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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Jan 13. 2024

기록이 사물이 될 때까지

미니멀리스트인 나에게 사물이란 적을수록 좋은 것이었다.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는 곤도 마리에의 구호를 경전 속 말씀처럼 받들며 지금 안 쓰는 물건에게는 가차 없이 '쓰레기통행 선고'를 내리고 쓸모도 없으면서 예쁜 물건에게는 단호하게 '지갑 열지 마 처분'을 내렸다. 물건이 적을수록 집안일도 줄고 돈도 아끼고 불필요한 구매 시간도 줄일 수 있으니 얼마나 좋냐고 외치던 내가 그 굳건한 신념을 바꿀 수밖에 없는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일기 루틴]이었다.


'물건은 적을수록 좋다'는 구호에 맞추어 독서는 전자책으로 하고 일기는 디지털 메모로 쓸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는데 2년 전 봄, 우연히 일기를 권하는 유튜브 영상을 본 후로 덜컥 손으로 쓰는 일기 루틴을 시작해 버렸다. 그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습관을 유지할 줄 몰랐다. 마침 옆 자리 동료가 제휴 업체 미팅에 다녀와서 받은 신년 다이어리를 나누어줬고 어차피 오래 못 갈 루틴인데 일기장 새로 사지 말고 그냥 여기다 쓰자는 마음으로 그곳에 일기 쓰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2년 가까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일기를 쓰게 되었다.


일기를 쓰면서 하루를 여유롭게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감각이 좋아서 점점 더 일기 쓰기에 빠져들게 되었고 요즘은 시간대별로 쓰는 [시간 일기], 아침저녁으로 쓰는 [하루 일기], 주말에 한 주의 배움을 회고하는 [배움 수집 일기], 월말에 한 달의 키워드를 정리하는 [월간 일기], 연말에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 회고]까지 쓰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일기들 중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초안 중의 초안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 일기]와 [하루 일기]는 꼭 손으로 쓴다. 디지털 기기를 만지지 않고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다. 메모하려고 휴대폰을 켜면 일기를 쓰려던 의도는 금세 잊고 카카오톡과 인스타그램 아이콘을 눌러 버리는 탓에  초안은 무조건 기계 금지! 손글씨여야 했다.


촘촘하게 일기를 쓰다 보니 책장에 일기장이 점점 늘어났다. 일기장을 다 써가면 다음 일기장은 뭘로 살지 인터넷으로 찾아보기도 하고 직접 문구 매장에 가서 만져보고 고르기도 했다. 그러면서 잊고 있었던 '물건과의 추억'이 떠올랐다. 


10대의 나는 무엇이든 모으는 수집광이었다. 아주 어릴 때는 우표를 모았고 그다음에는 조간신문 사이에 끼워져 있던 광고 전단지를 모으기도 했고, 새 책을 두르고 있던 띠지를 모으고, 편지지와 스티커를 모았다. 그랬던 내가 20대가 되어서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손에 잡히는 것을 죄다 버리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쓸모가 있는지를 기준으로 눈에 보이는 모든 물건의 쓸모를 빠르게 판단하고 운명을 선고하고 내다 버렸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커다란 100 리터 쓰레기봉투를 채우며 버릴 물건을 색출해 내는 일은 아주 뿌듯하고 상쾌한 의식ritual이었다. 


10년이 훌쩍 지나
다시 물건의 참 맛을 알게 되었다.


하다 하다 결혼반지 보증서까지 버려버린 못 말리는 미니멀리스트의 거침없는 행보는 서른을 훌쩍 넘겨 일기장 앞에서 주춤하게 되었다. 촉감 좋은 가죽으로 만든 일기장, 부드러운 내지가 있는 일기장, 표지 컬러가 화사한 일기장까지 물건을 구경하고 내 것으로 만들어 곁에 두는 일은 역시 즐거운 일이었다. 10년이 훌쩍 지나 다시 '물건의 참 맛'을 알게 되었다. 20대의 나는 왜 그렇게 더 버리지 못해 안달이었을까. 아마 그때의 나에게는 내가 아닌 것들이 너무 많아서 비워도 비워도 자꾸만 내가 묻히고 사라진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는 비워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비워야만 비로소 내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30대가 넘어 매일 아침저녁으로 일기를 쓰면서 잃었던 나를 다시 되찾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난 직후의 몽롱하고 달콤한 회색 시간을 좋아하는구나.' '잠들기 전 짧게 아로마 오일로 마사지하면 잠을 깊게 잘 수 있구나.' '내향인이라 관계를 피하는 줄만 알았는데 사람이 싫은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모양의 관계가 아니어서 싫었던 거구나.' 


촘촘하게 기록하며 나를 알아가는 것은 내 위로 나를 쌓아간다는 감각이었다. 100 리터 쓰레기봉투를 채우며 정리하고 싶었던 게 정말 물건이었을까? 어쩌면 내가 버리고 싶었던 것은 어떤 시절, 어떤 기억, 어떤 경험과 상처였던 것은 아닐까. 뒤엉키고 섞여서 버리지 않아도 될 것마저 비워낸 것은 아닐지. 얼마 남지 않은 주변의 관계와 물건, 스스로의 품을 보면 마음이 쓰다.


어릴 때 만화 영화 '토이 스토리'를 보고 집에 돌아와 침대 위에 일렬로 늘어선 인형을 보며 이런 걱정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집에 없을 때 물건들이 살아 움직이면 어쩌지?' 그때는 작고 사소한 물건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곤 했다. 마치 물건에 영혼이라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효율을 중시하는 어른이 된 나는 더 이상 물건에 영혼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제 사물에게 부여하는 의미는 '쓰임'일뿐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잘 쓰는 물건이면 좋은 물건이고 아무리 비싸게 주고 샀어도 잘 쓰지 않는다면 가치가 없다는 지극히 효용 중심의 기준으로 물건을 바라본다.


나의 한 시절을 상징하고 기억할만한 사물
나에게는 그런 물건이 있나?


'오랜 시간 쓰이는 물건'은 그런 점에서 특별하다. 교토 여행에서 500년 된 사탕 가게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가게 벽면에서 가게 나이만큼 오래된 나무 돈궤 사진을 봤다. 대를 이어 가게를 운영하는 단즈카씨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이제는 더 이상 그 돈궤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돈궤는 가게의 역사와 정체성을 품고 있는 상징적인 보물이라고 한다. 비록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500년 넘게 돈괘를 간직하고 지켜냈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언제든 낡은 돈괘를 버리고 새 나무 돈괘를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버리지 않고 대를 이어 500년 넘게 지켜온 그 보물 같은 물건을 보면서 나에게는 그런 물건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한 시절을 상징하고 기억할만한 사물, 그런 물건들이 한때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없다. 모두 엄격한 선고와 처분 명령 아래 버려졌다.


기록, 기록이 남아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정말 하나도 남은 게 없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기록, 기록이 남아 있었다.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탈탈 털어 버리던 시절에도 차마 버리지 못한 것이 바로 기록이었다. 10살 때 썼던 판타지 소설, 친구와 돌아가며 쓰던 교환일기와 같은 오래된 기록은 온전한 사물의 형태로 남아있었고, 개인 노트북을 갖게 된 이후로는 에버노트, 블로그, 브런치에 남긴 기록이 디지털 형태로 존재했다. 다시 일기장에 손으로 일기를 쓰면서 '물건에 새긴 기록'은 '디지털 기록'과 완전히 다른 경험이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디지털 기록은 인터넷에 접속만 되어 있으면 언제 어디서 볼 수 있지만 마치 가상 화폐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기분이었다. 언제든 환전할 수 있다고 하지만 막상 필요할 때는 만질 수 없는 유리벽 안의 돈처럼 디지털 기록은 만져지지 않고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다가 후- 하고 불면 바람에 날아갈 것만 같았다. 


디지털 기록은 많아도 너무 많다는 것도 문제다. 너무나 많은 사물에 둘러싸여 사는 시대가 되어 더 이상 사물이 중요하지 않게 된 것처럼 너무나 많은 디지털 정보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디지털 기록은 흘러가는 순간 같다. 그 순간을 기억과 경험으로 단단하게 붙잡아 두기 위해서는 기록이 사물이 되어야만 한다. 블로그에 올려둔 사진을 굳이 인화하고, 내 돈을 들여서라도 팔리지 않을지라도 독립 출판물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바로 그 때문 아닐까. 물건만이 할 수 있는 '순간을 붙잡아 두는 마법'을 순간의 기억과 경험에 부려서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마음 말이다.


기록도 시간의 중첩 구조물이다.


기록은 사물과 닮았다. 미나토야 사탕 가게의 돈괘처럼, 오래된 사물이 오래된 시간을 겹쳐 올린 시간의 중첩 구조물인 것처럼, 기록도 시간의 중첩 구조물이다. 우리는 한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에게 사물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우리가 말하는 물건이란 여전히 살아서 쓰임을 다하는 존재다. 이미 물건이자, 시간의 중첩 구조물인 기록 역시 한번 쓰고 버려지는 일회용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기록을 통해 지나가버린 시간 속으로 돌아가 한번 더 사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다시 들여보고 싶은 기록을 남기고 싶은 마음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살고 싶은 영생의 욕구와도 닮아있다. 내 육체는 언젠가 죽고 사라지겠지만, 내가 남긴 기록은 영원히 죽지 않고 남아서 존재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경험한 시간이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고 그 시간 위에 새로운 시간이 계속 쌓였으면 좋겠다.


올해는 무조건 디지털로 쌓아둔 기록을 책으로 내자는 목표를 세웠다. 더 이상 흘러가게 두고 싶지 않고 어떻게든 붙잡아서 다시 보고 기억하고 쌓고 싶었다. 그러려면 디지털 기록을 만질 수 있는 물건으로 만들어야 하고, 그것은 책이 되어야만 했다. 문제는 요즘은 아무나 책을 낸다는 사람들의 말과 달리 여전히 출판사를 통해 책을 내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11번째 투고 메일에 정중한 거절 답장을 받았다. 책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요즘이다. '왜 내 글은 책이 안 될까?'로 시작해서 책이 된 글들을 탐구하며 예스24 장바구니에 담긴 책을 모조리 샀고, 지인이 선물해 준 수제 다이어리를 보다가 '그냥 스스로 책을 만들어보자.'는 충동적인 생각에 북바인딩 키트까지 덜컥 주문해 버렸다. 자본주의에서 늘 고민의 결론은 소비가 되고 만다.


북바인딩 키트가 도착한 날, 며칠 전 구매한 사진집도 함께 왔다. 사진집을 산 것은 처음이었다. 편향적인 창작자인 탓에 글이 아닌 형태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는데, 단골 베이커리 직원과 손님으로 인연을 맺게 된 은실님이 두 번째 사진집을 독립 출판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주문했다. 그의 독립 출판물 [A Wander's Wonder]는 내가 처음으로 사본 사진집이다.



사진집을 산다면 그건 아는 누군가의 사진이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사진을 어떻게 감상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의 시선으로 사진을 보면 뭔가 보일지도 모르니까. 글도 사실 그렇다. 글의 내용만큼 중요한 게 글 쓴 사람이다. 나와 조금이라도 연결되어 있다고 느껴질 때 이야기가 들리고, 장면이 보인다. 유명인의 책이 잘 팔리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A Wander's Wonder

이 제목을 내 나름대로 해석해 본다면 [낯선 시선으로 본 익숙함]이다.


나는 내 시간을 사기 위해 내 시간을 파는 사람이라 늘 시간이 부족한데 아주 잠깐이라도 시간이 나면 하는 것이 바로 [낯선 시선으로 익숙한 풍경을 보는 것]이다. 멀고 이국적인 풍경을 보러 가려면 아주 많은 시간을 사야 하고, 그러려면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팔아야 하는데 내가 가진 시간은 한정적이라 시간을 팔아서 번 시간으로 멀리 떠날 수 있는 기회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만 주어진다.


잠깐의 시간을 살 수 있을 때, 익숙한 집 근처 공원으로 동네 카페로 옆 아파트 벤치로 간다. 그리곤 마치 그곳에 처음 와본 사람처럼 낯선 마음과 새로운 시선으로 익숙한 풍경을 본다. 그러다 보면 보인다. 잘 아는 것 같지만 사실 거의 아는 게 없었던 것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금세 변해버려서 모르게 된 것들을.


아는 사람의 기록을 보는 일은 그래서 더 재미있다. 이 사람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 안에 무수히 다른 모습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수록 내가 보는 것이 나인지 그 사람의 기록인지 헷갈린다. 실제로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다 허구다. 사이비 종교나 유사 과학이 아니라 이건 정말 과학을 토대로 한 사실이다. 우리가 보는 나뭇잎의 초록색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느끼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의식이 시간도 공간도 색도 이야기도 모두 다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는 실제 세계를 보고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을 통과해 왜곡된 세계를 머릿속으로 만들어내 그것이 실제 세계일 거라고 추정한다.


아무리 열심히 보고 듣고 느낀다고 해도 우리는 오로지 우리 안에서 살아갈 뿐이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갈 세상을 매 순간 만들어내고 있다. 어떤 삶을 살아갈지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매 초마다 선택에 선택을 거듭하며 온전히 내가 만들어내는 삶 안에 살고 있다. 그 엄청난 프로세스가 무의식에서 일어나기에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다시 사진집의 제목으로 돌아가서, A Wander's Wonder는 그런 의미에서 모순적이기도 하다. 방랑자(wanderer)가 마주한 경이(wonder)는 사실 우리 안에서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기도 하니까. 모든 것을 마음의 문제라고 쉽게 넘겨 버리고 싶지는 않다. 그 마음이 정말 문제 중의 문제여서 내 마음인데도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까.


스스로 책을 만들기 위해 구매한 북바인딩 키트와 은실님이 스스로 만든 책을 나란히 바라보며 스스로 묻는다. 나는 무슨 책을 만들고 싶은 걸까? 내 삶이 책이 되길 바라는 걸까, 아니면 책이 될만한 삶을 가지고 싶은 걸까.


모호한 질문 속에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나는 내 글 속에서 헤매고 방황하고 유영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내 글이 내 안에서 나온 것이지만 나의 외부 세계에 존재했으면 좋겠다. 그것을 만지고, 읽고, 보고 싶다. 


내 글이 하나의 물건이 되어서 나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유용한 무언가가 되기를 바란다. 종족 번식을 통해 인류가 DNA를 후세에 남기는 것처럼 내 생각이 내 몸 바깥으로 빠져나와 기록이 되고 글이 되고 책이라는 물건이 되어 시간이 지나도 남아 있기를 바란다.


그 열망이 자주 나를 집어삼키곤 하지만 그 열망 덕분에 내 안의 경이(wonder)를 마음껏 찾아헤맬(wander) 수 있다는 게 사실은 꽤나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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