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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Dec 31. 2022

개인의 이야기는 어떻게 모두의 서사가 되는가?

<벌새> 각본집을 읽고

#1. 울음


울음이 콱 났다. 눈물이 아니라 울음이다. 눈물은 흘려버리는 해소의 이미지인 반면 울음은 꽉 막힌 억압의 이미지다. 애써 울음을 삼킬 때 목젖 아래가 먹먹하게 조여오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아마도 단어 [우울]에 쓰이는 한자 울 (답답할 울 鬱)과 동음어여서 답답한 이미지가 더해졌는지도 모른다.


<벌새>는 1994년, 16살 은희의 이야기다. 시대적으로 10년 즈음 차이가 나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장면과 감정을 은희에게서 떠올렸다. 여전히 그렇지만 그 시절에 가정과 학교는 권위와 억압을 재생산하는 공간이었다. 나는 조용하고 말 잘 듣고 공부 잘 하는 착한 아이인 척 가면을 쓴 채 권위와 부조리에 분노하는 두 얼굴의 아이였다.


기억에 남는 장면이 몇 개 있다.


햇빛을 받으면 머리카락 색이 빠져 갈색으로 변하는 나는 종종 학생부 선생님에게 끌려갔다. "너 염색했지?" 무서운 눈으로 추궁하는 학생부 선생님에게 교무실의 다른 선생님들이 지나가며 한 마디씩 한다. "아유, 선생님! 쟤는 공부하는 애에요. 원래 머리색이 저렇대요." 학생부 선생님의 날카로운 눈빛이 순식간에 풀리는 것을 본다. "그래? 야, 너 어서 가서 공부나 해라."


학기말 시험 직전 지리 수업 시간이었다. 시험 범위 진도는 이미 끝났고 선생님은 조용이 자습을 하라고 했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소곤대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커졌다. "조용히! 야! 거기, 너 나와." 갑자기 한 학생이 앞으로 불려 나가더니 앞뒤 설명도 없이 선생님에게 뺨을 맞았다. 얼결에 매를 맞은 그 아이는 넋이 나가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은 그 아이를 불러 타이르듯 말했다. "애들 조용히 시키려고 너 하나 본보기로 때린 거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라."


요즘 학교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를 정희진의 해설에서 찾았다.


이 영화의 역사성은 1994년 가족과 학교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통증과 폭력의 일상을 그려냈다는 데 있다. 영화의 배경은 25년 전이지만, 극중 대사대로 "말도 안 되는" 일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오늘날 교실에는 "서울대 가자"라는 구호가 없다. 노동과 고용의 종말 시대에는 노동자를 훈육, 배출하는 군대와 학교는 쓸모가 없다. 그러니 곳곳의 교실 붕괴는 당연하고, 그 무섭다는 '중 2현상'은 대학 강의실로 이동했다. 


구호와 장소가 대체되었을 뿐, 여전히 사회에는 집단몽이 존재한다. 그 집단몽을 유지하기 위한 권위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학교, 가정, 선생님, 권위... 이 자리에 지금은 무엇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돈 밖에는 명확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책은 영화 <벌새>의 각본과 해설, 그리고 김보라 감독과 앨리슨 백델의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 영화 성평등 테스트로 유명한 백델 테스트의 그 앨리슨 백델이다. 책표지에 '김보라 쓰고 엮음'이라고 적힌 것을 보니 [각본-해설-인터뷰]는 김보라 감독이 계획한 구성인 듯 하다. 바로 그 순서와 흐름 때문에 벌새에 빠져들어 기어이 울음으로 갔다.


이런 경험 때문에 웬만하면 해설이 포함된 소설을 읽으려고 한다. 이야기는 삶에서 나오지만 삶을 다 설명하지는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 말해지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 독서다. 그 보물찾기는 매번 헤매는 도중에 종료되어 버린다. 나는 그런 불확실한 게임에 자주 흥미를 잃는다. 게임이 끝난 후 보물이 여기에 있었다고, 이렇게 숨겨두었다고 설명을 듣고 난 후에야 게임의 매력을 다시 알게 된다. 알아야 보이는 것을 찾으려면 배울 수밖에 없다.



#2. 우연


이 책은 상담실 서가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이번 주는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1년 반 동안 격주로 발행하던 뉴스레터의 마지막 레터를 발송한 주였다. 정기적으로 스스로를 압박하던 '해야 하는 일'이 사라지고 나자 당분간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러고 싶어서 그만두기로 결정한 것이기도 했다. 대학 입시가 끝나고 비로소 입시 문제집이 아닌 소설책을 집어드는 마음으로 서가에 꽂힌 <벌새>를 빌려왔다. 읽어야만 하는 책이 아닌 책을 읽자는 마음은 나의 다짐이었지만 그게 <벌새>인 것은 우연이었다.


그날 집에 돌아와 벌새를 읽으면서 깨달았다. 가을 내내 번아웃에 시달렸던 이유는 우연을 허용하지 않는 빈틈 없는 마음 때문이었다.


우연한 독서로 치유를 받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대부분 삶을 압도하는 거대의 문제의 본질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평소에는 잘 인지하지 못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이야기에서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비로소 마주하게 된다. 


나의 번아웃은 100% 의도된 효율적인 삶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독서 공동체 그믐의 김혜정 대표도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Q. 숨겨진 좋은 소설을 찾는 비결이 있는지?

A. 도서관에 가서 서가를 걷다가 아무 책이나 5권 정도 뽑는다. 후루룩 훑고 별로다 싶으면 끝까지 보지 않는다. 그래야 다음 책을 읽을 수 있다. 핵심은 부담감을 버리고 다양하게 읽는 것이다. 온라인에서 이런 책들을 발견하는 건 한계가 있다. 메인 화면에 나올 수 있는 도서 수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서관 책장에서는 눈길 한번으로 몇 십권의 책을 볼 수 있다.


코로나로 재택근무를 하면서 일상의 많은 부분을 온라인으로 옮겨왔다. 독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전에는 전자책으로 책을 보면 집중이 잘 안 된다고 느꼈다. 종이책을 사거나 도서관에서 빌려봤다. 그러다 코로나로 도서관 휴관이 길어지면서 이북 리더기와 아이패드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책을 고르는 과정도 온라인에서 이루어졌다. 알고리즘과 검색은 우연을 허용하지 않는다. 온라인에서는 의도와 목적에 의해 선택이 통제된다. 효율적이고 깔끔하다. 그러나 일상을 더욱 재미있고 따뜻하게 만드는 것들은 비효율과 우연에서 나온다.


긴 코로나의 시대의 출구에서 오프라인과 로컬이 트렌드로 부상하는 이유도 비슷할 것이다. 우리가 오프라인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우연성이 개입할 빈틈 때문이다. 여기에 오프라인 비즈니스의 성공도 달려있다고 본다.



#3. 밑줄 친 문장



최은영 작가의 해설 중에서

어른이 된 나는 이제 안다. 고통은 파도처럼 마음에 들이쳤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한다. 쉼 없이 마음으로 들어와서 자국을 내고, 다시 물러나는 것처럼 보였다가도 돌아온다. 나의 잘못 때문인 경우도 있지만,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노력했는데도, 잘해 보려고 했는데도 겪어야 하는 상처들이 있었다. 어른이 된 나는 상처받으면서도 내가 나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게는 어느 정도의 힘이 있고, 내 힘으로만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있다면 전문가의 도움도 받을 수 있고,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낸다면 누군가는 나를 도와주리라는 믿음도 있다. 그러나 은희 시절의 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상처는 회복되지 않을 것만 같았고, 내가 누구에게도 맞설 수 없을 정도로 약하게 느껴졌으며, 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곧 나 자신의 가치로 여겨져서 작은 일에도 쉽게 다쳤다. 그건 사소한 일들이 아니었다.


정희진 작가의 해설 중에서 

이 영화의 역사성은 1994년 가족과 학교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통증과 폭력의 일상을 그려냈다는 데 있다. 영화의 배경은 25년 전이지만, 극중 대사대로 "말도 안 되는" 일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오늘날 교실에는 "서울대 가자"라는 구호가 없다. 노동과 고용의 종말 시대에는 노동자를 훈육, 배출하는 군대와 학교는 쓸모가 없다. 그러니 곳곳의 교실 붕괴는 당연하고, 그 무섭다는 '중 2현상'은 대학 강의실로 이동했다. 삐삐를 스마트폰으로 바꾼 삼 남매와 그 친구들은 지금쯤 1인 가구로 살면서 홀로 누워 SNS 피드를 텅 빈 눈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이 영화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벌새 2>와 이미 만들어진 <소셜 포비아> 혹은 <기생충>의 프리퀄이 아닐까.


앨리슨 백델과 김보라 감독의 인터뷰 중에서

 <벌새>는 세상 속에 스스로 설 자리를 찾는 이야기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쉽게 눈치채기 어렵지만, 굉장히 정치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내 어린 시절의 특정한 한 시기에 모든 놀라운 일이 한꺼번에 벌어졌던 때가 있었다. 아버지가 누군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게 될 뻔한 적도 있었고, 그 즈음 어머니는 동성애적 욕망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오스카 와일드의 연극에 출연하고 있었고, 나는 첫 생리를 했다. 사회적으로는 워터게이트사건이 터졌는데, 모두들 거짓말을 하고 진실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이 모든 일이 두 달 남짓 사이에 벌어졌다. 이상한 동시성 synchronicity 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위대하고도 이상한 동시성'을 발견해 내야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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