.
C구간에 막 진입하면 비슷한 능력의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된다. 시장 전체 관점에서는 특출나지는 않지만 적당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공급이 많은 것이다. 그러니 내 몸값은 오르지 않는다. 시장에서 몸값은 실력을 반증한다.
이 상황에서 앤드류는 이런 대안을 제시한다.
이럴 때 사람들이 내 능력을 더 키워야 겠다고 생각하거든요?사실 그거보다 나를 수요로 하는 사람들을 늘리는 방법이 더 빠를 수도 있어요.내가 능력을 더 키워서 남들보다 더 앞서가는 것 보다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들어서내가 회사를 골라갈 수 있게 만드는 거에요. 이 방법이 더 쉬워요.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능력치를 더 키우는 것 보다는이걸로 브랜딩을 해서 나의 수요를 높이는 게 더 빠른 길이라고 생각해요.
스타트업 1차 면접 합격 소식을 듣고도 기쁘지 않았던 이유.
그럼에도 2차 면접을 보러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
2차 면접 결과를 기다리며 '붙으면 가는 게 나을까?' 고민하는 이유!!
C구간을 돌파하기 위해, 나를 브랜딩하기 위해 스타트업의 경험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금의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차별화 브랜딩 포인트를 찾기 위해 스타트업에 가고 싶었던 거다. 내 마음 속 설계자가 나를 그렇게 조종했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이게 맞나? 모르겠는데...' 생각하면서도 여기까지 온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아직 C구간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C구간을 지나 D구간에 도달했을 때 내가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없다. D구간의 명확한 모습을 미리 알면 그것에 맞추어 C구간을 상세하게 설계할 텐데 답답하다. 하지만 어차피 D구간을 미리 볼 수는 없다. 지금 내가 고른 선택지를 잘 헤쳐나가면 D구간에 갈 수 있을 거라는 자기확신을 가질 뿐이다.
지난 몇 달동안 하고 싶은 일을 돈이 되는 일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일들을 벌였다. 책을 냈고, 독서모임을 진행했고, 회사 돈으로 직무 교육을 받고 (SQL, 데이터, 디자인), 스타트업 이직을 준비했다.
그리고 지금 스타트업 최종 면접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어떤 모습의 C구간을 만들어나가게 될까? 너무 궁금한데 알 수 없어 답답하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며 오히려 명확해졌다.
성장이 더뎌서 답답한 내 마음이 너무나도 정상적이라는 것.
조금만 더 힘을 내서 가보면 빛을 만나리라는 것.
지금 주어진 기회 앞에서 너무 망설여진다면, 스스로의 직감을 믿어봐도 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