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간과 여행
“낡고 오래된 것을 사랑하는 마음”
이번 여행의 주제다.
김연수 소설가는 단편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서 세 번째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첫 번째 삶]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흐른다. 현재에는 과거의 흔적이 남아있고, 미래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인간의 비극은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 삶] 시간은 미래에서 현재로 거꾸로 흐른다. 마치 죽기 직전 파노라마처럼 지나간 삶을 반추하듯이 미래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세 번째 삶]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흐른다. 그러나 이미 첫 번째, 두 번째 삶에서 미래를 경험했기에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모두 기억한다.
알 수 없어서 불안하고 두려운 미래는 결국 평범하게 행복하다. 미래를 알고 난 후 시작되는 세 번째 삶은 그래서 온전히 행복하다.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우리 부부는 갔던 여행지를 또 가는 것을 좋아한다. 5년 전 꽁꽁 얼어붙은 겨울에 훗카이도 여행을 했다. 이번에는 햇살이 쨍한 초여름에 오타루로 향했다. 비행기와 기차 안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다시 읽었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읽으며 시간에 대한 개념을 카를로 로벨리의 이 책에서 빌려왔음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여행]에서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흐른다. 무엇을 경험하고 보게 될지 모르기에 기대와 의심을 안고서.
[두 번째 여행]은 집으로 돌아와 여행을 추억하는 시간이다. 우리 이때 참 즐거웠지, 이거 재미있었지, 기억의 흔적을 새긴다.
[세 번째 여행] 의심 없이 행복한 미래를 기억하며 시작된다. 온전히 현재에 머무르며 미래의 흔적을 누린다. 우리가 가본 여행지를 또 가는 이유다.
겨울 오타루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을 초여름 오타루에서 찾아냈다. 촘촘한 등유 램프로 밝힌 홀 안에서 피아노 연주를 들었다. 높은 돔 천장 가득 울리는 피아노 소리 너머 시간의 흐름은 미래에서 현재로, 과거에서 현재로 바뀐다. 이 순간이 우리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이자 <확실한 현재>이고 <확장된 과거>이다.
“피아노를 들으며 행복하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야.” 남편이 말했다.
“나도. 이 순간을 등유 냄새로, 피아노 소리로, 설탕 없이 쌉쌀한 밀크티의 맛으로 기억하고 싶어.”
홀에서 나와 오타루 운하를 걸었다. 겨울 오타루에서는 볼 수 없었던 눈부신 햇살이었다. 오래된 창고를 뒤덮은 담쟁이 덩굴과 수면 위로 반사되는 초록, 바람이 스칠 때마다 경쾌하게 부서지는 유리 풍등 소리.
이 순간은 우리의 미래다. 의심하지 않으면 언제나 우리의 시간은 이 미래로 수렴할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닌 이토록 평범한 미래다.
1919에 문을 연 오타루 최초의 아이스크림 가게 <미소노 아이스크림>. 잠깐만, 1919년이라면? 삼일절 만세운동이 일어난 그 해 잖아? 만세 운동으로 들썩이던 그 때 오타루에서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문을 열었다니!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을 보면서 “아니 저 시대에 무슨 팥빙수를 먹는 설정이야, 말도 안 되!” 했는데 말이 되는 거였다! 도쿄도 아닌 시골 마을 오타루에 무려 파르페 아이스크림 가게도 있었는 걸.
오타루는 사실 시골 마을은 아니었다. 1900년대 초 일본 제일의 은행들이 오타루에 지점과 분점을 앞다투어 확장할만큼 번성한 도시였다. 홋카이도 은행 본점도 오타루에 위치했다. 이제는 관광의 상징이 된 오타루 운하는 오타루 항구를 드나들던 대형 선백의 짐을 창고까지 운반하기 위해 1923년에 완성되었다.
막대한 돈이 오가고, 멋들어진 건축물, 비싼 유리 장식품, 호사스러운 아이스크림 가게로 번영의 빛을 발하던 오타루는 태평양 전쟁과 함께 막을 내린다. 더 이상 물류는 오타루 운하로 수송되지 않았다. 석탄에서 석유로 에너지 흐름도 바뀌면서 광산업도 저물었다. 한때 월스트리트라 불렸던 오타루 은행 거리는 유리 공예 잡화점이 되었다. 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유리 조각들만이 반짝였던 오타루의 전성기를 간직하고 있는 듯 하다.
<미조노 아이스크림>에는 두 분의 할머니와 한 분의 할아버지가 일하고 계셨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80은 넘은 듯 보이는 노인들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벽에 한가득 붙은 몇십년 전의 홍보 포스터를 구경하며, 레트로라고 하기에도 어려울 만큼 오래된 유행인 파르페를 먹었다.
가게는 천장을 막은 시장 상점가 2층에 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시장 거리를 내다보았다. 때마침 사다리 크레인을 탄 기술자들이 공중에서 시장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조명을 닦고 있었다. 먼지로 잿빛이었던 은방울꽃 모양의 조명이 순식간에 깨끗하게 하얘졌다.
이번 여행의 주제는 <낡고 오래된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지난 달, 리추얼 메이트 슬이님이 남겨주신 문장을 따라 퍼즐을 맞추듯 소설 <이토록 평범한 미래>을 읽었고, 김연수 작가가 숨겨둔 암호를 해독하듯 책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들고 이곳에 왔다. 이 낡고 오래되고 빛바랜 옛 영광의 도시에서 나는 무엇을 발견하고 싶었던 걸까?
매일 조금씩 조금씩 실마리를 파헤치며 여행을 하고 있다.
어제는 여독으로 피곤했는데도 잠이 오지 않아 새벽까지 책을 읽었다. 창문 틈을 타고 규칙적인 기찻길 건널목 경고음이 울린다. 새벽이 되니 더욱 고요한 옛 도시에서 유일하게 울리는 소리였다.
우주의 시간은 우리가 보는 것과 다르게 작동한다. 마치 지구가 평평한 것 같은데 사실은 구면인 것처럼, 태양이 도는 것 같은데 사실은 지구가 도는 것처럼 말이다. 우주에는 시간이 없다. 현재, 과거, 미래의 구분도 없다. 인간이 지각하는 시공간은 진짜가 아니다. 인간은 시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으로 연결시킨 사건들의 총체로서 존재한다.
“시간은 더 이상 일관성 있는 하나의 캔버스가 아니라, 관계들의 느슨한 망이 된다. 여러 시공간들이 파동처럼 요동치고, 서로 중첩이 가능하고, 특정한 물체와 관련해 특정한 시간에 구체화된다.”
- 98p,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오늘은 리추얼 메이트 민이님의 기록에서 한 조각의 실마리를 얻었다.
“기상청에 근무하는 지인이 지구가 생긴 이후 똑같은 날씨는 단 하루도 없었다는 이야기를 소중한 이야기하듯 비밀스럽게 말했다. 우리가 정하는 모든 일상이 사실은 반복이 아니라 변화라는 걸 우리는 놓치고 살아간다. 이렇게 많은 걸 일상이라는 이름 속에 흘려보내는 게 인생이다.”
시간은 관점이다. 시간은 사건들의 네트워크다. 시간은 변화의 측정이다. 우리는 세상을 [어떠한지]가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로 설명하고 이해한다.
더이상 오타루에는 운하를 오가는 화물선도, 금융 거리도 없다. 마치 오늘이 지나면 내가 오타루에 없는 것처럼. 그러나 시간이 관점이라고 생각하면 나는 서울에 돌아간 후에도 동시에 오타루에 있다.
과거는 현재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단지 내가 현재와 과거를 연결지을 뿐이다. 현재는 미래를 결정하지 않지만 나는 현재와 미래를 연결지을 수 있다. 그 방식으로 현재는 미래를 향해 변화한다.
나의 존재는 시간처럼 불확정적인 변화의 총체이다. 소속 회사도, 가진 돈도, 명함도, 나의 존재가 아니다. 과거, 현재, 미래로 나를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나를 둘러싼 사건들을 연결하는 관점과 태도, 내가 매 순간 만들어내는 변화가 나다.
이것이 카를로 로벨리에 대한 위험하고 무지한 오독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어떤 오해는 삶을 아름답게 해석해주기도 한다.
여행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 나에게 어떤 이야기가 도착할까? 부디 내가 어설프게라도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를 바란다.
여행은 흔적을 찾는 여정이다.
멋진 자연은 오랜 세월동안 바람과 햇살과 물의 에너지가 만들어낸 흔적이다. 바위와 나무와 물길 안에는 시간이 쌓여있다. 고풍스러운 건축물은 오래전 번영했던 문명과 문화가 남긴 흔적이다. 새로 지어진 리조트에도 흔적은 있다. 건물 인테리어, 식당 메뉴, 소품 하나하나 그 지역 역사와 문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여행은 낡고 오래된 것들이 간직한 시간 속으로 떠나는 일이다. 시간은 흔적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시간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은 ‘기억’ 덕분이다. 지나간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면 과거는 사라진다. 과거가 없으므로 현재도 미래도 없다. 사고로 뇌 일부를 다친 환자가 시간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기억을 떠올리는데 쓰이는 부위는 미래를 시뮬레이션할 때 활성화되는 부위와 거의 같다.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미래에 투영하므로, 어떤 면에서 보면 <미래를 기억한다>고도 할 수 있다.”
- <마음의 미래>, 미치오 카쿠
인간은 스스로 경험한 변화를 기억과 기록으로 남긴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세상을 특정한 관점으로 해석해왔다.
호텔 네이슈로스는 오타루 바다의 파도와 해무를 내려볼 수 있을만큼 높은 절벽에 위치한 호텔이다. 일본 부동산 황금기에 지어졌을까, 싶을 정도로 세월이 느껴지는 곳이다. 숙소와 맛집 전문가인 남편은 네이버 검색 결과도 없는 이 오래된 호텔을 며칠 동안 연구한 끝에 알아냈다.
공들여 만든 건물과 인테리어는 시간의 흐름을 멋지게 품을 줄 안다. 유럽의 고성이 떠오르는 고풍스러운 로비,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된 중문, 창 밖으로 보이는 오타루의 바다, 저녁으로 프렌치 코스 요리가 나오는 호텔이라니.
100년 전, 물류와 금융으로 찬란하게 빛났던 오타루
20년이 훌쩍 넘은 유럽풍 호텔
10년을 함께한 우리 부부
지금 느껴지는 바다의 바람과 안개
나는 동일한 장소에서 100년이 넘는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시간은 이렇게 생생한데, 왜 카를로 로벨리는 시간이 없다고 하는 걸까. 그는 덧붙여 말한다. “시간은 물리적 실체가 없으며, 과거/현재/미래의 구분 역시 없다. 세상은 사물이 아닌 사건과 과정의 총체다. 시간은 사건의 변화를 이해하는 불명확한 관점일 뿐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호텔에 앉아 100년 전, 20년 전, 10년 전, 지금을 구분짓고 다르게 감각하고 해석하는 것은 <나>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시간이 흐른다고 감각할 뿐이다. 과거와 현재를 구분 짓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흔적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은 외부에서 본 세상이 아니라 내부에서 본 세상이다.“
시간이 관점일 뿐이라면, 우리는 시간을 파괴할 수도 있고 재건할 수도 있다. 시간은 흔적이다. 흔적은 기억과 기록이다. 기억은 시간을 만들고, 기록은 역사를 만든다. 기억이 없으면 시간도 없다. 기록이 없으면 역사도 없다.
시간은 내 안에 있다. 기억과 기록의 능선을 따라 흐른다. 그러므로 기록은 곧 나다. 나라는 정체성은 물리적 실체가 없다. 단지 관점일 뿐이다.
거꾸로 말해보겠다. 나는 기록으로 존재한다. 기록으로 <나>라는 정체성을 세울수 있다. 나는 내 관점으로 남긴 기록의 총체이다.
이것이 낡고 오래된 것을, 내 관점에서 의미 있는 삶의 변화를 기록해야 하는 이유다. 이 여행을 밤마다 기록하는 이유다. 쌓이는 것은 기록이 아니라, <나>이므로.
여행을 가면 하루는 꼭 공원에 들른다. 삿포로는 오도리 공원이 가장 유명하지만, 시내 지도를 보자마자 우리는 나카지마 공원을 선택했다. 오도리 공원보다 넓은 초록색 면적과 호수 때문이었다.
나카지마는 [중도], 즉 중간에 섬이 있다는 뜻이다. 넓은 호수 사이 사이 섬들 덕분에 공원의 풍경은 먼 숲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조각배 위에 마주보고 앉아 호수를 떠다니는 사람들, 온 공원을 뒤덮은 라일락 꽃향기, 나무 그늘 아래 시원하게 흐르는 정원 폭포수, 어른 두 명의 품에도 다 들어오지 못할만큼 굵게 자란 수령 100년을 넘긴 나무, 동화 속에 들어온 것만 같은 1860년대 호텔 호평관의 풍경.
때마침 한낮의 날씨도 좋았다. 눈 앞의 풍경은 햇살이 조명을 환하게 켠 듯 했다. 빛을 머금은 풍경 앞에서 연신 사진을 찍었다. 모네가 수련 연작을 그렸던 것도 이런 마음이었겠지.
사람마다 여행에서 느끼고 싶은 것이 다를텐데, 나는 평화롭게 초록을 느끼는 여행을 좋아한다. 나에게 여행은 다양한 초록과 햇살을 수집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두 팔을 양 옆으로 가슴을 활짝 펴고 향기, 풍경, 바람 소리를 느낀다.
1시간 즈음 지났을까. 늦봄의 햇살로 이마가 뜨겁게 달아오를 때쯤 카페에 들어갔다. 나카지마 공원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유일한 카페, 스무치 커피 스탠드. 가향 커피와 디카페인 커피, 수제 쿠키를 판매하는 이 가게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서핑 애호가 사장님이 운영하는 하와이풍의 카페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공원과 마주 앉아 아이스 디카페인 바닐라 가향 커피를 마셨다. 가만히 멈추어 있으면 가벼운 바람이 부는 초록의 계절이다.
숙소에 돌아오는 길에 일본 Tea Brand <루피시아>에 들렀다. 5월은 햇차가 나오는 시기다. 매대에는 일본 각지에서 생산된 신차가 가득했다. 킁킁 거리며 초록색 찻잎 향을 맡았다. 파파고의 도움으로 어느 지역의 차인지, 단맛과 가벼움의 정도는 어떤지 꼼꼼하게 소개글을 읽었다. 오랜 고민 끝에 고른 차는 일본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 섬 타네가시마의 신차다. 단맛과 향미가 극대화된 꽤나 개성있는 차다.
숙소로 돌아와 2CELLOS 팀이 연주한 <Benedictus>를 들었다. 이번 여행을 함께한 음악이다. 슬프다고 하기에는 아름답고, 차분하다고 하기에는 내내 감정을 흔드는 섬세한 곡이다.
행복하다는 감각이 느껴질 때, 삶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린다. 온 몸에 힘이 빠져 할머니가 된 나를 상상해본다. 주변에 남은 이가 없고 홀로 쓸쓸하게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워지는 때가 오면 나는 이 오래된 기록과 기억을 들추어 볼 것이다.
기록과 기억의 터널을 지나, 2023년 5월로 돌아간다. 눈부시게 찬란한 햇살 아래 희미하게 실눈을 뜬 내 옆에는 내 손을 꼭 붙잡고 “행복하고 평화로운 순간이야.“ 라고 말하는 남편이 서 있다.
그렇게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살아 숨쉰다. 미래는 내가 도착하게 될 평범하고 오래된 현재다. 카를로 로벨리의 말이 맞았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시간은 낡고 오래된 풍경 위로 겹쳐진 라일락 향기다. 빛과 바람의 군무로 움직이는 공원 풍경이다. 두 첼로 선율 너머 흐르는 멜로디다. 평화롭게 사랑을 말하는 장면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시간이다.
이 메모를 적고 리추얼 메이트 민이님의 기록을 보다가 놀라운 문장을 발견했다.
“계절의 변화, 자연의 변화를 이해하며 제 주변을 사랑하는 중입니다.“
정말로, 시간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