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이직 일기
지난 주에 면접을 봤다. 일주일 안에 연락이 온다고 했는데 6일째 연락이 오지 않은 것을 보니 불합격인가보다. 마음을 다잡고 회사일을 더 집중해서 하고 있는데 드르륵 휴대폰이 울렸다. 'OOOO 채용담당자' 저장해둔 이름이 액정 화면에 보였다. 어...? 합격이구나. 이럴수가!! 인지도가 있는 스타트업에 줄줄이 서류에서 탈락했던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면접 보시면서 리더(팀장)와 팀원 포지션 가능성을 모두 열어두신다고 하신 게 맞으시죠?" 그렇다는 내 대답을 듣고 담당자가 이어 말했다. "1차 면접 합격하셔서 2차 면접 일정을 안내드립니다."
2차 면접 일정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분명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너무 가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전화를 끊고나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익숙한 이 기분은 뭐지? OOO 서점 면접을 보고 나오던 3년 전이 떠올랐다. 1차 면접을 합격해놓고는 집에 오는 길에 2차 면접을 보러가지 못한다는 메일을 보냈다. 명확한 이유는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내가 보냈던 메일의 내용은 "내 콘텐츠를 만드는 데 집중하겠다."는 것이었다.
월요일에 합격 전화를 받고 내내 찜찜한 기분으로 며칠을 보냈다. 목요일 밤, 퇴근하고 새로 준비하는 프로젝트 업무를 했다. 다음주부터 격주 수요일마다 <함께하는 독학클럽>이라는 주제로 뉴스레터를 발송하기로 했다. 일과 일상 사이에서 고민하는 일하는 2030을 위한 콘텐츠를 만들어볼 생각이다. 밤 10시부터 새벽 2시반까지 뉴스레터에 들어갈 콘텐츠를 기획하고, 글을 쓰고 함께 넣을 추천 음악을 선곡했다. 너무 너무 너무 재미있었다. 밤새 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일단 내일 출근해야 하니 2시반에 가까스로 노트북을 덮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면접 준비할 때는 이렇게 재미있지 않았는데? 분명히 주말 내내 총 10시간 넘게 몰입해서 이력서와 커버레터, 포트폴리오를 만들면서 성취감이 있었지만 그건 뉴스레터를 만드는 것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해야할 일을 꽤 그럴듯하게 해낸 뿌듯함과 하고 싶은 일에 푹 빠져 몰입하는 쾌감의 차이였다.
그제서야 내 마음의 밑바닥이 보였다. 올해 4월, 어릴 때부터 꿈꾸던 출간 작가가 되었다. 오랫동안 혼자서만 쓰던 글이 세상에 나온다는 게 벅찼다. 이제 뭔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베스트셀러 작가는 못 되도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읽어주겠지? 잡지 인터뷰도 하고, 원고 청탁도 받고, 요즘 잘 나가는 유튜브 채널에도 출연하려나?
놀랍게도 내 일상에는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내 글이 부족한가 싶어서 하루에 한 편씩 글을 쓰기도 하고, 출판사에 다음 책 기획안을 써서 보내기도 하고, 독서모임도 만들었다. 이런저런 일들을 벌였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작가 단단이 아니라 회사원 제갈명 이었다. 일과 꿈은 다른 거구나, 현실은 이런거구나. 책을 내고 나서도 돈이 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은 다른 거구나.
하고 싶은 일이 돈이 되지 못한다는 현실을 마주하고 나자, 돈이 되는 일을 하고 싶게 바꿔야겠다고 생각이 다시 올라왔다. 정형화된 대기업에 다녀서 일이 재미없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동료들과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는 스타트업에 가면 좀더 재미있게 일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관심갖고 사이드 프로젝트를 해온 분야인 교육, 커뮤니티 스타트업에서 일하면 일에서 재미와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계획 세우는 것을 좋아하는 동시에 행동 또한 앞서는 편이다. 순식간에 스스로 따라가기가 벅찰만큼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타트업 채용 사이트를 뒤지며 여기저기 지원했다. 잘 쓴 이력서를 검색해서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도 새로 만들었다. 스타트업 이직을 도와주는 조인스타트업에도 이력서를 보내고 커리어 매칭도 신청했다.
숨가쁘게 달리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1차 면접 합격' 전화를 받고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해놓고서... 왜 마음이 이렇지?
퇴근 후 운동을 다녀와서 소파에 앉아 유튜브를 봤다. <요즘 것들의 사생활> 요즘 즐겨 보는 채널이다. '숭'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마케터 이승희님의 인터뷰였다. 인터뷰 마지막에 진행을 맡은 혜민이 물었다. "저희 채널은 어떻게 하면 더 성장 할 수 있을까요?" 숭이 능숙한 선배의 표정으로 답했다. "천천히 성장하는 게 전 더 좋은 것 같아요. 지금 잘 하고 있고요." 혜민의 눈빛이 흐려졌다. "천천히... 성장하면 너무 답답하잖아요."
뭐? 구독자가 2만이나 되는 채널 운영자가 성장을 고민한다고?
다음 영상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요즘 것들의 사생활>은 부부가 운영하는 채널인데, 투트랙 전략을 쓴다. 혜민은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으로 유튜브를 만들고, 남편 백구는 회사를 다니며 사이드잡으로 유튜브 일을 한다. 둘다 그만두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5년동안 묵묵히 콘텐츠를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퇴사했지만) 5년 동안이나 백구는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다. 내 기준에서는 구독자 2만을 보유한 잘 나가는 채널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몇달 전, 백구는 드디어 퇴사를 선언했다. 최근 콘텐츠를 통해 들어오는 일들의 규모와 영향력을 봤을 때 이제는 전업을 선택해도 될 만큼 성장했다는 것이다.
그 영상을 보고 알았다. 나에게는 허공에 발차기를 할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이다. 이제 막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관심을 갖네?'를 알아가는 단계인데, 벌써부터 사람들이 '와!!'하고 관심가져주기를 바랐다. 꺼내놓은 이야기를 더 발전시켜서 꾸준히 이어가고, 내가 하나의 미디어이자 플랫폼, 커뮤니티가 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콘텐츠를 처음 만들기 시작한 것이 2년 전이니 앞으로 3년쯤은 더 버텨봐야 하지 않을까? 겨우 이 정도 버텨놓고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이직을 선택해버린 게 아닐까.
지금 회사는 콘텐츠 만드는 일을 병행하기에 꽤 좋은 환경이다. 자율 출퇴근제, 유연 근무제, 수평적인 기업문화, 비교적 느슨한 업무량, 무엇보다 가까운 출퇴근 거리. 사실 지금 다니는 회사로 이직한 이유가 바로 사이드 프로젝트와 병행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기 때문이었다.
작년에 이직할 준비할 때도 지금과 비슷한 고민을 했다. 회사에서 의미를 찾을지 (재밌어 보이는 스타트업에 갈지) vs 워라밸이 보장되는 회사에서 사이드 프로젝트를 이어나갈지 저울질을 하다가 결국 사이드 프로젝트를 선택했다. 스스로 회사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원하던 스타트업 (배민, 마켓컬리)에 서류부터 탈락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는 혼자 일할 때 가장 효율이 높다. 아무리 유연하고 혁신적인 스타트업이라고 해도 혼자 하는 것 만큼 빠르게 실행하고 수정할 수는 없다. 내 일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팀으로 일을 할 때는 정리, 공유, 합의의 과정이 필요하다. 나의 장점은 호불호가 분명하고, 추진력이 강하고 결정이 빠르다는 것인데, 반대로 이 점이 회사에서는 단점으로 작용했다. 그래도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속도를 늦추고 나를 많이 다듬었다. 모난 부분을 다듬을수록 회사에서 좋은 피드백을 얻었지만 마음은 계속 허전했다.
나는 삐딱하고 뾰족하고 모난 나를 정말 사랑한다. 타고난 회사 인간이 얼마나 있겠느냐마는 나는 정말 타고난 비 회사 인간이다. 어쩔 수 없이 돈을 벌기 위해 회사에 다녀야 한다면 차라리 거대한 시스템과 체계가 개인 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대기업이 나은 선택이었다. OOO 서점 면접을 포기할 때 들었던 마음이 기억났다. 내가 하고 싶은 거 말고 대표님이 하고 싶은 걸 하게 되겠지? 그러면 가기 싫은데.
지난 2년 간 내 콘텐츠를 만들면서, 뾰족한 마음이 더 뾰족해졌다.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어떻게든 해버리고 말았다. 독서모임도, 글도, 워크숍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었다. 밤을 새도 좋았고, 주말이 없어도 좋았다. 그렇게 만든 결과물을 적어도 몇 명은 좋아해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OOOO 면접 합격이라는 기회를 덥석 잡기가 주저되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허공에 발차기를 좀더 해보는 것이 나은 선택일까. 회사에서 하는 일이 의미 없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나중에 내 커뮤니티를 운영하게 되면 온라인 사이트를 만들거고, 프로모션도 할 거고, 고객 데이터도 분석할 텐데 그게 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다. 지금 하는 일이 '진짜 내 일'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자 회사 일도 그렇게 답답하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게 제자리걸음인지 도움닫기인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겠지만 그것도 내가 만들기 나름이다. 이 다음 스텝은 제자리 걸음을 어떻게 하면 더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다.
이 중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걸까?
회사를 그만두고 하고 싶은 일을 한다
회사를 다니면서 회사 밖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한다
회사를 다니면서 회사 자원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