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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Jul 30. 2019

안 되는 숫자를 부여잡고

회사일은 온통 숫자 온갖 수치

"어떤 부서에 가고 싶어요?"

"숫자 다루는 곳 빼고는 어디든 상관 없습니다."


첫 회사에서 신입사원 교육이 끝나고 배치면담이었다.


문학소녀 - 문과 - 인문대 불어불문학과


숫자에는 흥미가 없었고, 수학은 어려웠다. 유일하게 좋아하는 숫자는 돈이었고, 그마저도 돈을 세고 모으는 정도에 그쳤다. 투자나 주식, 비트코인 같은 이야기는 재미가 없었다. 한때 경제학에 관심을 가졌지만, 행동경제학이나 경제심리학 분야에서 다루는 일부 사례들에 한정된 관심이었고, 그래프가 나오자 발길을 돌렸다.


면담이 끝나고, 교육부서로 발령났다. "리더쉽, 마음을 여는 영업, 통찰, 마케팅" 이런 단어들을 주로 다루었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다뤘던 숫자는 교육비 예산, 교육 대상자 정리 정도였다. 일에서 성취감을 느끼는 법, 효율적으로 업무 처리 하는 법, 상사와 갈등을 해결하는 법, 주로 이런 주제들을 고민했다. 업무에 만족했고, 역시 나는 인간의 심리와 행동에 대해 연구하는 일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평생 기업교육 분야에서 일해볼까, 대학원에 진학해볼까 고민하던 시절이었다.


뜻하지 않게, 아니 다행히 뜻한대로 이직을 했다. 따지고 보면 이직은 아니었다. 애매한 경력 탓에 다시 신입사원 공채로 들어갔다. 첫 회사에서 보낸 꼬박 2년의 시간을 지워내고 다시 시작했다. 두 번째 팀 배치 면담이었다.


"어떤 부서에 가고 싶어요?"

“뷰티 MD로 일하고 싶습니다.”


사실 반은 진심이었고 반은 거짓이었다. 나는 첫 회사가 싫었던 것이지, 나의 첫 업무가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인사, 교육 업무에 대해 애정이 있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두번째 회사 면접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괜찮은 회사 아니었나? 왜 그만뒀어요?"

"홈쇼핑 MD가 되고 싶었습니다. 2년 전에도 이 회사에 지원했지만 떨어졌어요. 처음 취업준비를 할 때는 불안했고, 붙은 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뒤늦게라도 MD에 대한 저의 열정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꼬박꼬박 월급을 받던 직장인이 백수가 되면, 꿈이 거추장스러워 지기도 한다. 백수 6개월차에 나는 꿈이 뭔지, 하고 싶은 게 뭔지 잊었었다. 그냥 다시, 돈을 벌고 싶었을 뿐이다.


온라인 마케팅팀.

두 번째 회사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이곳은 철저히 숫자의 세계였다. 마케팅이라고는 하지만, 마케팅의 넓고 깊은 영역 중에서 '프로모션'만을 다루는 팀이었다. 매출, 이익, 적립금, 비용, 비용률 이런 단어들을 다룬다. 프로모션 페이지 디자인 기획, 컨셉 기획 등등의 업무도 있지만 나의 성과 평가지표는 매출과 비용률이었다.


숫자의 세계에서, 난 잘 해낼 수 있을까.


어느 분야이든, 누군든 그렇듯이 기계적으로 2년을 버티고 나니 한결 편해졌다. 어짜피 회사에서 다루는 지표는 정해져 있고, 상사들도 내가 아는 범위 이상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나보다 더 많이 아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 그들의 상사가 하는 생각이 무엇인지 정도이다.) 모든 숫자는 회사 시스템 안에 있었고, 조금 시간을 투자하면 보기 쉽게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숫자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여전했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


이렇게 숫자를 극복하게 되는걸까


조금씩 경력이 쌓이고 좀더 많은 업무들을 맡게 되었다. 접하는 모든 숫자를 공부할 시간이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그때그때 '감'으로 파악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일을 잘 한다는 것은 효과가 아닌 효율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꼭 필요한 몇몇 순간들이 아니면, 나는 모든 것을 알려고 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축적한 경험과 지식의 도움을 받아 '감'을 잡으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감으로 쉽게 잡히지 않았다. 내가 직접 분석하고 정리한 숫자가 아니면, 멀게만 느껴졌고, 남들은 머릿속에서 휘릭휘릭 빨리도 계산하는 것들이 내 머릿속에서는 한없이 더뎠다. 대충 얼버무리고 자리로 돌아와 확인해보면 틀린 내용인 경우가 있었다. 뻔뻔한 얼굴로 대처하다가도 숫자가 바삭한 사람들에게 걸려 민망한 일도 있었다.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맞는 분야가 있는데, 숫자 하나 못한다고 이렇게 회사 생활하기가 어렵다니. 숫자가 덜 중요한 팀으로 옮겨볼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숫자의 마법에 길들여졌다. 숫자는 간단하다. 유리한 숫자만 있으면 설득하기도 쉽고, 편하게 인정받을 수 있다. 마치 학벌이나 집안, 외모 같은 것이다. 입 아프게 여러 말 할 필요가 없다. 상사들이 숫자에 목을 메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불안한 사람들은 숫자 뒤로 숨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래 생각하고 깊이 고민하기 싫어한다. 그래서 명쾌해 보이는 숫자를 믿는다. 사람들이 믿는 숫자만 가지고 있다면, 그들을 쉽게 움직일 수 있다.


지금의 세상은 무언가를 팔고 돈을 벌어서 일상을 유지한다. 직업은 '돈을 벌기 위해 내가 가진 무언가를 파는 일'의 그 무언가 이다. 요리, 강연, 글, 운동, 외모, 무엇이 되었는 팔 수 있어야 직업이다. 팔 수 없는 무언가를 하거나 만드는 일은 '취미'라고 불린다.


얼마나 팔았는지, 얼마나 사야할지를 판단하고 기록하고 정리하는 데는 '숫자'의 도움이 절대적이다.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숫자 덕택에 탄생했다. 자본주의의 중심인 '회사'에서 숫자를 하지 않고는 지내기란 쉽지 않다.


사람들은 숫자를 좋아하고, 또 필요로 한다. 스스로를 '숫자에 강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다들 숫자에 익숙하다. 50% 세일에 눈이 돌아가고, 150% 신장에 고개를 끄덕이고, 팔로워 수를 매일 센다. 


그래서,

안 되는 숫자를 부여잡고

온통 숫자뿐인 이곳에서 온갖 수치를 뒤적인다.


아직, 회사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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