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 플랫폼 ‘헤이조이스’의 이나리 대표님으로부터 메일 한 통을 받았다. 3기 인스파이러가 되어달라는 달콤한 요청과 함께 헤이조이스 파티에 초대한다는 것이다. 인스파이러는 헤이조이스 무대에 선 연사 중에서 멤버들의 사랑과 존경을 많이 받은 연사들이 모인 그룹이다. 늘 애정을 갖고 지켜보는 플랫폼에서 강연을 했던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웠는데 인스파이러 제안이라니! 길게 고민하지 않고 YES를 외쳤다.
그런데 잠깐, 헤이조이스 네트워킹 파티에 가야 한다고? 1,000명이 넘는 사람들과 통성명을 하고 명함을 주고받는 그런 자리에 가야 한다고!?! 호기롭게 수락 메일을 보내고 나서 며칠을 끙끙댔다. 나의 MBIT를 소개하자면 INFJ로, 여러 번의 테스트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다른 MBTI 유형을 본 적이 없는 찐 내향인, 극내향인이다. 어릴 때 남들 다 설레서 잠 못 이룬다는 소풍 전날에 나는 부담감으로 잠에 들지 못했다. 버스에서 누구랑 앉아야 하지? 장기자랑 시키면 어떡하지? 온갖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늦은 밤까지 뒤척였다.
10년 넘게 회사 생활을 하는 것만으로도 대견한 내가 파티라니! 네트워킹 파티라니! 그것도 인스파이러로 참여하는 파티라니!!! 나… 잘할 수 있을까?
회식을 할 바에야 야근을 하는 사람, 일주일에 한 번 약속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혼자 회사 근처 카페에서 점심을 먹는 사람, 근무 시간에 하얗게 불태우고 퇴근하고 잽싸게 뛰쳐나가는 사람, 바로 나다.
“주어진 일만 깔끔하게 잘하면 되지! 일만 잘하면 아무도 뭐라고 못 할 거야!” 네트워킹 안 하고도 잘 살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주니어 시절까지는 ‘네트워킹 사절’을 이마에 써붙이고 다녀도 회사생활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스멀스멀 나도 모르게 연차가 쌓이면서 고민이 시작되었다. 이직을 거듭하면서 보수적인 전통 대기업에서 점점 업력이 짧은 스타트업 기반 회사로 옮겨갔다. ‘일’이라는 게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 속에서 산업의 구조, 회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 팀과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건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변화의 파도 속에서 ‘내 일’의 경계와 정의가 계속 바뀌었다. 지금 해결해야 할 핵심 문제, 회사가 집중해야 할 사업, 팀의 KPI가 더 이상 위에서 밑으로 찍어 누르듯 내려오지 않았다. ‘일을 잘한다는 것’의 의미도 마찬가지였다.
일을 잘한다는 것은 지금 중요한 핵심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능력이다. 지금 중요한 핵심 문제는 결국 ‘사람들이’ 만들어낸다. 일을 잘하려면 일단 agenda setting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agenda가 무엇인지 알려면 agenda를 쥐고 있는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거다.
11년 차 직장인이 된 나에게 네트워킹이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어쩌면 이 시점에 헤이조이스 인스파이러 제안과 파티 초대가 온 것은 “이제 진짜 네트워킹 해야지.”라는 시그널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부담스럽고 어색하고 마음이 무거울까? 피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피하고 싶다!
누구나 자연스럽게 자신의 약점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자신만의 해결책을 찾아낸다. 오랫동안 나의 약점을 체력과 예민함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찾은 해결책은 ‘철저한 준비’였다. 에너지가 부족하고 자극에 민감한 나에게 돌발 상황은 가장 큰 어려움이다. 예상 가능한 경우의 수를 미리 생각하고 대비하면 돌발 상황에서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다.
사회는 점점 다양성을 포용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지만 외향성을 향한 신화만큼은 여전히 건재하다. 낯선 사람과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소위 ‘인싸’가 요즘에도 여전히 좋은 인재로 인정받는다. 내향인의 바이블이라고 불리는 책 <콰이어트>를 보면 세상의 1/3은 내향인이고 수많은 내향인들이 사회에서 자신만의 커리어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런데 왜! 잘 나가는 사람과 외향성은 자주 동일시되는 걸까? 내향인들이 외향성이 요구되는 자리에서 꼭 외향인인 척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나다움을 잃지 않고 관계 맺을 때 더 오랫동안 발전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믿는다.
파티에 임하는 나의 목표는 <외향인 사이에서도 나를 잃지 않고 나답게 관계 맺기>다. 목표를 위해 준비한 3가지를 소개한다.
내향인은 말보다 글이 편한 소통 도구다. 대면보다 비대면 환경에서 더 자유롭고 활동적이다. 자칭 내향인 마케터인 배달의 민족 김상민 마케터는 “내향인 중에 만나면 조용하지만 온라인에서는 누구보다 활발한 키보드 워리어가 많다.”며 자신 역시 키보드 워리어라고 소개했다. 온라인 활동에 활발한 내향인은 SNS 관리도 꽤 잘한다. 인사하고 대화 나누는 10분 동안 강렬한 인상을 남길 자신은 없지만 SNS에 차곡차곡 쌓인 기록은 믿고 내놓을 수 있다.
파티에 가기 전 명함에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적었다. 준비한 명함을 모두 나누고 오지 못했지만 명함을 받은 분들이 한 마디씩 건넸다. “인스타그램 아이디 적어오신 것, 한 수 배웠어요.” “편하게 연락 주고받기에 인스타그램이 좋은 도구인데, 좋네요.”
오늘 명함을 교환한 분들 중에는 자신을 소개하는 문장을 적어온 분, 회사 명함 말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별도의 명함을 만들어 온 분도 있었다. 와, 이건 내가 한 수 배웠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만나고 싶은 사람, 궁금한 사람은 정해져 있다. 물론 예기치 못한 만남이 반가운 인연으로 연결될 수도 있지만, 즐거운 대화를 나누려면 최소한의 공통분모는 필요하다. 미리 연사 이력과 SNS를 살펴보고 가자. 그러면 네트워킹 존에서 그 연사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자연스럽게 공통 키워드를 찾으며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다.
지난 파티 리뷰를 검색해 보니, <강연을 들을 수 있는 좌석>과 <정해진 좌석이 없는 네트워킹 존>으로 공간이 나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행사 4시간 내내 네트워킹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강연과 네트워킹존을 왔다 갔다 하게 될 거다. 일찍 가서 강연 듣기 좋은 메인 좌석을 확보하기로 했다. 행사장에 도착하니 인스파이러를 위한 앞자리 좌석을 미리 준비해 주셨지만 그럼에도 일찍 간 덕분에 여유롭게 부스 구경도 하고 마인드 컨트롤을 할 수 있었다. 강연이 시작되고 뒤를 둘러보니 좌석이 없어서 서 있는 분들도 많이 보였다. 역시 이런 행사는 일찍 가야 한다.
더 넓은 세계로 나가라는 말의 진짜 의미는 ‘나다움을 지키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동료를 찾으러 가자.’는 의미다. 단순히 연락처를 교환하는 사이가 아니라 나의 가치관과 성장 과정을 함께할 수 있는 뜻이 맞는 동료를 찾아서 함께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것이 네트워킹이다. 매일 만나는 직장 동료,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도 좋지만 가까운 사이일수록 내밀한 가치관을 공유하기 어렵다. 게다가 우리의 취향과 성향은 시시각각 변한다.
새로 디깅 하고 싶은 주제가 생겼을 때, 친구를 붙잡고 이야기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이럴 때 나의 관심사를 나눌 수 있는 새로운 친구를 만난다면 서로 지치지 않고 즐겁게 깊은 우물을 팔 수 있다. 우리가 만나야 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판이 커지면 모이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고 자연스럽게 가치관과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을 만날 확률도 높아진다. 네트워킹을 하라는 것은 그 확률을 높이라는 의미다.
오히려 내향인일수록 내밀한 취향과 성향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한다. 모든 내향인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내향인은 외향인보다 쉽게 에너지가 소진되곤 한다. 제한적인 에너지를 잘 관리하며 살아가려면 시간과 에너지를 꼭 써야 할 곳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 내향인들이 사람 싫어해서 모임에 안 나가는 게 아니다. 진짜 뜻이 맞는 사람들과 만나면 밤새 이야기할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다. 뜻이 맞는 사람이 아니면 금방 방전된다는 게 문제여서 그렇지. 내향인들은 언제나 가치와 관심을 나눌 메이트를 찾고 있다. 그러니 서로를 알아볼 수 있도록 부지런히 손을 내밀고 흔들어야 한다.
부족한 체력, 쉽게 방전되는 마음 에너지, 작은 자극도 크게 받아들이는 민감성. 나의 내향적인 특징을 오랫동안 미워했다. 20대 때는 외향인이 너무 부러웠고, 따라 해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30대가 되고 체력의 한계를 더욱 자주 느끼면서 깨달았다. 결국 나는 나대로 살아야 한다. 어차피 나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미워하지 말고 외면하지 말고 오롯이 인정해야 한다.
모든 성향은 가치중립적이다. 중요한 것은 그 성향을 어떤 성격으로 만드는지에 달려있다. 내 격은 내가 선택하고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김이나 작사가가 “잘 관리된 콤플렉스는 그 사람의 결이나 질감 된다.”라고 했던 말에 공감한다.
내 콤플렉스를 나다운 질감으로 만들기 위해 내가 선택한 도구는 <루틴과 기록>이다. 하루치 에너지양은 적지만 에너지를 꼭 몰아서 쓸 필요는 없다. 밤새 공부할 체력이 없다면 벼락치기 대신 매일 조금씩 공부하면 된다. 회사 다니며 일주일에 한 편씩 브런치에 글을 쓰고, 밑미에서 매일 공부하는 모임을 이끌고 있다. 이 기록이 쌓이고 쌓이면 10년 후 얼마나 든든한 무기가 될지 안다.
생각보다 꾸준히 기록하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작년에 퍼블리로부터 포트폴리오 콘텐츠 연재를 제안받았을 때 퍼블리 콘텐츠 매니저가 참고한 내 브런치 글은 지금 보면 부끄러울 정도로 엉성하다. 이 글을 보고 콘텐츠 만들자고 제안을 했다니… 신기한 마음에 여기저기 포트폴리오 콘텐츠로 검색을 해봤다. 놀랍게도 회사에 다니며 차곡차곡 포트폴리오를 정리하고 이 과정을 콘텐츠로 만든 사람이 별로 없었다. 루틴과 기록은 쌓을수록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물론 매일 많이 쌓으며 폭풍 성장하는 메가톤급 인재도 있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고, 사람의 역량은 모두 다르다. 오늘 인스파이러 좌석에서 만난 대기업 상무님, 대표님, 교수님들을 보면서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저분들의 경험과 역량을 따라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하고,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아야 한다.
내가 원하는 삶이 대기업 임원, 창업가, CEO, 교수인가? 생각해 보면 아니다. 물론, 멋지고 대단한 일을 하는 그분들을 존경한다. 능력만 있다면 어떻게든 그 길을 따라가고 싶다. 그러나 그분들이 만든 과정의 치열함이 아닌 결과만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몫만큼 치열하게 일하고 고민하고 기록하면 된다. 그 결과가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도 모른다. 10년 후 내 모습이 생각만큼 멋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다운 치열함으로 만들어낸 결과라면 그것은 내 몫이다.
책 <퇴근길의 마음> 이다혜 작가는 스스로를 어떤 기준으로도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내향성의 현신인들 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일할 때의 나는 같이 일하기 좋은 사람이면 될 일이지 “저는 내향적인 편인데요”라고 굳이 부연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 일을 잘 해내는 데 있어서 타고난 성격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일이 되게 만들면 될 일이다. 외향인 중심 사회에서 1/3의 내향인들은 적절히 스스로를 숨기면서 세상에 맞추며 살아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세상에 맞추면서도 나다움을 잃지 않는 “ 자신만의 해법을 찾아나갈 때가 되었다.
일하면서 만난 수많은 협업 상대를 떠올려보라.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 중에는 분명 내향인도 포함되어 있다. 성향을 막론하고 모두가 좋아하는 협업 상대는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줄여주는 사람이다. 커뮤니케이션을 꼭 만나서, 밥을 먹으며, 또는 술 한잔을 기울이며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명확하고 배려심 있는 메일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우리에게는 자신만의 해법과 무기가 분명히 있다. 그것을 찾아서 갈고닦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부디 그 길에서 지치지 않고 함께 계속 걸어가기를 바란다. 이렇게 매일매일 외향인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나의 이야기가, 겉으로 괜찮아 보이는 저 사람도 속으로는 나처럼 끙끙 앓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조금은 위안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네트워킹 파티 기록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